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려시대 송나라를 궁지로 몰아 넣는 세계사에서도 - 동북아의 도시 규모나 군사력의 수나 질은 근대 이전까지
세계사적으로 매우 크고 강한 수준을 유지해 왔으며 동아시아의 일부 세력이 서로 가서 세운 대형 제국들이 상당히
많은 예들을 볼수 있다- 매우 강력한 전사적 국가인 요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의 대전을 치르고 승리로 이끈 고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아가 여진정벌등 대외적 무력행사를 강행할수 있던 힘들 역시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 단지 깡으로
이루어낸 우연의 결과들이었을까.. 듣은 풍월에는 나름 강력한 군사력이나 국제사회에서 외교력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역
량은 실질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반인들이 실제 좀 더 체감할수 있는 고려의 전반적 힘을 느낄수 있는 고려의 도시
의 규모와 문화 수준의 역량을 통해서 이해 한다면 나아가 세계사의 다른 유명한 국가들과 비교해 본다면 고려
의 포스가 어떻한지를 조금이나마 더 가깝게 느껴 볼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수도를 통채로 강화도에 단기간에 옮기거나 몽골의 요구에 수많은 배를 단기간에 만들거나 거란과
의 전쟁에서 2, 30만명의 대군을 동원한다는 것들은 고려에 대한 기존학계의 인식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고려는 개경을 중심으로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이라는
대도시및 기타 중소 도시를 두었습니다. 서경이라 불리는 평양은 남북국시대에 폐허가 된 도시를
고려시대에 새롭게 건설했지만 그 위세나 행정체계를 개경과 동일한 위치로 놓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상당히 번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남경의 경우 그 규모가 대봉(東), 기봉(西), 면악(北), 사리(南)를 경계로 했는데
그 면적이 조선시대 한양도성보다 훨씬 큽니다. 물론 이 구역이 모두 도시화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남경의 경계는 남경이 가지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남경이라는 도시는 고려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고,
개경과 서경처럼 궁궐을 둔 곳이었습니다. 풍수지리로 인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천도를 계획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남경의 인구를 10만명 정도로 추정하는데...만약 동경도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면 개경과 평양은 이
보다 크기 때문에 고려시대
의 도시들 중에서 10만명 이상이 되는 도시는무려 4개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아래에서도 언급이
있겠지만 근대 산업 혁명 이전의 고대의 도시에서 서구나 기타 동양에서 10만 이상의 도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임을 아래에 설명으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개경은 현종 이후 사찰이 성곽 바깥으로 건설됩니다. 이러한 것으로 당시 시가지가 나성 바깥으로 확장되어 도시가 계속해서 팽창
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평양은 고려시대에 서경이었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서경의 사찰 19개 중에서8개가 성(城) 바깥에 위치했습니다. 당시에 기록된 사찰들은 군대가 주둔하거나천자가 방문했던 곳입니다. 중요한 것들만 기록된 것이죠.
서경의 성곽내 면적은 11.85㎢입니다. 당시 사찰의 분포를 추정하면 최소한 20만은 될 수 있는 도시입니다.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도 서경을 개경이 비슷하다고 기록할만큼 대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개경은 50만의 인구를 가졌습니다. 동경과 남경도 규모가 큰 도시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시가지는 위의 지도에 보이는 성곽 내부의 점으로 표시한 부분으로실제 시가지의 크기는 파리 성곽 내부에서도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파리가 저 정도 수준으로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은 13세기입니다. 당시 파리의 성곽 내부 면적은 2.4㎢...실제 시가지가 형성된 면적은 약 1.5㎢입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 통합니다.파리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 줄어들면서 중세 초기에는 시테섬에만 국한되었다가 중세 후기로 가면서 점차 확장합니다.이러한 것은 서유럽의 공통적인 현상인데, 이것이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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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인구를 50~100만 정도라고 말하지만실제 면적 12㎢에서 시가지가 형성된 지역은 7㎢ 정도입니다.
전형적인 과장이며 100만이란 매우 상투적 표현입니다 .로마도 유럽에서 매우 독보적 큰 도시이지만 로마의 100
만도 상투적인 과장에 기인합니다. 물론 남북국 시대의 전성기 신라의 서라벌의 100만도 역시 과장된 표현이나 신
라의 서라벌이 상당한 규모인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제국의 로마인구는 20~30만,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0~15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개경과 서경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보다 큽니다
중간이 네델란드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 17세기에 그려진 암스테르담의 지도입니다.1689년의 것이고, 네델란드의 급성장과 더불어 크게 성장한 모습의 암스테르담입니다.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입니다.고려 개경과 백제 사비성과 동일비율로 올립니다 |
당나라의 장안 근대 초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고대 로마 산업혁명이 있던 18세기 후반의 런던17세기 후반의 황금시대를 이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동일 비율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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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의 전성기 서라벌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서라벌입니다. 사찰의 분포도로 서라벌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데...이것은 실제로도 학계에서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고고학 발굴을 보면 삼국시대의 기와분포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찰의 분포보다 면적이 더 넓습니다. 서라벌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대도시였음을 알 수 있죠. 흔히 신라를 후진국처럼 인식하는데...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 실제 세계적인 기준에서 신라를 본다면 이미 삼국시대에도 최고수준의 문화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로마와 같은 비율입니다.
로마제국의 세번째로 큰 도시 '안티오키아' 고구려의 세번째로 큰 도시 '한성'동일비율입니다. 과거 고구려 인구의 보수적 축소된 시각으로(고구려인구 350만명정도) 매우 비정상적인 크기가 실제 고구려 도시 유적에서 기타와함께 나오고 있는 규모입니다. 즉 얼마나 기존의 인구 추론이 상당히 근거없고 비합리적인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지요.근대 이전의 고대 도시는 소비지향적 도시입니다. 즉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먹거리의 잉여물들이 도시 지배층에게 흘러 들어가서 소비되는 구조로 도시의 규모는 전체 인구의 10에서 최대 20퍼센트를 거의 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에 기인한 것입니다.즉 고대의 그나라의 여러 도시규모를 살펴보면 전체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수 있다는 뜻과도 같습니다.일제 식민지 이후 식민 보수적 시각의 역사관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쉬운 패턴이 인구를 근거없이 축소해 버리고 각인 시키는 방법입니다. 현대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모든 힘이 소,말 이외 인간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사회임으로 고대의 인구 규모는 그 나라의 노역, 군사력 세금등 대국이나 소국이냐를 쉽게 판가름 할수 있는 큰 잣대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고구려 오골성의 내부 사진과 지도입니다. 세번째 사진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지도입니다.
오골성은 고구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아테네는 당시 지중해의 대도시였으며, 면적은 2.15㎢입니다. 동일비율로 올립니다.
고구려 시대는 좀더 구체적으로 따로 내어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도시 크기 만으로 말할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로마는 서구 문명에서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의 동양사회에도 직간접적 많은 영향력과 훌륭한 건축물과 법률등 다
양한 문화 유산을 일구어온 역사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한국
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서구나 세계사적인 전반적 수준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도시크기를 이
른 시기 일구며 유지해 온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 고려의 문화 전반적 수준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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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왕, 대단하네요. 근데 가장 위에 그림에 집들이 이층짜리도 많아 보이는데 이층인가요? 킁.
이층건물 구조는 조선 초기에도 그리 특별한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등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산림 목재가 소실되면서 건물이 간소화 되어 버리는 경향으로 간 것이지요.
그것도 그것이지만 온돌이 탄생함으로서 단층으로 짓게되었죠~
구들 흔히 온돌이라는 것은 고조선 말기 요동 청천강 이북의 연화보 세죽리 고조선 철기 문명권에서 지상 주거화 되면서 구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발굴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입식과 침대 문화에서도 구들은 계속해서 있어 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좀더 보편화 대중화 되는 시대로 봐야 겠지요.
조선 이전에는 이층집이 많았다는 문서는 봤는데 이런 그림을 보니 색다르네요~
와우 좋은글 스크랩 하겠습니다
고려시대 건축물 지었음 좋겠네요.....사실 제일 화려한데.....
황룡사목탑이 22.4m라구요??? 황룡사의 높이는 거의 80미터에 육박하는걸로 아는데??;;;
초석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실제 높이는 당시의 단위 산출을 어떻게 하는냐에 따라 좀 다른데 전체 크기는 80여미터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황룡사 목탑이 있던 절터의 크기는 현재 경주에 있는 크다는 불국사의 4배 정도로 동양 최대 규모의 절에 목탑의 크기 역시 최대급으로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서라벌은 남북국의 신라 전성기 이전에도 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도시였지 당시 세계사에서는 상당한 규모와 발전적 수준에 있던 곳이 서라벌이었습니다.
저 유적/유물들이 지금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크나큰 관광자원이 될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거의 흔적만 남아있다는것 .. 많이 아쉬운 부분이네요.
멋진 글 잘 보았네요.^^
짱깨타운말고 고려시대 재현이나 해놓는것이 관광자원이 될텐데요~~ 이렇게 멋진 역사가 있는데... 여기저기서 짱깨타운이라니...
진짜..옛날문화들 많이 소실된게 정말 안타까워요.ㅠㅠ멋지네요.
바다샘님 글 올려주시느라 수고 감사합니다..잘 정리해주셨네요 잘보고 갑니다.
우리나라 사극 세트장에서 고려시대면 고려시대 세트장답게 지었음 좋겠네요.....고려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세트장은 조선중,후기때의 단층건물들 뿐이고..
저는 솔직히 저 화려한 사기 타일을 보고 놀랬습니다. 현재도 깔기 어려운 저런 자재를 당시 인테리어로 사용한 고려의 집 내부라니 ㅋㅋ 정말 화려함의 극치라고 볼수 밖에요.사택의 규모도 규모이지만 외부는 2,3층의 높은 건축 구조와 고급스럽게 문양된 청기와 외형 집에 내부는 화려한 사기 타일과 비단과 금으로 장신한 의복하며 ㅋㅋ 잘나가는 넘은 현대 상류층보다 더 화려함의 극치를 누렸던 것이 고려의 수준이 아니었나 봅니다. ㅋ 이정도면 로마 전성기 귀족들의 생활 수준에 비해 결코 굴리지 않는다는 하기사 로마등 서양은 동양의 비단과 도자기 등에 환장했으니 ㅋ 섬나라는 16세기 가서야 조선 도자기 요강 하나 보고 놀랬고
ㅋ 동양의 비단,도자기등 사치품을 수입하기 위해 대략 매년 2500만 데나리우스의 은화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불되었고 이로 인한 국부유출이 로마제국이 멸망한 요인중 한가지로 뽑는 것과 14세기 청화백자등의 동양 도자기에 중동,유럽인들이 열광한걸 보면...
2222222222222....저때가 젤~화려한 시기였던거 같네요!!!!
와아...좋은글 잘봤습니다. 음...왠지 이 게시판에선 자꾸 딴지 거는 담당인것 같은데 쩝. 조금 딴지를 걸자면 일단 개경 의 인구는 최대치와 기록을 믿고 추정하셧는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기록과 최대치를 상투적인 표현이라면서 축소 하신듯. 일단 개경의 인구가 50만이었다고 추정하는건 고려사절요 16권의 기록인 개경호수가 10만이라는 기록과 개경의 주 요 화재기록에 의거, 한리당 인구를 300명으로 추정하고 개경이 5부 35방 344리임을 감안. 344x300=약 10만,이 2가지를 감 안해 추정해서 약 50만이라 추정한걸로 압니다. 즉 개경의 인구를 추정할때는 기록을 믿고 최대치로 추정하신걸 예로 드신거죠.
앞서의 글에서 처럼 서경 바깥에 중요 사찰이 19개중 8개가 도시 바깥에 있습니다. 지금의 사찰은 변두리나 산쪽으로 있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가적 종교로서 도시의 중요한 시설물중에 하나이지요 이런것들이 나성 바깥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뜻은 도시가 팽창이 더욱 커져서 바깥쪽에서도 거주민들이 생겨 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음..뭐 솔직히 대략 화재기록은 신창관리 320호, 연정동 1000여호, 마판리 10호, 앵계리 100호, 지장방리 300호,등 솔직히 차이가 극심한데 이를 평균 300으로 내서 10만호, 라 하시는건 조금 무리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어쨋든. 근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의 인구는 각기 2~30만, 10~15만으로 상당히 낮게 잡으셧더군요.
뭐.. 두 도시가 오래되다보니 각 시대마다 인구수가 다르 기는 합니다만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최대 인구는 당시 100~120만 정도로 Notitia Dignitatum과 같은 정부 행정 문서나 타키투스등의 역사가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는거 아닙니까. 로마의 인구조사는 집집마다 가족수를 조사하는 호구조사라서 오히려 더 정확할텐데요. 각기 두 도시는 당시 성벽 밖에까지도 집성지가 펼쳐졌던걸로 압니다만. 요는 둘다 기록에 의거하여 인구를 추정하는데 왜 둘중 한가지는 상투적이라 하시고 한 가지는 기록 그대로를 적용하셧는지요. 앵거스 매디슨등이 행정문서를 토대로 추정한 로마인구는 믿을만 할텐데요.
로마와 콘스탄티노프플이 100만은 확살히 과장이지요. 그것은 서라벌이나 백제의 사비성등이나 개경과 도시크기를 비교해 보시면 이해갸 될것입니다. 내용적으로도 로마의 주요 귀족층들의 거주지는 일반 평민들보다 상당히 큰 주거지들을 사용합니다.-물론 고려에서도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서 로마 도시상의 그 당시 면적에 100만이라는 거주지는 사실 성립 불가능한 통계치입니다. 서라벌 역시도 이런 관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논문중 하나가 도시의 오폐수 처리 능력을 통해본 도시 인구추정치등도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은 관점중 하나이지요. 즉 100만이 거주하고자 하면 그에 따른 인간의 오폐수 ,똥과 오줌등을 함꼐
정화 할수 있는 능력치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수백년을 주거함에 어려움이 없을 것인데 이에 대한 다양한 돼지나 여러 시설들 관점을 통해서 고대에 백만이라는 숫자는 사실 나오기 힘든 전형적 과장입니다.로마는 군사적 측면에서도 고대 다른 적과의 싸움에도 적군에 대한 과장된 숫자 기록들을 사용해서 로마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기록한 패턴들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로마의 크기가 단순히 크지 않다거나 약하다는 표현은 아닙니다.로마의 문화는 충분히 우수하고 훌륭한 문화 유산임에는 분명하니까요.다만 근대 이전의 서구 도시의 일반적 대도시나 크다는 표현은 동북아의 도시의 일반적 규모의 크기보다는 낮은 수준들입니다.
1,당시 로마인 평민들은 5,6층 짜리 수부라에 여러 세대가 모여,혹은 세들어 살았고 대부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화재가 많았다고 하던.. 2. 당시 로마의 상수도 시설을 통해 공급되는 물의 양은 일인당 900리터로 오늘날 로마시민의 물공급량의 3배, 그 정도 인프라를 갖출정도면 100만의 인구를 충당할수있을걸로 봅니다. 3. 행거스 매디슨이 로마인구를 100만이라 추정한건 당시 세금을 걷기위한 정부행정문서와 타키투스등의 역사가 기록을 토대로한거라 믿을만 하다고 봅니다. 4. 하이켈 하임에 의하면 당시 로마 성벽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난 화재기록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
당장 개경만 하더라도 50만의 인구로 추정했을보다 더 들어갈수있는 공간이 있다고 봅니다만. 북부10방 47리, 서부 5방 81리, 중부8방 75리, 동부7방 71리, 남부 5방 71리인데 대략 81리로 제일 많은 서부의 면적이 가장 작고 북부와 남부가 가장 면적이 크죠. 이를 보면 추정이지만 더 인구가 들어갈 수 있지 않겟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개경의 인구도 50만 이상이라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만호라는데 솔직히 호란 단위가 딱히 1호=X명으로 정해져있는 단위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물론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시대 기존 우리의 고대인구 계산치는 상당히 축소 보수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근대 이후의 도시는 소비적 뿐 아니라 생산의 중심지화 되기에 탈 농촌화 도시로 몰리면서 주변 농촌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지만 고대의 도시는 지배층을 받쳐 주기 위해 주변 농촌의 인구가 더 많은 형태입니다. 도시 주위로 인구들이 당연히 존재 하지요. 제가 앞서 말한 고대의 도시라는 기본 개념은 신전이나 행정지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 (물론 상업적 부분도 포함)적 도시입니다. 그기에 도시 외곽까지도 중요 신전에 해당하는 사찰들이 건립되고 있다는 뜻은 단순히 인구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라는 규모를 크게 봐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고대에 현대의 물공급의 3배라는 수치 테이타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고 싶군요. 오폐수란 단순히 물만으로 해결될 부분이 아닌 대단히 악취적 사항입니다.도리어 동양에서 특히 우리 나라처럼 돼지를 사육하면서 식용뿐 아니라 돼지가 개개인 집마다 직접적으로 먹어 처리하는 정화형태는 상당히 효율적이고 실질적 비중도 높은 생활 패턴중에 하나였습니다.
으음...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근대 산업혁명 이전에도 도시가 생산의 거점역할도 한다고 봅니다. 14,15세기 밀라노는 갑옷과 무기 생산의 메카라 도시에 거대한 공장촌을 형성하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아테네나 코린트,테베같은 큰도시의 경우 대기업가가 운용하는 대규모 제철,목재 공장이 큰거리에 모여있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노플의 경우에도 서구 비단산업의 메카로 도시내에나 근교에 대규모 양잠소와 비단공장(공장이라 해야하나?)이 자리잡고 있었고요.
근대 산업혁명 이전에도 무역,물류의 거점에는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었고 이러한 도시의 소비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생산건물들이 올라서고 이를 다시 무역을 통해 수출,더욱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이게 되어 도시규모가 커졋습니다. 즉 근대 이전에도 도시는 생산의 거점이었고 무역과 생산,소비,행정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합해진 도시의 경우 도시 규모가 수십만에서 100만까지 되었을법하다고 봅니다.
로마의 상수도 이야기는 로마인 이야기 7권 칼리굴라 황제편에서 본것입니다. 로마인이야기에 허점이 많다지만 그런 수치적인 데이터의 경우는 틀릴 가능성이 적다고 봅니다. 그 정도 도시 인프라라면 100만의 도시인구를 지탱할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고대에 상업이나 수공업적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지요. 그러나 고대는 먹거리인 농업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기타 상업과 수공업적 부분이 이루어 지는 것이 기본 가장 큰 틀이 겠지요. 우리가 현재 정보화 시대라는 것은 기본 산업적 혁명의 산업화 과정이 기본 기반화된 시대에서 말하는 것이고 산업과 정보화도 녹색혁명이라는 먹을 거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와진 상황에서 가능한 것들입니다. 고대에도 상업이나 무역적 성행도 기본 먹거리 농업에 대한 뒤바침이 되어야 가능한 부분들이지요.특히 고대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경우는 그 먹거리를 근교에서 충당하는것을 포기하고 해외에 의존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인의 주식인 밀을 시칠리아,북아프리카,이집트 등지에서 수입하는것으로 충당하였고 이 밀의 수입이 끊기지 않다록 유지하는것이 로마 황제들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로마에서 외부에서의 밀수입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고 그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경우 황제위를 친탈할때 이집트를 점령하고 로마의 원로원에 압력을 가했지요. 이런 식으로 무역도시의 경우 외부에서 농산품을 끌어들이는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님 로마가 태어 날때 부터 제국이였고 이집트와 주변 지역을 점령 하고 있던 도시인가요??? 위의 도시로 규정된 면적을 비교 해보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축소화 된 개념으로 인구를 산출했고 로마는 상대적으로 과장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로마가 처음부터 제국이 아니었으니까 로마의 인구는 각 시대마다 다르다고 앞에서도 썻습니다. 그래서 로마시의 최대 인구가 100~120만으로 추정된다고 썻지요. 위 도시들의 면적으로 보면 대략 서경 11.85km2, 콘스탄티노플 12km2 군요. 근대 서경의 인구는 최소 20만이라 하시면서 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10~15만이라 하시는 겁니까? 시가지의 경우는 콘스탄티노플이 1000여년을 존재해온만큼 달라질수 있는거 아닙니까? 로마인구가 최대 100만이었다는건 여러 역사서에도 나오는 학회에서 인정된것으로 아는데 로마의 최대 인구 20~30만, 콘스탄티노플의 최대 인구가 10~15만이었다는 학설은 어디서 나오시는지요.
고대 로마의 물공급이 현대의 3배라는 것은 가히 과장이지요. 로마의 건축물이 뛰어난것은 사실이지만 도로나 배수를 가진 도시도 고대의 관념에서 보면 분명 발전적 형태이지만 동아시아에서도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면적에서 2,30만과 최대 50만정도와 100만의 규모는 사실 전혀 다른 형태의 문제와 면적의 차이를 낳습니다.이런 오폐수 문제 역시도 그래서 그 면적에 그런 100만도 나오기 힘든것이며 그것을 정화할수 있는 것도 100만급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됩니다. 늦은 밤이라 저도 쉬어야 겠군요. 다음에 되면 이문제에 대해 구체적 내용으로 이야기 할 시간이 있겠지요.그럼 이만
개인적으로는 고대 도시란건 서양이나 동양이나 무역도시일 경우 인구수는 수십~백수십만으로 그놈이 그놈이라 딱히 차이가 날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알렉산드리아,로마,콘스탄티노플,경주,개경,항주,에도 등등 수십만의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는 대부분 소비뿐 아니라 무역이 활발한 무역도시를 겸하고 있었고 조선의 한양같은 무역도시라기보단 소비,행정 도시에 가까운 도시는 그보다 적은 대략 20만정도 가지지 않았잖습니까. 요는 무역,생산,행정,소비 도시라면 딱히 동,서양 둘다 그닥 도시 규모의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단지, 서양의 경우는 중세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체제의 약화와 혼란기,흑사병등으로 도시인구가 대폭 줄어들기는 합니다만.. 더불어 차라리 카페내에서 역사게시판같은것좀 만들어 줬으면 좋겟군요. 세계가 본 한국과 역사글은 그닥 관계가 없다 생각되서 말입니다.
한민족 고대사를 다룰 예정인데.....후.....스케일이 너무 커서 어떻게 구현할지 까마득 ㅠㅜ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단어...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밥그릇이 크다고 해서 .. 밥을 많이먹는 나라라고 해서 대식국(大食國)이라고 불리었죠..
로마의 공공시설물의 건축술이 워낙 유명하게 알려진 사실이고 - 삼국이나 고려시대의 우리의 목조 양식의 대형 건축물도 상당한 수준이외에도- 무엇보다 삼국시대와 고려, 이른 시기에서 부터 민간인들에게 책이나 교육에 대한 풍토나 인프라는 사실 유럽및 세계사적 상황에서도 상당히 선진적인 일례로 높게 평가해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