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의 망상]에 대한 배격 (4-1)
종교는 악인가?
지난 해 11월, 대구지방에서 위장전입한 사람들이 적발되자 “대통령에 출마한 이명박도 위장전입 했는데 왜 우리만 잡아 처벌하려느냐”고 항의했다고 해서 많이 웃었지요.
그들은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범법자지만 그들의 항변은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그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지요.
만약에 대통령이 된 이명박씨가 “우리 동네 아무개 아무개도 위장전입했는데 왜 나만 가지고 야단이냐”고 푸념한다면 뭐라 할까요?
대통령의 그런 푸념도 심정적으로 이해되는 것일까요?
동네 사람들과 달리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이 일반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심정적인 이해는 고사하고 푸념 자체가 더욱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도킨스의 망상’ 마지막 장인 ‘종교는 악인가?’에서 맥그라스는 무신론자 도킨스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를 방어 변호하려 합니다.
“도킨스가 믿지 않는 신은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신은 믿지 않는다. 사실상 나는 그런 신을 믿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종교는 악인가?’를 시작하는 맥그라스의 변론 한 문장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런 신’이란 바로 바이블 구약에 묘사된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맥그라스 자신은 ‘그런 신(God-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진실한 고백으로 인정합시다마는 그가 “그런 신을 믿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말도 믿어줘야 할지 난감합니다.
‘종교는 악인가?’의 내용들은 지금까지 내가 여러 기독교인들로부터 들어 온 기독교 옹호와 무신론 반박 논지들보다 더 새로운 것도 더 깊이 있거나 논리적인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에 대한 나의 평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과의 논쟁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되새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006년 ‘’The God Delusion'이 발행된 후 www.richarddawkins.net에 많은 유신론자들이 공격적인 글을 올렸다고 하는데 이런 반박에 대한 도킨스의 재반론을 문고판 서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한글 번역판 ‘만들어진 신’은 문고판이 발행된 이후에 번역 출판되었기에 문고판 서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킨스의 망상 제4장 종교는 악인가?’에서 무신론자들과 도킨스에 공격적인 대부분의 지적들과 물음들은 ‘만들어진 신’의 ‘문고판 서문’에서 답변되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신’을 읽지 않고 ‘도킨스의 망상’만을 읽으신 분들은 꼭 ‘만들어진 신’을 통해 맥그라스의 공박에 대한 도킨스의 직접적인 반론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어떤 종교를 가지든 신앙을 가지든 말든 (맥그라스에 의하면 종교인이라도 반드시 신앙인일 필요는 없다 합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사상의식이며 선택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삶에 그리고 이웃과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녀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진솔하게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그런 일을 도와주리라 생각하며 유신론자 특히 기독교인에게는 ‘도킨스의 망상’이 자기변론을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자기변론이 억측, 상대의 공격논리에 대한 왜곡, 진실의 오도,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으로 논리적 이성적 공격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폭력을 초래하는 종교
“나는 도킨스가 종교적 폭력을 들추어내고 도전하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며 (중략)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종교적 폭력의 해로운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도킨스와 나는 뜻을 같이한다.”
맥그라스가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그 ‘종교적 폭력의 해로운 영향력’은 맥그라스에 자신의 변론에 의하여 곧바로 감추어지거나 옹호되고 맙니다.
“나사렛의 예수는 아무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만일 세상이 좀 더 나사렛 예수를 닮았더라면 폭력은 참으로 과거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변명을 통해서 말입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바이블 그것도 4복음서라 알려진 지극히 단편적이고 한정된 정보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맥그라스도나 그 어느 신학자도 마찮가지 아닐까요?
바이블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나보다 신학자가 더 잘 안다면 그것은 정황을 모아 주관적으로 해석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럼 과연 예수를 닮지 않아서 종교적(여기서는 기독교에 의한) 폭력이 과거의 것으로 머물지 못했습니까?
‘과거의 것’이라면 예수 이전의 즉 구약시대의 설화속의 종교적 폭력을 의미하겠지요?
차라리 그것들의 대부분은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이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창세기 12:29-와 같은) 설화기 때문에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그라스의 ‘주관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훨씬 악랄한 비인도적이며 이성을 잃어버린 폭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위해 예수를 앞세워 예수 닮기를 극진히 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진행되었지 않던가요?
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 닮기를 원할수록 보다 더 잔인한 폭력을 시행했지요.
존 칼뱅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 닮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불태우면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도킨스가 지적한 것은 바로 그 예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알라 때문에 저지러진 과거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 현재진행형인 잔혹한 학살과 폭력과 억압 착취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예수를 닮았더라면 폭력은 과거의 것이 됐을 거라고요?
알라는 평화를 요구하지 않았나요?
구약은 폭력만 이야기했나요?
그곳에는 평화를 찾아볼 수 없다고 우리가 억지 씁니까?
그럼 과연 예수가 이야기하는 사랑, 알라가 주문한 평화, 구약의 예언자들이 요구한 공의가 왜 잔혹한 학살과 폭력과 착취로 탈바꿈하여 나타나게 되는가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예수의 사랑, 알라의 평화, 예언자들의 공의 자체가 학살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런 행동을 실천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맥그라스는 일반적 관계를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요구입니까?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태18:9)”와 연결됩니다.
즉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 예수가 요구한 ‘사랑’ 때문에 존 칼뱅은 “당신이 회개하지 않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기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몸을 태운다”고 했다지요?
맥그라스는 폴 포트(Pol Pot)의 학살, 소련의 ‘종교를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행한 폭력과 탄압 등의 사례를 들면서 무신론자에 의한 폭력을 거론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도 무신론을 공격하는 데 끌어넣습니다.
무신론자가 무신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유신론자들에게 학살 폭력 탄압을 자행했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맥그라스가 든 다른 예, 남미에서의 우익 정치인들과 그들의 군대에 의한 종족말살 같은 비극과 같이 폴 포트나 소비에트 정권에 의한 폭력은 ‘정치적 이유’입니다.
폭력을 행한 자이든 당한 자이든 유신론자이기 때문이라거나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정치적으로 우호적이었다면 소비에트정권이 교회를 탄압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으며 이 질문은 소비에트가 기독교의 큰 가지의 하나인 동방정교회와 그들의 성당들을 보존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이블 사본도 그곳에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들에서 유효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자행된 모든 폭력은 유신론 때문이며 같은 유신론자들끼리도 자기 종파가 아니라는 즉 신의 뜻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랄지 민족적인 이유랄지 국가적인 이유로 자행하는 폭력에도 ‘신’의 이름이 그 동기를 부여하거나 용기를 주어 부추기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며,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많은 사례를 제시하면서 어떻게 종교가 테러자들에게 목숨을 바칠 용기를 제공하는지를 증명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터져 나오는 중동의 테러가 순수한 정치적 또는 민족적 목적에 의한 자살폭탄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할 용기와 동기에 “천국(낙원)에서 영원한 축복을 얻을 것”이라는 신의 약속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지구상에서 추방될 때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맥그라스는 무신론자(정권)도 폭력을 저지르는데, 정치적 이유로도 폭력이 저질러지는데 왜 종교폭력을 물고 늘어지느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본질을 심하게 왜곡시켜 논점을 흐리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야비함을 고스라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그 어떤 이유로도 폭력과 탄압 전쟁과 학살을 반대하며 지구 미래를 위한 환경운동 같은 인류복지와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바로 그런 복지와 평화에 대한 염원이 반종교활동을 하게하는 동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맥그라스는 마치 무신론자가 종교를 증오해서 폭력문제를 내세울 뿐 정치적이거나 비종교적 세계관에 의한 폭력을 외면한다고 왜곡함으로써 “도킨스가 종교적 폭력을 들추어내고 도전하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것은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매우 편협하고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집단을 지적하는 잘못”임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200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