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룽와(왼쪽)와 함북 서포항에서 나온 빗살무늬 통형관. 기형과 아가리 모양과 문양이 비슷하다. |
뉴허량에서 확인된 다양한 옥기들. 봉황과 쌍가락지·구름형·짐승얼굴형 옥장신구와 옥기는 물론 하늘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한 무인(巫人)을 상징한 옥기가 쏟아졌다. (위로부터) |
<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 사해(査海)문화, 내몽골 흥륭와(興隆窪)문화와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발해 연안 북부의 심양(瀋陽) 신락(新樂)문화, 요동반도 남단의 광록도(廣錄島)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와 압록강 하류 후와문화가 있다. 이들 문화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출토되고 있다. 옥결은 귀고리의 일종으로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요서옥이 압록강 근처의 요동 수암옥으로 밝혀짐- 옥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함께 발해 연안의 대표적인 문화다. 이들 신석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6000년 또는 3000년께 유행했던 동북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이 시기는 시베리아나 몽고의 신석기 문화보다 훨씬 빠른 연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여명을 맞이하게 된다.>
2.홍산문명과 곰 숭배
<발해 연안에서는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적석총과 석관묘가 출현한다. 이와 같은 돌무덤(石墓)-적석총·석곽묘·석관묘·지석묘 등-은 발해 연안에서 흔히 보이는데 특히 대릉하 유역 요녕성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의 적석총과 석관묘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청동기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에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적석총,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유행하고 있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3500~3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시베리아의 가장 이른 돌무덤의 연대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빠르다.>
|
이형구 교수가 뉴허량 2지점에 조성된 석관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이교수는 이런 석관묘가 훗날 고인돌 무덤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뉴허량·선양/김문석 기자 |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단군 신화의 곰토템 신앙 -
3.하가점 하층시대의 거대 석성(샤자텐 하층문화)- 고조선 건국연대시기
<정치 국가의 실체유적발견>- 위 그림 참조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
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4.기존의 연대를 넘어서는 청동유물들
<유적에서 중요한 것은 청동 제품을 만들면서 생긴 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북경과기대 한루빈 교수는 우하량에서 발견한 청동제조 도가니, 슬래그 등을 근거로 이 시대를 홍산문화 중·말기인 BC 3000~3500년으로 보았다. 기왕의 BC 2000년설보다 1000~1500년 앞선 것으로서, 동유럽이나 이집트의 청동기과 맞먹는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릉하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다.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청동제조 공구와 청동 슬래그가 출토되기 전까지는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출토한 홍동제 장식이 발해연안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물이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에서만 보이는 붉은색을 띤 홍동으로 만든 장식 2점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초기 단계의 청동기로 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리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에서 청동 제련 덩어리 4점이 출토되었는데, C¹⁴측정 연대가 기원전 2000년쯤으로 검출되었다. 이는 대성산 유적의 홍동보다 한 단계 발전한 초기 청동기다. 청동기는 구리(Cu)를 주성분으로 주석(Sn)과 납(Pb)을 합금한 것이다.
요동반도 우가촌(牛家村) 적석총에서는 청동 화살촉, 청동 단추, 청동 고리, 청동 낚시바늘 등 소형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우가촌 유적의 C¹⁴측정연대는 BC 1500~13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동반도 남단 양두와(羊頭窪) 유적에서도 청동제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BC 15세기쯤으로 BC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한반도에서는 평북 용천군 신암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도자와 청동 단추가 대체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5.하가점 하층문화의 후계자들이 남하하여 세운 상나라
이미 상나라가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샤자뎬 하층문화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BC 1600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이다.
<1973년 다링허(大凌河) 유역 우한치 다뎬쯔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도기 가운데는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싼줘뎬·청쯔산의 거대한 석성 역시..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일찍이 홍산문화를 창조했던 발해연안 북부의 동이(東夷)가 BC 17세기께 서남쪽으로 남하하여 은을 세우고, BC 11세기께 주(周)나라에 의해 망한 뒤 일부 은나라 유민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귀환한다. 객좌현 일대의 청동기를 보면 처음에는 은나라의 전형적인 예기가 나온다. 은나라 유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점차 토착세력(동이)과 함께 새로운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다.>
6. 천하를 제패한 발해 문명의 계승자,고조선 초,중기의 상나라를 기억하
라!!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중국학계는 상나라가 중원 하나라(BC 2070~BC 1600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 때(BC 1600년)에 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랬을까.??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갑골에 새겨진 문자(갑골문자)는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
우선 도성의 규모를 보자.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상성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하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 ·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 ·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왕의영·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주왕이 분신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가 ‘소설’이 아니라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7. 상나라가 망하고 다시 돌아와 꽃피운 남산근 문화.
과거 학설은 은의 기자(箕子)가 연산 산맥 동북으로 넘어온다고 믿지 않았으나 1945년 이후에는 객좌현·조양시 같은 대릉하 유역에서 많은 양의 은말 주초 청동기가 발견되고 그중에는 은나라 기자(箕子)와 관계되는 청동기도 출토되고 있어, 1970년대 후반 필자는 이를 주목하고 중국 고대 사서에 보이는 기자와 연계해서 연구한 바 있다.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는 이 시기의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형구교수
<대릉하 유역과 요하 이서(以西) 지역에서 발견되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는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箕子)가 은이 망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자의 동주(東走) 노선과도 부합한다. 이는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주목할 만한 점이다.
<기자는 “기자(箕子·상이 망한 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상나라 귀족)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을 떠올렸다.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 아닌가. 또 하나, 싼줘뎬(삼좌점·三座店)·청쯔산(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석성 역시 고조선의 유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와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이른바 하가점 상층문화-필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한다-를 만들어낸다. 남산근문화의 내용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청동기 문화가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라고 하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돌무덤들은 어떤 집단의 상당한 신분을 가진 수장(首長) 급의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용으로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을 부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형구 교수
7.의미심장한 부여-상나라를 잇다.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이형구 교수)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 이 남산근 문화- 요서지역의 고조선 건국 초기 연대와 맞물린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의 대릉하지역의 고구려 치의 원형 거대 수십개의 석성을 만든 강력한 정치 집단이 남하하여 상나라를 세우고 하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수백년 동안 천하를 제패하다 이후 다시 동북방향의 이 요서 대릉하 지역으로 와서 새롭고 더욱 선진적인 비파형 동검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의 선진적 정치 세력이 고조선 중,후기를 지배하는 강력한 정치 집단의 중심지로 요서 지역에서 자리하며 요동과 한반도 상에 비파형 동검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 초기의 이 동북아의 가장 오래되고 발달한 문명인들이 이후 강력한 정치를 가지며 이후 서로가서 강력한 정복활동을 벌이다 이후 요서 대릉하로 돌아와 비파형 동검시대를 열며 요동과 한반도상에 본격적인 청동기 문화의 활발한 활동의 시대를 만들어 가게 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후 이들은 더 외곽의 동호세력이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으며 고조선이 동으로 후퇴하는 현상을 가지게 되는 바 고조선 후기 철기시대의 또다른 변화상과 함께 고조선의 후기 중심공간 지역과 일제 식민지 이후 만들어진 <허구의 한사군평양설>을 이해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으로 흘러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남산근 문화의 계승자이며 은나라를 이은 정치 세력이 바로
고구려와 백제를 있게한 고조선 후기 열국시대의 부여로 무게가 이동하게 된다.
첫댓글 이 남산근 문화- 요서지역의 고조선 건국 초기 연대와 맞물린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의 대릉하지역의 고구려 치의 원형 거대 수십개의 석성을 만든 강력한 정치 집단이 남하하여 상나라를 세우고 하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수백년 동안 천하를 제패하다 이후 다시 동북방향의 이 요서 대릉하 지역으로 와서 새롭고 더욱 선진적인 비파형 동검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의 선진적 정치 세력이 고조선 중,후기를 지배하는 강력한 정치 집단의 중심지로 요서 지역에서 자리하며 요동과 한반도 상에 비파형 동검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 초기의 이 동북아의 가장 오래되고 발달한 문명인들이 이후 강력한 정치를 가지며 이후 서로가서 강력한 정복활동을 벌이다 이후 요서 대릉하로 돌아와 비파형 동검시대를 열며 요동과 한반도상에 본격적인 청동기 문화의 활발한 활동의 시대를 만들어 가게 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이후 이들은 더 외곽의 동호세력이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으며 고조선이 동으로 후퇴하는 현상을 가지게 되는 바 고조선 후기 철기시대의 또다른 변화상과 함께 고조선의 후기 중심공간 지역과 일제 식민지 이후 만들어진 <허구의 한사군평양설>을 이해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으로 흘러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남산근 문화의 계승자이며 은나라를 이은 정치 세력이 바로 고구려와 백제를 있게한 고조선 후기 열국시대의 부여로 무게가 이동하게 된다.
현재 일제 이후의 고조선을 보는 사관의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단군 기록관련 기원전 23333이 수치적으로 명확하게 만들지 않는 명목상일지라도 기본적으로 천년 후대의 고조선 중,후기 시대의 미송리나 비파형만을 보고 요동 한반도로 고조선 시대와 영역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정치적 집단 즉 상나라가 실존했다는 유적이 나오듯. 고조선을 증명할 초기 시대의 유적이나 증거가 <한반도와 요동>사이에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고조선 초기 지역처럼 사람들에게 오해 ,호도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요동과 한반도는 고조선 중기 전에는 중심지가 아니라 세력권및 영향력하에 있던 공간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잊혀진 역사이군요....
우리나라역사계속왜곡된역사바로잡기
역사는 coo2.net 에서 보면 알 거에요...(구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