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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저는 집에 있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냥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제일 좋았지요. 그래서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부모님께 엄청나게 꾸중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도 곧바로 늦게까지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는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시간만 되면 여행을 다녔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집중했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저의 본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 부산에 있습니다. 어제 저녁 부산에서 특강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부산까지 왔는데 부산 앞바다를 보지 않을 수 없겠다 싶어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렇다면 밤새 놀았을까요? 아닙니다. 혼자 호텔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과 월요일에는 지리산 밑의 산청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호텔에서 글을 쓰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참으로 좋습니다. 놀지도 않고 또 돌아다니지도 않고 혼자 생각하면서 방 안에 틀어 박혀 있는 모습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사실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숨어 있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들 각자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적들을 계속해서 보내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 자신이 그 숨어 있는 모습을 “없다”고 규정하면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푸념을 내뱉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 짜증이 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요나의 말 한 마디에 회개하였다는 것이 바로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요나의 말을 통해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주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회개하였고 그 결과 멸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요나보다 큰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제는 내 안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숨어 있었던 많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 매 순간 주님의 표징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더 노력할수록 운이 더 좋아진다는 걸 발견했다(토마스 제퍼슨). 어제 강의를 했던 부산 민락성당입니다. 지긋지긋할 때. 18세기 영국 최고의 화가라고 불리는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 ~ 1788)는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려운 생활고로 인해 그는 귀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내가 이런 초상화나 그려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삶이 지긋지긋해졌습니다. 초상화 대신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니 억지로 초상화만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인 것이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스스로가 그토록 지긋지긋해 했던 귀부인의 초상화라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했던 풍경화로는 세상에 자신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진절머리 내는 일이 나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포기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가장 놀라운 진실은 세상의 눈과 나의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쓰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나오는 기적이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삶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민락성당 내부입니다.. |
첫댓글 아ㅡ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