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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h
Cantata BWV 82a
Ich habe genug "나는 만족하나이다
Johannette Zomer, Dutch soprano
Florilegium Musicum Ensemble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굳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하소서.
뱀파이어라는 소재만으로 <박쥐>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트와일라잇>이나 <렛 미 인> 등 뱀파이어 영화가 주목받았던 것이 작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개성이 강한 영화를 만드는 '박찬욱' 감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뱀파이어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틀동안 두번을 본 <박쥐>는 역시 그 예상이 들어맞는 영화였다.
'상현(송강호)'은 철저한 신부다. 모종의 실험에 자원해서 가는 이유도
사람들을 계속 저승으로 보내야 하는 무력감과 자신의 기도에 큰 힘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이유. 그래서 연구소의 박사는 '상현'에게 말한다.
자살과 순교는 심리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고. '상현' 자신은
순교의 개념을 갖고 있겠지만 타인의 눈에 '상현'의 자원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그런 과정을 겪은 '상현'은 묘한 상황에 처한다. "좋은 일"을 위해 "죽었다가"
"뱀파이어"로 "살아나고" 그의 이성은 신의 말씀을 전하나 그의 본능은
사람의 피를 마시길 원한다. 딜레마와 아이러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사이에 놓여
어느 한쪽을 무조건 선택해야 한다. 그게 최선이 아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차피 딜레마란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에 최선이란 없는 상태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찜찜하다. "당신은 날 살려도 후회, 죽여도 후회했을걸?"이라는
'태주(김옥빈)'의 말처럼. 여기에 더해, 500여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상현'을 맹신하는 신도들이 생긴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신도들에게는 성자,
나아가 신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 영화를 보면 입에서 나는 소리가 과도하게 크게 들린다.
키스하는 소리, 흡혈하는 소리, 무언가를 마시는 소리.
노신부(박인환)는 와인을 마시고 '라 여사(김해숙)'는 보드카를 마신다.
<박쥐>에서의 흡혈과 피는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수단이자 양식이다.
특히 노신부가 마시는 와인은 피와 겹쳐지고
그 신부의 피를 '상현'은 코르크 따개를 이용해 마신다.
'상현'과 '태주'의 관계는 키스로 시작된다.
"키스로 전염되는게 아니란건 확실해요.
난 태어나서 한번도 키스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입은 욕망의 배출구이자 양식의 흡입구이고 죄의 시작점이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주인공인 영화지만 사실 멜로 혹은 치정극에 가까운 영화다.
물론 <박쥐>가 남녀의 사랑이 가져오는 비참한 결말과 그 과정에 집중하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멜로ㆍ치정의 방식이 없으면 <박쥐>의 이야기 저 밑에 깔려 있는 질문들은
상당 부분 희석될 것이다. 또한 '상현'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설정 역시
지금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현'이 딜레마에 놓여 있을 때
선택하는 방식은 욕망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부가 살기 위해
의식없는 환자의 피를, 자살하는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피를 마시다니.
'태주'와의 관계가 시작될 때도 그는 선택할 수 있었다.
신부이기 때문에 관계를 가지면 안되고 더군다나 '태주'는 어릴 적 친구인
'강우(신하균)'의 아내가 아닌가. 비록 '태주'는 자신은 처녀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강우'의 아내이고 '상현'은 신부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와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태주'와 사랑에 빠진 뒤
계속해서 억눌렸던 욕망을 발산한다. '상현'이 신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욕망을 억눌러왔다면 '태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욕망을 감춰왔다.
'태주'는 '상현'처럼 딜레마에 빠지지는 않지만 그녀 역시 욕망을 분출한다.
그리고 '상현'과 '태주'는 욕망을 표출하는 그 순간부터 죄를 짓기 시작한다.
그들의 첫번째 벌은 죄의식이었다. '상현'과 '태주'는 자신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강우'를 죽이고 그 때문에 '라 여사'는 전신 마비가 된다.
그렇게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상태에서 그들은 더 가까워지기는 커녕 점점 멀어진다.
'상현'과 '태주'는 죄의식을 떨쳐내지 못해 계속 물에 젖은 '강우'의 환상을 보게 된다.
죄는 마음과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죄의식으로 인해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한 차례의 끝을 본다. 그러나 그 끝이 지나간 뒤 계속된 죄는
'상현'과 '태주'를 진정한 끝으로 몰고간다.
죄가 있으면 벌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구원의 기회도 주어진다.
'상현'과 '태주'에게 있어 첫번째 구원은 그들의 사랑이다.
지옥같은 삶을 살아온 '태주'와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서로를 향해
그동안 억눌린 욕망을 표출하면서 그들의 지옥에서 한줄기 빛을 본다.
숨막히고 미칠 것 같은 '상현'과 '태주'에게 서로는 유일한 즐거움이고 희망이다.
그 구원은 한번의 죄를 지음으로서 실패한 뒤 '태주'가 다시 뱀파이어로 태어나면서
다시 이어진다. 인간일 때와는 달리 얼굴에 생기가 도는 '태주'.
하지만 '태주'는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능동적으로 변해가며 악마가 되어간다.
결국 '상현'은 그들이 믿었던 구원이 실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토록 빠져나오고 싶어했던 지옥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하는
타락이었음을 알게 된다. 박쥐처럼 이 곳에도 저 곳에도 발 붙일 수 없게 된
그 딜레마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안 '상현'은 서서히 두번째 끝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서 택하는 죽음은 벌인가 구원인가. '상현'은 끝으로 향하기 직전
자신의 신도를 강간하려 한다. 그리고 이 때 '상현'의 성기가 드러난다.
그러나 충격을 거둬내고 보면 '상현'의 성기는 발기되어 있지 않다.
이는 뱀파이어인 자신을 성자 내지는 신으로 믿고 맹신하는 그들의 믿음을
깨뜨리는 행위이고 욕망을 추구하던 뱀파이어에서 이성을 가진 신부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죽음을 택한다,
성욕을 느낄 때마다 다리를 내리치던 것처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죽음은 순교다.
순교는 구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에서 '상현'은
살인 중에서 가장 악질은 자살이라고 했다. 자살은 죄다. 그리고 그 벌은 지옥이다.
또한 '상현'의 말에 따르면 자살은 사탄에 대한 순교다.
이럴 경우 '상현'과 '태주'가 맞이하는 죽음은 자살인가 순교인가.
구원인가 또다른 벌인가. 엠마누엘 연구소의 박사는 '상현'에게
자살과 순교를 심리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 중반 '태주'는 '상현'에게 "이건 심리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상현'과 '태주'의 죽음은 순교와 자살 사이에서 쉽게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박쥐>는 이런 그들의 끝을 통해 욕망의 억제와 표출에 따른 죄와 벌과
구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 <박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상현'은 '태주'를 죽이고
다시 자신의 피를 먹여 '태주'를 뱀파이어로 살려낸다.
두번째 볼 때는 덜했는데 처음 <박쥐>를 봤을 때 나는 이 장면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태주'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는 '상현',
'상현'의 피를 혀로 할짝여가며 마시는 '태주'.
섬뜩하면서도 슬펐다...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 살려도 후회했을걸?"
"난 이제 당신밖에 없어..."
<박쥐>는 이야기의 가장 밑바닥에 이런 질문들을 깔아놓고 그 위에
'상현'과 '태주'의 멜로와 치정이 덮여져 있는 영화다.
그리고 스릴러와 범죄, 호러의 코드를 가져오기도 하며 주인공은 뱀파이어다.
한마디로 많은 것이 얽힌 영화이고 매우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그 탓에 욕망ㆍ죄ㆍ구원ㆍ벌에 대한 질문과 그것을 관객에게 던지는 과정은
당초 예상보다 강력하지 않다. 더군다나 '박찬욱' 감독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으로 이야기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싫어할 것이다.
박쥐와는 다르게 중간 지점없이 극과 극으로 나뉠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아무래도 호(好)보다는 불호쪽이 많을 듯 싶다.
하지만 나는 <박쥐>가 재미는 없어도 그 재미를 넘어서는 흥미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But...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신부-뱀파이어, 종교-욕망,
상승-하강('상현'과 '태주'는 지옥에서 빠져나가려 하지만 결국 지옥 속으로
더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하니까),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
"지옥에서 만나요", 환자의 표현대로 박쥐에서 분리되어 들짐승과
날짐승이 되어가는 '상현'과 '태주' 등의 반대되는 것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매력은
나에게 상당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박쥐>를 보면서 한편의 초현실적인,
표현주의의 미술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태주'와 '강우'가 사는
행복한복집은 상당히 중요한 공간이다. 그곳은 일본식 집에 자리한 한복집이고
보드카와 와인이 음료이며 마작이 오락인 곳이다. 그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있는 공간은
어울리는 듯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불균질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곳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탈현실적인 곳처럼 보였다(또한 이 곳은 공간 자체가 좁아 폐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각자의 지옥에 갇혀 사는 '상현'과 '태주'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러한 느낌은 '태주'가 뱀파이어가 된 후 집을 하얗게 칠한 다음부터 더 강해졌다.
집안이 온통 하얀색이 되고 조명이 과도하게 달린 공간은 완전히 초현실적인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과장된 부분들은 표현주의의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이는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고픈 '상현'과 '태주'를 표현해 주면서
하얀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를 더욱 부각시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하긴, 영화 시작과 등장하는 그 미술부터 참 좋았다.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하얀 병실 문에 비치는.
↑ <박쥐>의 후반부에서 하얗게 칠해진 공간을 보고 있자니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실린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작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이 사진이 떠올랐다.
↑ 왠지 무성 영화 시대의
처연한 호러 분위기가 나는 포스터가 참 마음에 든다.
하지만 <박쥐>는 멜로가 메인인 영화라고 했다.
그에 걸맞게 '상현'과 '태주'의 결말은 서정적이다. 앞서 말한대로
죽음의 방식을 통해 <박쥐>가 하고자하는 질문이 드러날 수도 있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멜로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이는 상당히 서정적인 죽음이 된다.
그 신발. 그 신발은 '상현'과 '태주'의 첫 교감이었다.
본격적인 죄를 짓기 이전에 시작된 서로에 대한 의지.
'태주'의 굳은 살을 감싸주고 그녀의 지옥같은 생활을 감싸주고 싶었던 '상현'.
그 신발을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신는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사실 <박쥐>는 상당히 디테일한 영화다.
장면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허투루 넘어가질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봤을 때 다소 불친절하기 때문에
<박쥐> 역시 그런 디테일을 쉽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하나씩 천천히 뜯어내어
곰곰히 생각해보면 <박쥐>가 담아내고 있는 것에 꼭 필요한 부분들이다.
마치 마구 흩어져있는 퍼즐 조각들처럼. 문득 <괴물>이 떠올랐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장면과 대사에 의미가 있고 얘기할 거리가 있었던 <괴물>.
쉽게 느끼느냐 어렵게 느끼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박쥐>도 <괴물> 못지 않더라.
<박쥐>는 행복한복집처럼 이질적인 것이 모여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다.
기괴하고, 부자연스럽고, 흉측한 반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그로테스크함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기묘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밖에 보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
어떤 영화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박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될 확률이 높다.
첫댓글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에도 저는 이 영화가 참 오래 남았습니다. 박쥐..는 우리에게 이 쪽 저 쪽 다 오가는 기회주의로 비유되지만 여기서의 박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해도 후회는 남는, 영원히 갈증을 면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의 깊은 고뇌를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 듯한 마지막 장면, 인간이었을 때 느꼈던 처음 사랑의 상징인 상현의 신발을 안고 뱀파이어로서의 최후를 맞이하는 태주의 슬픔.... 역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일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이 리뷰는 옮긴 것입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