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모 대학의 교수를 지낸 모교수의 실제 이야기이다.
[현존하고 있을 수 있는 분이기에 이름은 밝히지 않음]
이 여교수는 본래 만석꾼의 딸로서 서울의 모대학을 졸업한 뒤 세계일주까지 하고 귀국하여 결혼을 하였지만, 신혼때 그만 6,25사변이 발발하여 남편은 납북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여교수는 유복자인 아들을 정성껏 기르며 살았다. 아들은 수재여서 대구 경북중학교를 졸업한뒤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유일한 정신적 의지처였던 착하고 공부 잘하든 외아들이 한강의 광나루에서 친구들과 수영을 하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아들의 나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였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던 교수는 그 소식을 전해 듣자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응급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려 서울에 올라왔지만, 대학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는 아들의 시신을 보는 순간 또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다음날 홍제동의 화장터에서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아들 시신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교수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말았다. 의젓하고 교양있던 여교수는 정신병자로 돌변한 것이다.
그 교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종로 네거리를 다니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 증상이 나무나 심하자, 집안 식구들은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순순히 가지 않는 그 교수의 온몸을 끈으로 묶어 병원 지하실에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켰다.
그러나 그 교수의 정신은 바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얼마 동안은 아들을 부르면서 벽에다 머리를 찧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가 하면, 손톱으로 얼굴을 쥐어뜯기까지 하였다 한다.
그야말로 자식에 대한 애착과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충격이 그 교수를 정신병환자와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병원에서 몇 달을 치료받든 동안, 그 교수의 정신이상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므로 가족들은 절에서 요양시키고자 하여 해인사로 보냈다. 그 때의 여교수는 정신상태는 아주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앉아 있으라면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서 있으라면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옆에 사람이 지나가도 돌아보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증상도 조금씩 나아졌다.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오면 일어서고,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면 뚫어지도록 무섭게 쳐다보다가 그 사람의 자취가 멀리 사라져서야 비로소 눈길을 다른데로 돌리곤 했다.
이렇게 또 얼마가 지나자 이제는 사람이 앞에 오면 인사를 할줄도 알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으며, 차츰 스님들과 한두 마디의 대화를 시작하더니, 말이 늘어나서 세계일주를 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여교수는 강의를 많이 하였던 때운인지 말도 아주 잘 하고 듣기도 잘 하였다 한다.
이 때부터 스님들은 인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고 전생과 금생과 내생이 다 인과업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생에 지은 대로 금생에 받고 금생에 짓는 대로 내생에 받는다는 이야기며, 불경 속의 게송이나 설화도 많이 들려 주었다 한다.
그 내용은 “ 무릇, 이 세상에 형상이 있는 바 모든 존재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보면 그 즉시에 여래를 보리라”. 하는 내용이였다.
이와 같은 게송을 읽어 주고 설명해 주면 곧잘 알아듣고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는 허망한 것이지만, 우리의 참 마음자리는 전생에서 금생으로, 다시 내생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죽지 않는 불성[佛性]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점차로 귀가 열리고 인과를 믿는 것 같았다 한다.
어느 날, 스님들로부터 인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교수는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했는데 “아...! 스님, 그러고 보니 저의 전생은 술집 며느리였습니다.
스님들은 처음에는 이 분 정신이 또 이상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면서 동정을 살피는데, 이번에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버선을 벗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연후에 오른발 복숭아뼈 부근의 빨간 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점이 전생에 술집 며느리였음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의 줄거리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녀가 만석꾼인 안부자 집에 태어날 때 그 집은 대구 삼덕동에 있었는데, 허름한 노인이 찾아와서 대문을 두드리며 묻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 이 댁에서 여자 아기를 낳았는지를 알아 보고자 하여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안부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노인을 사랑채로 불러 들인 다음 내실로 사람을 들여보내 알아 보게 한 결과, 방금 딸을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름한 노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기의 오른쪽 발 복숭아뼈 밑에 빨간 점이 있는지를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갓난 아기의 발에 불을 비추어 살펴보니, 과연 빨간 점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노인은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부자가 곡절이 있음을 알고 약주를 대접하며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저희 늙은 내외는 저 수성못 가에 살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들을 하나 두어 결혼을 시켰지만, 아들은 가난한 것이 한이라며 북만주로 돈 번다고 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고, 홀로 남은 며느리만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어찌나 효부였던지 시부모를 모시는 정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며느리는 우리 노부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수성못 가에 자그마한 선술집을 차렸습니다.
술을 받아다가는 찬 물을 타서 마을 사람들한테 팔아 우리 부부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했습니다. 젊은 과부가 술을 판다고 하니 이런 저런 남자들이 모여들어 술을 사 먹었기 때문에 세 식구는 끼니 걱정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며느리 덕에 편안히 살았지만, 며느리는 추운 겨울에도 솜옷 한 벌 제대로 못해 입고 맨발로 지내다 보니 그만 감기가 들었고, 감기가 폐렴이 되어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하더니, 병원에 가서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지난 봄에 죽어 버렸습니다.
며느리가 죽고 난 뒤에 저희 늙은 내외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불쌍하게 죽은 며느리 생각을 한시도 놓지 못하였는데, 어제 저녁 꿈에 며느리가 나타나 절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오늘 산너머 부잣집에 태어납니다. 제가 어머님 아버님을 꼭 도와 드릴 것이오니 너무 걱정마시옵소서.
그리고 일어나면서 복숭아뼈를 가리키는데, 보니까 빨간 점이 있었습니다. 잠을 깨어 할멈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도 밝고 며느리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발길이 저도 모르게 이 집에 미쳤습니다만, 이제 말씀을 듣고 보니 틀림없는 저희 며느리의 환생입니다“.
만석꾼 안부자는 노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한데다, 구중궁궐 같은 만석꾼 집 안채에서 방금 낳은 아이의 오른발 복숭아뼈 밑에 붉은 점이 있음을 알아맞힌 것 등을 미루어 노인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부자는 당장 필요한 생활용품도 주고 좋은 논 열마지기를 주어 노인 부부의 생계를 도와 주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여교수의 어릴 때 별명은 “술집 며느리”가 되었고, 할아버지가 야단을 해서 나중에는 부르지 않았지만 네다섯 살까지는 “술집 며느리”라고 놀려서 많이 울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를 끝낸 다음 여교수는 또 말했다.
“스님들께서 전생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니 그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틀림없습니다. 보살님이 전생에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님을 봉양한 공덕으로 금생에 만석꾼 집에 태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구정물에 손 한 번 넣어 본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추삼조차 옆에서 싸서 주면 받아먹기만 했습니다. 평생을 무엇이나 뜻대로만 하고 호강만 하였는데, 결혼해서 남편을 잃고 이제는 하나뿐인 자식까지 잃었으니, 이 모두가 술을 판 과보요, 전생의 인과응보인 것 같습니다”.
시부모 봉양을 지성으로 한 복은 복대로 받았지만, 술장사를 하면서 좋지 않은 업을 지었기 때문에 금생에 아들을 잃고 정신을 잃는 업보를 받은 것임을 그녀는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이와 같은 자신의 인과응보를 분명히 깨달은 그 여교수는 완전히 정상인으로 돌아와, 그후 매우 의미 깊은 사회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출처 - 대원사 재극스님)
첫댓글 '일타스님의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 - 전생의 술집 며느리' 에 소개된 내용으로
이전에 제가 이 글을 수도암 카페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원덕스님께서 이 여교수님을 잘 아시기에
댓글로 설명한 내용이 있어 올려봅니다.
<2012.12.28 원덕스님>
여교수는 실존인물로 대구 수성구 모 아파트에 살고 계십니다.
나이가 정묘생이니까 해가 바뀌면 86세가 됩니다.
경상도 일대와 대구지역 구미지역에 대지를 수십만평을 소유한 보살인데 지금은 불교계와 교육계에
모든 땅을 헌납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인텔리 여성입니다.
산승하고도 막역한 사이이며 자택에도 많이 방문해 봤습니다.
대구시 동구에 가면 진인동에 땅이 6만평이 있는데, 그 땅을 우리 은사스님이신 도림 법전 대종사께 보시하였습니다.
은사스님은 그 땅에다 사찰을 창건하셨는데 그 절이 바로 '도림사'입니다.
꾸준히 불사를 해서 지금은 대구에서 동화사 못지않은 대형 사찰이 됐습니다.
이 보살님은 나만보면 "스님! 나같이 팔자가 더럽게 타고난 여자가 또 어디있습니까?" 하고
신세타령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보살의 남편은 서울대학교 교수였는데 6.25때 이북으로 납치되었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한강에서 물에 빠져
죽는 아픈 상처를 겪게되어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님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아셔야 합니다.
남편이 무능하다고 탓하지 마시고, 남편 속옷 빨고 남편 밥 해줄 때가 좋은 때이고,
자식이 학교 성적이 나빠도 그 자식이 다음에 본인 임종시 지켜볼 놈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도 학교 성적순이 아니니까요!
세속에서 살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가족이 없으면 인생을 사는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이 보살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해드릴까 합니다. ~~
감사합니다..()
옴아비라훔캄스바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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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아도 가족이 없으면 인생을 사는 의미가 없겠지요........세속에서는...........
옴아비라훔캄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