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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기독교계를 구분하면서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 천주교)을 구교(舊敎),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를 신교(新敎)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로마 카톨릭과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관계를 형님과 동생, 또는 큰 집, 작은 집 등에 빗대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로테스탄트는 로마 카톨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그것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는 여러 개의 교파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였던 루터교를 시작으로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교, 침례교 등의 다양한 교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각 교파마다 그 시작된 년도는 다르지만 그 시작은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항으로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반항자, 저항자, 또는 항의자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밥티스트(Anabaptist)는 무엇일까요? "Ana"라는 말은 "re(다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시 침례를 행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으로 로마 카톨릭 진영에 의해 불려지게 된 명칭입니다. 이들은 카톨릭이 행하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침례란 믿는 자들에게 주는 것(막 16:16)인데 유아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렸을 때 받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영접한 후에 다시 침례를 받음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이런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명칭은 종교개혁시대에도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비난받는 명칭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언제나 하나의 흐름으로 그 전통을 이어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로간의 차이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또 이름이 없는 그룹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하나같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교회의 모습은 신약성경에 약속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 로마 카톨릭이 성경말씀에서 빗나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속하지 않았고 늘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향해서 분리주의자라는 좋지 못한 의미로의 별칭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유일한 교회로 존재했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아나밥티스트들의 존재는 그게 아니었음을 증거해주는 자료가 됩니다.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볼 때, 그들에 관한 자료는 곧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였다는 의견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 세 명의 의장 중에 한 사람이었던 호시우스 추기경(Hosius, 1504-1579)은 반종교개혁을 추진하는 인물 중에 하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 1200년 동안 침례교도들이 괴롭게 고문당하지 않고 칼에 베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든 종교 개혁파들보다 더 다수의 무리를 이루었을 것이다"(편지 Apud Opera, 112, 113). 이 로마 카톨릭의 박식한 학자는 침례교도들을 분명히 프로테스탄트와 구별짓고 있으며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 개혁이 있기 1,200여년 전 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로마 카톨릭을 정통교회로 인정치 않아 배척했었습니다. 이러한 일치될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있던 로마 카톨릭은 아나밥티스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에서부터 분리되어져 나온 프로테스탄트들은 반로마를 외쳤음에도 그 안에서 로마 카톨릭이라는 틀을 깨지 못하고 그들의 전통을 답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전통들이 로마 카톨릭의 것과 일치하는 한, 아나밥티스트와는 일치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사적인 자료들에 의해 종교개혁시대에 아나밥티스트들이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성경을 신앙생활의 최종, 최고의 권위로
우선 아나밥티스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성전(전통)의 권위 밑에 두는 로마 카톨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었던 자들이 바로 아나밥티스트들입니다.
물론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 중에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본래 사제였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 저항을 하면서도 결국 성경과 대치되는 그 전통들을 고스란히 다 포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떠한 종교의식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 보다는 그것이 전통적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가운을 입고, 타종을 치고, 어떤 기도문들을 인정하고, 축도를 하는 등... 이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이 자체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의식 속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교도의 영향이었음도 서슴치 않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행하는 까닭은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을 하고 있지 않느냐 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성경적인 진리들이 묵살되는 것을 아나밥티스트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성경이 모든 것의 가장 기초인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규정하는 것도 성경이며 성도의 삶을 말해주는 것도 성경, 하나님의 진리를 말해주는 것도 오직 성경임을 믿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5)
2)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아나밥티스트들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습니다(엡 5:23). 물론 프로테스탄트들 역시 표면상으로 이러한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로마 카톨릭이 교황권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의 개교회가 간섭받고 통제되듯이 프로테스탄트들은 총회라는 정치기구를 통해 간섭받고 통제되어집니다.
왜 많은 카톨릭의 교황들이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했다는 의미보다 그리스도의 위치를 대신하려고 했던 데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제시했습니다. 사실은 교회와 만물 가운데 그리스도를 대리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총회장도 그 권위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나밥티스트들은 독립교회적인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목양자인 장로, 감독을 부인하지 않지만 오직 교회의 본부는 천국에 있음을 믿습니다.
3) 교회와 국가의 분리
본래 로마 카톨릭은 로마라는 국가 정치 조직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혼합되는 비성경적인 체제 속에서 막강한 세력을 잡자 권력을 휘둘러 연약한 자들을 지배하게 되는 폐단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에서부터 나온 프로테스탄트들 역시, 국가세력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이용하고 말았습니다.
루터교가 독일을,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교회가 스위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을, 존 낙스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를, 성공회가 영국을 등에 업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국가와 어느 정도 밀착하고 있느냐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교회지도자나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대부분 그것을 찬성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교가 기독교가 된다면 그들은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밥티스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의 국가적인 개념으로 나뉘거나 영향을 받는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엄격하게 분리되고 있습니다(마 22:31).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성직자)이다.
로마 카톨릭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지으면서 일반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성직자들이 대신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이에 분개한 루터가 '만인제사장'이라는 성경적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였던 루터가 그런 말을 했을지라도 오늘날 여전히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으로 다시 난 자가 제사장이라는 개념보다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의존적이며, 목사에게 중보적 개념을 은근히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도(강복선언), 가운, 제복, 강대상에 대한 신성한 의미부여 등... '기름부음 받은 자를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 그들의 소리는 목사가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그들을 절대시 또는 우상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거듭나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늘날 제사장(성직자)이기 때문입니다.
5) 믿는 자들에게만 주는 침례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에는 교회의 일원을 만들기 위해 침례 또는 세례를 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들이 침례 대신 세례를 주는 것은 전통을 따른 것으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이 없음에도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역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는 군대입니다.
그 곳에서는 누가 더 많이 세례를 주는가를 시합하는 것과도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에게 침례를 주라고 말씀합니다(행 2:38). 그러므로 믿고 거듭난 사실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는 세례 및 유아세례는 교회 문화에 익숙한 교인을 만드는 것이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이러한 침례 또는 세례문제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을 따라 전통적인 방법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침례 또는 세례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로써(롬 6:2-7)의 침례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말했던 대로 단지 죄를 씻는다든지, 교회에 입교하는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만 출석하는 많은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선행이 되었든지, 종교적인 행동이 되었든지, 구제가 되었든지,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자기 의(義)로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옛생활이 단절된 사실이 없이 하늘의 복과 현세의 복을 겸하여 누리려는 욕심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신앙적 문제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면, 이것이 복음에 영향을 미치지만 않는다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 아니냐며 반문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복음이 우리의 어떤 개념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복음은 성경적인 복음이 아닙니다. 왜 바울이 우리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부탁했습니까(빌 1:27)? 믿는 자의 삶 전체에 미치는 복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의식이 프로테스탄트의 의식에 비해 단조롭고 형식파괴적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단순화를 원하는 현대인의 감각이나 기호에 맞춘 것이라면, 또는 어떤 특별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밥티스트들의 그러한 단순화된 의식은 복음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결코 분리되어져 생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6)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영원한 대속(히9:12)
이제 프로테스탄트와 아나밥티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언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양쪽의 견해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피로 인간을 위한 속죄 희생을 다 이루시고 단번에, 영원히, 그리고 완전한 죄 사함을 이루어 놓으셨다고 믿으며 주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계속적으로 죄 짐을 벗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론상으로는 단번에 죄사함을 받았다고 가르치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고해성사를 통해 자기의 죄를 처리하던 것과 같이 프로테스탄트들은 회개라는 수단을 통해 반복적으로 죄의 용서 받으려 합니다.
성경적으로 회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용서 받기 위해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자백이라는 용어로 말씀합니다(요일1:9). 그것은 단순히 털어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놓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 사함을 위해 완벽한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 아나밥티스트라면 표면상 아나밥티스트들과 동일하게 말하지만 그 이면으로 죄 용서를 위해 인간의 수고를 부추기는 것이 프로테스탄트라 할 수 있습니다. 더 깊이 나아간다면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길 원해 신앙에 입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을 믿고 의지하는 차원에서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 받았네"라고 찬양하는 사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해 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후자의 사람들과 같이 간절한 호소 속에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언제까지나 그런 호소를 노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은 사람들이며, 지옥 문 앞에서 떠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앉게 된 사람들입니다(엡 2:5,6).
그러면 로마 카톨릭에는 구원이 없을까요? 프로테스탄트들은 구원받지 못할까요? 오직 아나밥티스트만이 구원을 받습니까?
로마 카톨릭 안에서도 구원받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카톨릭이 주는 구원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성경대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얻는 구원일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안에 있으면서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이 구원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체제가 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아나밥티스트들 가운데 섞여있지만 전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나밥티스트라는 체제가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로마 카톨릭이 말하듯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아들이 그 안에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요일 5:12).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4). 물론 그 네 몸이란 말은 사라를 지칭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좀더 넓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 혼을 구원하는 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얻는 일을 해나간다는 모형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후사를 얻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 없이는 어떤 수를 써도 사라가 이삭을 나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모임이 되었든지 혼들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그분이 중시되지 않는 모임, 형식, 전통, 행위 요구 등, 여러 가지 장애물로 그 분을 가리는 모임은 구원 얻는 혼들을 낳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가 여러 장애물로 구원을 얻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아나밥티스트, 그 무엇이 되었든지 구원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체제를 보호막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 외에 어떤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혹은 위로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단 말입니다. 또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틀린 것이 있다면 그 속에 안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구원을 얻는 믿음, 곧 행함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던 바울이 그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 근심과 슬픔의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동족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언약과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있음에도 영원히 송축 받으실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바울의 마음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찬송함,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기에 유리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다른 타종교의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르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요?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그들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고수해야 할까요?
과연 그들과 일치 될 수 있을까요? 시작부터 다르기 때문에 일치 될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가르치는 내용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무지한 집단이라고 쏘아붙여야 할까요? 실지로 그렇게 하는 모임들도 있었으나 그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을 비방하지 않는 자라고 한다면,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금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편인 것입니다(막 9:38-40).
나와 다르다고 해서 죽이는 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살인할 수가 없습니다(요일 3:15). 기독교 역사 2000여 년 동안 자신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던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복음교회, 혹은 재침례교회라는 이유로 그와 같지 않은 다른 교회들을 말로든 글로든, 칼로든 죽이려 한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가를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문제점에 대해 말해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들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넘어가는 자는 다 절도며 강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반드시 그 가는 길이 사망의 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짓는 개처럼 소리쳐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의식(규례)을 의지하는 자들, 선행을 의지하는 자들, 자기 구제와 열심을 의지하는 자들, 교파와 조직 교회를 의지하는 자들, 전통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경배 받으실 참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 운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모든 종교적 형편에 마음을 두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의 그 애타는 마음으로 결코 포기되어질 수 없는 전도대상자였던 이스라엘처럼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진정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얼마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해 올바로 깨달을 때, 놀랍게도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올바른 프로테스탄트도 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일이 부족하다면, 때때로 그들 중 많은 수가 다른 종교의 신들을 숭배하듯 주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 예수님의 가치를 희석시키고, 이교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총수인 로마 카톨릭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개신교라면 진정한 개혁은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약교회로부터 멀어져 간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말해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