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음을 가지면서 가장 혼란 스러워 하는 부분이 구원과 그에따른 삶입니다.
혼란스러운 이유는-
구원을 말하면서 삶의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이해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실때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뽑힐까 염려되니 그대로 두었다가 추수를 할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 하시겠다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교회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일까요?
성경은 믿음을 그 기반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만- 다 믿는다고 하니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믿음과 그렇지 못한 믿음이 교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걸까요?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은 무슨 믿음일까요?
우리가 믿음의 장이라고 일컫는 히브리서 11장을 참고해 보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아벨에서부터 주님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가진 선진들의 모습들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분들의 믿음에는 하나같이 막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고 보이건 보이지 않건 주님의 명령에 따랐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출애굽이 가능했고 홍해를 건널수 있었으며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좇을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결박과 희롱과 채찍질과 돌로 치는것과 톱으로 켜는것과 칼에 죽는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기꺼이 받을 수 있었으며 믿음이 있었기에 그 증거를 받은 사람만이 견디고 이겨낼수 있는 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으니 그것이 막연한 천국을 바라며 대충 인생을 때우는 것이 아닌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동구라파가 공산화될때 교회가 무너지면서 성도들이 심연 깊숙히 눈물로서 믿음을 지켜가던 간증들이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의 간증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같은 동포이자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카타콤이 있었고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가 있으며 이슬람을 복음화 하려는 선교사들의 죽음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내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래서 난 천국에 갈 수 있다 라는 사실관계에 대한 알량한 확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주님을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고난과 고통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닮아가고 인격을 닮아가고 사랑을 닮아가고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때문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내 형제도 사랑할수 있게 된것이며 그 사랑에서 제외된자를 찾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목숨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자의 증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한번 거듭나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나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듭난 자라면 연약한 육신의 미혹이 있을지언정 죄를 자청할 수는 없습니다.
도피성이 불가피한 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을수 있었지만 고의로 죄를 범한 자조차 용서 될 수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의로 죄를 짓는자는 단언컨대 구원받지 못한자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은 믿음의 연약함이며 그것은 영의 양식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영적훈련으로 성장시켜 가야합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을 못 받았거나 육신에 천착하려는 나태함 때문입니다.
연약한 믿음은 선한 욕망은 있으되 선행이나 전도는 커녕 자기의 믿음 지키기도 버거울지 모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젖먹는 믿음 말입니다.
선행이 믿음을 구분지울수는 없기에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자의 선행은 믿음의 척도에 따라 반드시 그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거듭났다 하면서 선행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증거요
거듭났으면서 선행을 하고있지 않다면 아직 젖먹는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삶이 바탕이 되지 못한 믿음은 복음전도를 난감하게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대형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바르지 못 한 행태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회를 상실 당하고 교회를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그리스도인의 성실함에서 나태하여 복음의 열정까지 나태하여 지지는 않았나요?
다른 사람들을 핑계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나의 믿음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타인에 대한 관계는 나의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까?
첫댓글 좋은 말씀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사람은 선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사랑도 착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때를 얻든지 못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다른 사랑을 낳고 죄악은 또다른 죄를 낳습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애통한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나가야만 최후 승리를 얻게 될것입니다.
주님 남탓하는 저를 용서해주시고 모든것 주님께 내려놓고 주앞에 나아가게 은혜 베풀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안믿는 사람보다 못 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만 믿음의 세월이 쌓여감에도 변화없는 그리스도인을 우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언젠가 그런 실의에 젖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하고 믿음이전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변화해 가야 되는건지를 많이 고민해 보았답니다.
진보통합의 이정희대표를 보면서 정의를 부르짖던 육신의 허구와 나약함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노력은 육신의 한계까지입니다.
아무리 고고하고 선하고 정의로운것 같은 사람이라도 추구하는 진리가 주님과 멀어져 있으면 그들은 육신의 한계가 안겨주는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육신과 영혼의 주인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인이라도 평소의 삶을 주님과 더불어 살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훌륭한 말을 할지라도 육신에까지밖에 이르지 못 할 것이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실의와 절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당당하고 떳떳한 삶.
고난과 핍박이 와도 기쁨이 넘치는 삶.
노력하지 않아도 인내와 온유와 사랑이 형제 자매에게 전해지는 삶.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해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삶.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복음을 곳곳에 퍼뜨리는 삶.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이 있는 삶.
그런 삶들이 불가능 한걸까요?ㅠㅠㅠ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말씀을 실천하라고 주셨을까요?
주님의 제자들은 다 그렇게 살았는데 우리만 안되는걸까요?
안된다고 하지 마십시요.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함께 한다면...
거듭난 자라도 육신의 미혹을 따르다보면 고의로 죄를 지을수도 있지않겠습니까?
고의로 죄를 짖는자는 단연컨대 구원받지 못한자라는 선언은 누가 하는것일까요? 확신의 주체자가 인간인가요? 하나님인가요?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구원받지 못한자라고 확신할수없지않습니까? 구원이 취소될수는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