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주택과 노인복지법의 진실
우리 모두는 노인복지주택의 분양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그들의 거짓말
"우리는 시장을 그냥 내버려둬야 해! 시장에 참가하는 주체는 모두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합리적이라고. 시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보다 열등한 정보를 보유한 정부가 그들이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하려는 행동을 못하게 한다든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야!"
“노인복지주택이라는 노인복지시설의 분양은 그냥 민간기업이 주도하도록, 다시 말해 건설회사가 자유롭게 분양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둬야 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일일이 간섭하고 규제해서는 건설경기에 악영향만 미칠 뿐이야. 지금은 능동적 복지를 얘기하는 시대라고. 정부에서 복지를 해 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해. 스스로 복지를 책임져야하는 시대란 말이야. 특히 노인 부양은 1차적 책임이 가족에게 있는 거야. 정부에서 간여할 바가 아니지.”
진실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우리가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직전에 우리는 이른바 금융 혁신을 통해 모든 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우리의 의사 결정 능력은 이런 복잡성에 압도당해 버렸다. 앞으로 유사한 금융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금융 시장에서는 행위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마저 그 내용과 영향을 알지 못하는 상당수의 파생 금융 상품은 폐기되어 마땅하다."
“복지를 시장에 맡기고, 정부에서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만 높아지는 것이다. 규제의 긍정적인 효과를 간과한 결과 민간기업(건설회사)은 최악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채에 40억이나 하는 유료노인복지주택(사실상 자립형 사립 양로원)을 분양한다든지, 1,000세대가 넘는 대단지를 계획한다든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리는 등 결국 파국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복지시설을 ‘분양’할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법조문만을 추가로 넣어버림으로써, 경우의 수가 갑자기 10배, 100배, 1,000배 늘어나 버렸다. 일선에서 복지담당 공무원 한명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이미 넘어서 버린 것이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마저 그 내용과 영향을 알지 못하는 ‘유료노인복지주택의 분양’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숫자 놀음
복지부에 의하면 유료노인복지주택의 수는 2003년 말-2003년 서울과 분당에 설치신고 된 시니어스타워를 제외한 2003년 이전에는 그 수치가 더 미미하다는 얘기다-과 2009년 말을 비교했을 때 엄청난 차이가 난다.
2003년 말 전국에 6곳에 불과하던 유료노인복지주택이 2009년 말 전국에 19곳으로 늘어났다. 이는 공식적인 입장이고 비공식적인 숫자(미신고 유료노인복지주택과 신고 폐지된 유료노인복지주택)까지 포함하면 20곳을 훌쩍 넘어선다.
문제는 20곳이 넘는 이 유료노인복지주택 중 절반 이상이 [분양형]이고, 또 그 [분양형]중 절반 이상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복지부가 해온 것은 이렇듯 그 심각한 부작용과 폐해를 무시한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유료노인복지주택을 분양함으로써 얻은 것은 수치상 '유료노인주거복지시설'이란 것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것 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손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 즉 자유 시장 경제논리로 보면, 노인복지시설의 수요와 공급도 온전히 시장에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일부러 나서서 조정하지 않아도 서로 조화(파레토 최적)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리라는 믿음 말이다.
예를 들어 (분양가 상한제 따위는 없다하더라도) 어떤 건설회사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이 '노인복지시설'을 분양한다고 치자. 그 결과 분양이 거의 안 될 것이고 결국 건설회사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든지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이른바, 독일이나 일본식 접근법이다.
그들은 말한다. 복지사업을 시장에다 온전히 맡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중앙 정부의 철저한 계획과 처음부터의 행정개입으로 오류를 막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잡하고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의해 중요한 복지정책이 갈기갈기 찢길 우려가 있다.
또한 중앙정부가 ‘계획’한다는 것은 자유 시장 경제논리의 입장에서도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 정부나 어떤 기업들도 '계획' 없이 사업을 집행하지는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누구 말이 진실일까?
애당초 유료노인복지주택이라는 복지사업에는 경우의 수가 많지 않았다.
민간에 이 복지사업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입주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최악의 경우였고, 그 외 소소한 몇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곤 했었다.
이럴 경우 '경우의 수'는 많아야 10가지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민간업자에게 온전히 맡기고 주택처럼 분양할 수 있게 한다면 갑자기 그 경우의 수가 10의 제곱으로 늘어나 버린다. 즉 10배 이상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법으로 이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가정하여 규정을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행정 실무 담당자도 제 아무리 똑똑하다 하더라도, 이를 모두 예측하고 즉각 대응하기 힘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를테면 사기 분양하면 안 된다고 일일이 분양 현장과 전매 현장을 찾아다니며 말할 수도 없고, 설령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해도 전혀 먹혀들 리 없기 때문이다.(복지부의 업무지침에는 이렇게 하라고 나와 있다!)
사후에 공정거래 위원회에 얘기해도, 법원까지 가서 재판을 해도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그 많은 경우의 수(수많은 사기분양의 수법을 포함해서)를 모두 알고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가관청에서부터 이게 뭔지 제대로 모르고 허가해 준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우의 수를 갑자기 늘려버림으로 인해-복지시설의 분양을 허용함으로 인해- 전문가라 할 사람들도 정확한 내용과 그 영향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가 전문가들 대부분이 "복지시설"을 "주택"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결국 노인복지시설의 분양이라는 것을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될 만큼 우리 모두는 똑똑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체스와 경우의 수
64개의 칸으로 32개의 말을 움직이는 체스는 비교적 단순한 게임으로 보일수도 있으나(사실 바둑에 비하면 체스는 단순한 게임이다) 체스에서는 한 게임당 평균 10의 120승(10에 0이 무려 120개 달라붙는다!)에 달하는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이를 ‘합리적’으로 모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경험과 직관으로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논리로 ‘노인복지사업’에 너무 많은 경우의 수를 두면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이 사업의 대상자가 주로 고령자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라고 그 분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의 총리께서는 노부모 부양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은 국격에 맞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국격에 맞는 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령화 사회의 당면 문제를 국가 아니라 그 누구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이 모두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총리뿐 아니라 노인복지정책을 책임져야 할 주무부서에서는 유료노인복지주택의 분양 또한 개인이 알아서 할일이라-당사자간의 분양계약을 복지부가 간여할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는데, 복지부의 이 같은 답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도적으로 선택을 제한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우선은 유료노인복지주택의 분양을 금지하기만 해도, 수 만 가지의 선택(경우의 수)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인복지시설의 수요와 공급이라는 환경을 단순화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으로는 이 세상의 복잡성에 대처할 수 없는 것이다.
건설회사 등 민간 공급자 입장에서도 제한된 선택을 함으로 인해 오판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부분을 잘 검토해서 유료노인복지주택의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주)도입부와 본문 내용 중 일부는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