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삼용 요셉 신부 2017.10.09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뭣이 중헌디.mp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복음: 루카 10,25-37
뭣이 중헌디!
오늘 전에 있었던 본당 젊은 부부가 잠깐 제가 있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5살, 3살 정도 돼 보이는 두 자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 아이들인데 매우 귀여웠습니다. 큰 아이는 사내아이처럼 생겼는데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 아이가 더 착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둘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좀처럼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었다를 반복했습니다. 반면 큰 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이 부부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며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을 해야 해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년의 최고 유행어 중 하나가 영화 곡성에서 아역 배우가 했던 “뭣이 중헌디!”입니다. 영화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대사지만 이 말이 유행을 타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허냐고?”라고 아빠에게 따져 묻다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하며 나가버립니다. 아빠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딸에게 주문을 거는 나쁜 사람을 처치하기 위해 동네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경찰임에도 범법 행위도 감행합니다. 그러나 어떤 힘에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힘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자신이 불렀던 무당의 힘도 믿지 못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딸이 매우 아파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굿판을 뒤집어엎습니다. 성당까지 찾아갔지만 그것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한 여인까지도 믿지 못하여 온 가족이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헌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아이를 살리기 위해 뭣이 중헌지 모르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뭣이 중헌지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듭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주어야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묻는 듯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율법에는 우리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물어볼까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사랑하면 천국가고 미워하면 지옥간다는 이야기밖에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면 좋겠기 때문에 자꾸 중요한 것에서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오늘의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카인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습니까? 거지 라자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지 라자로는 개들에게 적어도 자신의 종기를 핥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주위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자신이 목숨바쳐 사랑해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 여기고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온 에덴동산의 동물들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은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마 막달레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동산지기로서 아담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지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골라야 하는 선택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산책하다가 작은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낚시꾼이 어떤 물고기를 잡아야하는지 잡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르고 있다면 정상일까요? 낚시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선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이웃이고 그들이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피를 쏟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무엇이 중헌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 것들을 더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뭣이 중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장 “제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첫댓글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