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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을 전후 한 시기에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
대구 10·1 사건: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운동.
(광복 이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기의 남한내 민중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에 대한 항거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독립촉성중앙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분노한 우익 세력은 우익 세력대로 살상을 자행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유언비어와 반감, 공포가 합해져
유혈사태는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됨.)
1948년 국제 연합(UN)의 결의에 따라 한반도 남부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
7월 17일에 제정된 건국헌법에 의해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
(1948년 5.10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헌법기초위원회를 통해 헌법초안을 기초하는 과정에서
소장파 의원 김광준의 주도로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규정할 수 있는 규정이 대한민국 건국헌법에 마련되었다.)
반민법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법을 기초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하여 재석위원 155명 가운데 찬성 105명, 반대 16명으로 가결되었고
'특별법기초위원회'의 위원이 구성되었다.
(특별법기초위원회는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법률'을 토대로 만든 전문위원의 안을 중심으로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장개석의 전범처리, 북조선인민위원회 법안도 참고하여 8월 16일 초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
(이승만 정부는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에 대해 국회에서 이 법안의 강제매입 조항을 자유매입으로 하는 등의 수정안을 마련한 상태여서
반민법을 거부할 경우 양곡매입법안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1948년 9월 22일 반민법을 서명하고 법률 3호로 공포하였다.)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의 제주 4.3 진압 명령에 반한 군부대가 반기를 든 사건이다.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 세력으로부터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여순사건 60년에 위령탑 하나 없으니]《경향신문》(2008년 10월 21일 02:12:1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대파를 빨갱이라며 척결하기 시작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 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역 주민들이 반란하였다고 오인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김구 선생이 이승만 정부의 정치모략에 걸려들어 희생당할 뻔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가 여순사건 주체세력에 대한 여론조작을 통해 이 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화위복(?)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연구> 제7호, 2000)
백범 김구. 그는 이승만 정부와 관제 언론의 여론조작으로 여순사건의 수괴로 몰릴 뻔했다. ⓒ 출전: <백범 김구 전집>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정부는 처음에는 1948년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과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적(政敵)이었던 김구를 견제하려 했으며, 나중에는 반란의 실질적 주체가 14연대 장병들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이라고 몰아감으로써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 동참에 따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난과 진압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
반민법의 1차 개정
1948년 11월 26일 법안 제9, 12, 15, 26조 내용을 일부 개정.
반민법 제8조를 근거로 하여
각 도별 한 명의 조사위원을 선출하여 10월 23일에 10명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위원을 선출하고
실제 조사를 담당할 기구를 만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조사위원회조사기관 조직법을 추가하였다.
추가된 법에 따라 조사상 필요에 의하여 특별조사위원이 사법경찰관리(특별경찰대, 줄여서 특경대)를 설치하고
독립적으로 지휘명령할 수 있게 되었다.
반민법의 2차 개정
1949년 7월 6일 일부 개정.
1949년 7월 6일 법무부 장관에서 돌아온 이인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이 통과되어
'반민족행위처벌법’공소시효가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로 단축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김상덕 위원장 포함 특별조사위원 전원, 특별재판관 3인, 특별검찰관 3인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반민법의 3차 개정
1949년 9월 23일 일부 개정.
이 해 9월 2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법’에 대한 폐지안 및
‘반민법’ 개정안(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 담당업무가 대검찰청, 대법원으로 이관)이 제출되었으며
9월 23일 국회를 통과하여, 10월 4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모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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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학살로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공비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과거사 청산에 의해 2008년 여름 사건 진상과
가해 부대 책임자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1950년 6.25 발발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 영어: No Gun Ri Massacre):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명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保導聯盟虐殺事件):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 극우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확인된 희생자만 4934명에 달하고,
증언들에 따르면 최대 20만 명 남짓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에는 미군도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개입했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철저히 은폐했고 금기시해 보도연맹이라는 존재가 잊혀져 왔지만,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보도연맹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됐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됐던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됐다.
일제 강점기때 친일 전향 단체였던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 조직체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 · 분쇄‘, ‘
남로당,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 ·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 · 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주요 강령 내용 등을 내세워 철저히 반공주의 강령으로 삼았었다.
국민보도연맹 외견상 민간단체 성격을 띄었으나, 조직체제를 보면 총재직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효석이 맡았고,
고문으로는 신성모국방장관, 지도위원장에는 이태희 서울지검장등이 맡았다.
각종 장관들이 국민보도연맹 요직을 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민간단체라기보다는 관제 단체에 가까웠다.)
가입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해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보도연맹 대상자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공무원들의 건수올리기 실적주의때문에
거의 가입을 강요받은 경우가 많았으며, 지역별 할당제였기 때문에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제1공화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에 묶어 좌익에 대한 전향공작에 힘썼다고 하지만,
실상은 좌익뿐 아니라 '남북협상'에 참가한 중도파나 우파정당(한국독립당), 미군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침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기 후퇴 과정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 인민군에게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
그것을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주로 헌병대),경찰 또는 교도소 교도관들은 '북한군에 아직 점령되지 않고,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별처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명을 처형당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 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학살 주체는 육군특무대(CIC)와 헌병이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정도가 심각했는데,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
보도연맹 학살은 조선인민군 점령 지역에서 일어난 좌익 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6.25 전쟁 와중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이승만은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 많은 사람이 살해된 상태였다.
이렇게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어디서·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학살 당한 희생자 유족들의 분노 여론이 들끓어오르자,
대한민국 제4대 국회(제2공화국)에서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쿠테타 군부세력은 '소급법'을 만들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혁명재판'이라는 이름하에 유족들의 목소리를 묵살했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규정하여 항시 감시하고 이들 유족들을 연좌제를 적용해
오랫동안 유족들을 옥죄었다.
또 학살과 관련한 정부기록을 모두 소각해버려 진상을 철저히 은폐해버려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존재는 철저하게 금기시해버렸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공비 소탕 명목으로 719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 주민에게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하룻동안 최소한 150구 이상의 유골이 발굴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마을뒷산의 양민학살은 과연 어떤 사건일까?
우선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거창·산청·함양사건과 전혀 별개의 사건이다.
이미 알려진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은 51년 2월 8일 공비토벌에 나선 국군 제11사단(화랑부대·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에 의해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일대 12개 마을 주민 705명이
통비분자의 누명을 쓰고 집단학살당한 사건이다.
또한 거창양민학살은 산청·함양에서 학살을 자행한 이들 군인이 사흘 후인 11일 거창군 신원면에서 같은 명목으로
719명을 산골짜기에 끌고가 총살한 6·25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반민법의 폐지
1951년 2월 14일 한국 전쟁 중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을 통해 공소계속중의 사건은
법률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간주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었다.
박정희
(해방전 이력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라 삭제.. 그는 반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을 정도의 전쟁영웅이 아님.)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4·19 혁명(四一九革命):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1961년 4월 19일에는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4월 19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 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역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일협정 전후(1965 ~ 1966)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신용하 교수는 "박 정권이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독도영유권 포기, 문화재포기,
징용·정신대등의 강제저축금반환포기 등의 국익을 팔아먹었다"고 주장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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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7.14 한국전쟁 발발 후 육군 소령으로 군대 복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1950.12.12 육영수 여사와 결혼
1955. 7.14 제5사단장
1957 제7사단장
1959. 7. 1 제6관구사령관
1960. 1.21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1960.12.15 제2군 부사령관
1961. 5.16 군사혁명
1961. 7. 3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
1961. 8. 12 정권이양 시기에 관한 성명
1961.11.12 일본 방문 이케다 수상과 국교 정상화 회담
1961.11.15 미국방문,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2. 1. 13 제1차 경제 5개년 계획 실시
1962. 2. 3 울산공업지구 건설기공식
1963. 8. 30 육군대장 전역식
1963. 10.15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
1964. 6. 3 비상 계엄령 선포(한일회담 반대데모)====> (재밌는건 이때부터 북한의 도발?과 공비들?이 침투했음.)
1965. 1. 8 베트남 전쟁에 파병 결정1차, 2차 ( 반공교육 강화됨. 정부 반대 데모대는 빨갱이 취급.)
1965. 5 미국방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5. 6.22 한일 기본조약 조인
1966.2 말레이시아,태국,중화민국 공식방문
1967. 1.19 해군 56함 북괴의 포격으로 침몰
1967. 5. 3 제6대 대통령 당선
1967. 제2차 경제 5개년 계획 실시
1968. 1.21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
1968. 4. 1 예비군 창설
1968. 11.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이승복 소년 살해
1968. 국민교육헌장 제정 선포
1968. 포항 종합 제철소 건설
1968. 9. 호주 및 뉴질랜드 공식방문
1969. 8 미국방문, 닉슨대통령과 정상회담
1969. 9 대통령 3선 개헌안
1970. 새마을 운동 시작
1970. 7. 7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 8.15 8.15 선언,남북간 선의의 경쟁 제창
1971. 4.27 제7대 대통령 당선
1972. 제3차 경제 5개년 계획 실시
1972. 7. 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 10.17 유신체제 선포,비상계엄령 선포
1972. 12.23 제8대 대통령 당선
1972. 12.27 유신헌법공포,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헌법채택
1973. 6.23 남북동시 유엔가입 제창, 북한은 고려연방제 역제안
1973. 8.8 김대중 납치사건발생
1974. 1 대통령 긴급조치 발효
1974. 4.3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제 4호
1974. 8.15 육영수 여사 서거
1975. 2.12 유신체제 국민투표
1975. 5.13 대통령 긴급조치 제 9호
1975. 12.19 최규하 내각발족
1976.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1976.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 10.12 외국쌀 도입중지, 쌀의 완전자급자족 이룩
1977. 제4차 경제 5개년 계획 실시
1977.12.22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식
1978. 10.26 남침 지하땅굴 제3호 발견
1978. 12.10 국민 1인당 GNP 1,117달러 달성
1978.12.27 제9대 대통령 취임
1979. 4.25 한국,소련간 직통전화 개통
1979. 7. 1 미국 카터 대통령 방한
1979. 8.11 YH무역사건 발생
1979.10.17 부마 사태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
1979년 10월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방문,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영삼 제명사건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싱가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박정희 사망.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8시~10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가 한국 나이로 63세,만으로 61세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이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지역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 초까지는 지역에 따른 투표율이 극단적인 차이는 없었다.
다만, 1963년와 1967년, 1971년 대선으로 가면서 박정희에 대한 경상도 지역의 득표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역대 대통령 선거 당시 지역 감정 조장 발언과 사건
1963년 5대 대선
1963년 10월 9일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는 선거운동 중 영남에 접어들면서 지방색을 강조하여
찬조연설에서 노골적으로 "우리 경상도 사람 대통령으로 한번 뽑아보자"고 호소하였다.
1963년 10월 10일 김사만, 전진한은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열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선거유세에서
부산, 대구는 빨갱이가 많은 곳이라 지적하며 박정희가 그 표를 얻으려 한다고 하였고
만약 김일성이 보이면 만세 부를 사람이 많다며 낭설을 퍼트려 경찰은 이 발언을 중대시하고 그 진상에 대해 착수한 바 있다.
1971년 7대 대선
1965년 5월 13일 이효상 국회의장이 서독 방문 중 본 대학교 학생들 앞에서 "현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1966년 9월 23일 민중당 위덕용 의원은 경상도정권 발언 등으로 지방파벌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이효상 국회의장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하였다.
1969년 10월 13일 신민당의 전라남도 광주시 유세에서
당시 신민당과 3선개헌반대 범투위의 이재현, 정성태, 김대중, 윤길중, 양일동, 양희수 등은
신민당 광주유세에서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하는 정부가 박정희의 1967년 대선 공약이었던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발언이 나왔다.
1971년 대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측과 신민당의 김대중 측의 대결로 지역감정이 나타났다.
말 많은 현대 역사 중 일부... 한번 정리해 봤네요.
(명분없는 정치권력을 위한 반공체제.. 그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ㅉㅉ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문창극 같은 정부네요!!
위의 내용 중 제 개인 의견은 단 4줄 뿐입니다.
나머지는 인터넷 등 사전에 나온 내용들 입니다.
년도 별로 보니... 참..... 일관적이더군요... 권력이 말이죠.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정리하셨네요()()
귀한정보 ...노고에... 고마움을 가슴에 담습니다
북한남한방으로 스크랩 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