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이 있기 전에 조선의 근대화 과정의 모습
대한제국의 근대화입니다.
~행정~
1897년 관제개혁
1898년 의회 설립 (중추원 : 임명의원 25명, 민선의원 25명)
서울시청[한성부 청사]의 모습
1894년 경무청(警務廳) 창설.
근대경찰 제도 시작.
1895년 근대 소방시스템 도입.
1895년 전국민 평등법 제정.
~교통, 통신~
1898년 전차개통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기보급시작.
1899년 철도개통. (1899년 촬영)
1897년 착공, 1900년 개통된 한강철교.
1884년 근대 우편제도 실시 (우체부)
1885년 電信 개통.
통신원 직원 기념 촬영.
1885년 電信 개통......1886년 전신교환원 사진
1903년 자동차 수입시작.
~의료~
1885년 서양의학 도입
(1904년 촬영, 세브란스병원)
(1907년 촬영, 대한의원)
박에스더(1877-1910)
최초의 여의사
1903년 제네바협약 가입. 적십자 활동시작.
~군대~
1881년 군제 개편
대한제국군복
신식 무기 도입(암스트롱 포)
1894년 사관학교 설립
(1900년 촬영, 해군사관학교)
1903년 신식군함 도입
~교육~
1883년 근대교육 실시
1883년 근대교육 당시의 교과서
1885년 서양시찰 유학생
1886년 여성교육 실시
1899년 외국어 전문학교 설립
~언론~
1883년 근대 언론 시작
(신문사의 모습)
1896년 민간 신문 발간
독립신문-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
1898년 일간지 발행시작.
1898년 민중집회 시작
만민공동회
~경제~
1902년 근대 화폐제도 실시

유통된 금화
1904년 은행권
1883년 전환국 설치. 근대화폐 발행시작.
1897년 보험회사 설립, 보험업무시작.
1897년 민간 자본은행 설립 , 1898년 대한제국의 채무 해결.
(한성은행)
충남 익산 금광
(1899년 촬영)
1895년 운산광산
1906년 공업전습소 설립. 공업개혁에 박차.
1899년 상업, 경제전문 일간지 창간
~외교~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단 파견
1888년 미국 워싱턴 주재 영사관 업무시작.
(사진은 1891년)
1907년 네덜란드에 특사파견
1900년 중명전 (외교사절 접견장)
~문화 예술~
근대 창작소설 출판(혈의 누.1906년)이인직 저서
1895년 영화관 개관(표관)
근대 공연문화 시작 (1895년 협률사 공연)
국립극장 원각사 (1908년)
~종교~
1886년, 종교와 선교의 자유 획득, 1898년 명동성당
1892년 신학교 설립.
1898년 개신교 교회설립.
1890년 성공회 병원(성누가병원)설립.
샬트수녀원(1905년 촬영)
~SPORTS~
1906년 야구팀 설립.
1896년 축구팀 설립.
1900년 골프장 건설.
1894년 필드하키(또는 격구)를 즐기는 사람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병합전 20~30년 사이에 정말 급격한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었군요. 지금도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는데 저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빠르게 세상이 바뀐다는 걸 느꼈을까요?
이태준교수의 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 강의 라는 책이 있는데 그책을 읽어보시면 우리가 알고있던 고종황제와 다른 대범함과 개방적 사고의 고종황제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급발전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상황도요,
빠르게 근대화되던 조선... 그대로 두면 집어삼킬수 없다고 느끼던 일본의 초조함...
일본은 한국의 땅과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제 부국이 된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것이다.. 개같은 것들..여기에 이명박이가 합세하고 친일 파들이 이나라 이국토를 엉망으로 만드는구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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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히 발전하려는 순간 살짝 지켜보던 일본이 놀라서 바로 방해 했다죠..
잘보고 갑니다...
벌써 골프장이 있었다니... 충격적이고 놀랐어요. 정말 용서가 안되는 족적들이네요 섬나라 동물들
스크랩해요 ^^
귀한 자료 잘보고 갑니다
일본것들..또열받습니다...
근데 왜 우리나라 국사는 이런 걸 안 가르치나요? 이런 부분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보던 일본의 강제 합병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과 결과물들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가르쳐야죠. ㅠㅠ 이런 부분 너무 미약하게 진짜 조금 언급되다가 말아버리는 국사책.... ㅠㅠ
근현대사에 여러내용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이와같이 종합해서 등제된게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따로따로 나눠져 있기때문에, 대부분이 인식률이 낮은겁니다.
강철나비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저역시도 한국의 국사책에서 저런 상세한 자료는 본적이 없었드랬죠..
친일잔재의 페혜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역사학자분들이 노력해주신다면 일본이 병합해서 철도를 놔줬다는둥 산업화시켰다는둥의 개소리를 꺽어주길 바래봅니다..
우리 국사책은 일제때 조작되어진 국사책을 다시 개편한 것으로 알고있어요. 그러나 식민사관역사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발전내용이나 이런 사실들이 부족한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고조선이나 조선의 현실이 추가되어야 핥ㅌ텐데. 불쌍하게 두 조선의 내용이 가장 축소되고 은폐되어있네요..
전차개통을 보면 조선은 왜국보다 앞섰습니다. 조선은 차근차근 근대화 계획을 실현하고 있었죠.
드라마 상도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이미 순조 이전에도 조선은 송상, 경상 등 각 상단들이 시전, 난전 등으로 경제활동을 활발히 이끌며 중세봉건적 질서에 변화의 흐름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자유통량, 교역상품의 증가, 새로운 학문과 질서의 추구 등 조선이 안동김씨 등 세도가들에 병약해져 가고 있었을때도 경제력과 문화의 발전은 꾸준히 이루어갔던 겁니다. 만약 세도가를 타파하고, 1910년이 되기 전 조선을 보다 더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는 지도자, 세력이 있었으면 했던게 아쉬울 따름이죠. 바로 그 리더의 부재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던 원인들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정확한 미래 예측과 목표의식,
여러 정치 정치파벌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하루라도 빨리 하나하나씩 개혁, 변화, 완성해가는 리더쉽이 개화기에 필요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런데 그 당시 현실은 우선 내부정리를 먼저 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흥선군과 그 반대로 개화기를 좀 서둘렀던 명성황후의 세력이 정치투쟁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와중에 외세를 끌어들이기까지 하구요. 그렇게 정치판에 확실한 리더 없이 파벌들끼리 탁상공론, 정치투쟁만 하다 다시 언급하지만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무튼 송상 등 조선의 상단들은 일본의 상인들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ㅋㅋ 솔직히 위에것들....특히 일본과 강화도 조약 맺은 이후로 그 당시에 이루어진 개화 근대의 개혁은 알게모르게 일본놈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습니다....그게 그 당시 개혁조치들의 한계점이었죠. 하지만 분명 조선도 자주적으로 발전할수있는 저력이 충분한 나라라는건 틀림없는게 조선 후기때 수많은 시장이 생기고 광산개발,화폐시장 형성 그리고 양반계층 몰락과 동시에 상공업이 부흥하면서 평등의식의 싹이 트려 하고있었죠.,그 당시 정치는 세도정치에 의해 개판이었어도 경제 문화는 이미 근대로 나가기에 충분했었다고 봅니다.
한미르님, 바로 그거죠. 송상, 경상 등 조선의 상단들은 정말 상재에 있어선 뛰어난 집단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정치가 바탕입니다. 국가가 발전, 그것도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하기 위해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일되고 결집된 국론이 필요한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게 정치이고, 정치가들입니다.그런데 그 당시 조선에는 그런 정치가들이 없었나 봅니다. 그나마 흥선대원군은 우선 조선의 내부부터 수습하고, 조선이 건강해진 뒤 서양제국주의와 맞서려 했다지만 그 시기를 놓칠 수도 있었고, 명성황후는 근대화에 있어서도, 정치투쟁에 있어서도(솔직히 제 생각에 명성황후는 정치투쟁을 선호한 듯 합니다.) 지나치게
급격했습니다. 외세를 너무 많이 끌어들였어요. 흥선대원군도 덩달아 외세에 기대었구요. 아무튼 그 당시 조선에서 주목할 점은 집권층의 실학도 있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실학보다는 바로 송상 등의 상단 시스템을 포함한 민초들의 지혜로움과 영리함이 조선을 강대국으로 이끌었을 재원들이었습니다. 진짜 정치판에서 제대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비전들을 제시하며, 그 비전들을 강단있는 추진력과 박력있는 주변장악력으로 이끌 수 있는 리더들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계속 말하지만 1910년부터 1945년이라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역사
이거 잘못된거 같습니다. 법률측면에서만 보자면 한국에서 양반자제들 대상으로 근대민법 교육을 했는데 겨우 3개월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형법도 사또재판했었고 같은 시기에 일본은 프랑스 독일가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여럿있었고 근대적 형사법체제로 운용되었습니다. 범죄자도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고 삼심제도 유지되었죠. 제도적 학문적 기반이 많이 차이가 났습니다.
뭐가 잘못됐다는거죠? 근대교육의 시기가 잘못됐다는 건가요?
에이씨님 ㅡ,ㅡ 이 글을 올린 이유 모르십니까 ㅡ,ㅡ 개중에 개또라이 일빠 새끼들이 항상 그럽니다 일본과의 병합덕분에 근대화가 된거라고?님이 그런 부류가 아니시겟지만 일본하고 비교하여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ㅡ,ㅡ일본과 우리나라 근대화의 스타트 시기를 비교해야한느게 아닌지 ㅡ,ㅡ 먼저 말을 해야 앞뒤가 맞는게 아닌지요???강압이든 뭐든 개항은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더 먼저한걸로 압니다ㅡ,ㅡ제가 정확히는 생각은 안나지만 ㅡ,ㅡ 나중에 일본이 적극 받아들여서 개화를 시작한걸로 아는데 우리나라랑시기적으로 차이가 잇지 않는지 ㅡ,ㅡ책좀 다시보고 와야쓰것네 ㅡ,ㅡ;;이놈의 기억력 ㅡ,ㅡ
요즘 역사책 다시 보는데 순종(순조로 나중에 바뀜)때 안동김씨가의 폐해가 장난이니더군요..이것만 잘 이겨냈으면 일본의 침략을 이겨 냇을껍니다..
일본도 그당시 상당히 개방되어서 우리보다는 좀더 발전했었죠..군사적으로도..그때 우리 정치가 허약하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막아낼수 있는 병력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죠..정권이 썩으면 얾ㅁ마나 많으 ㄴ사람이 괴로워지는지...
아 일본...........................ㅡㅡ
전기사용도 조선이 일본보다 빨랐다고 알고있어요..-_-;;; 조선 잘되는 꼴을 보니 못견딘 것이지요
결국은 일신의 욕망에 빠진 친일파들 때문에 망했죠. 일본의 야욕이 아무리 처절해도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면 힘들죠.
의회,시청이 한옥이라.... 지금 국회의사당은 과시용으로 크게 지은거라던데... 한옥으로 만든 의회... 되게 예쁠 것 같다... 어차피 국회의원들이야 과시용이 짱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