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 경 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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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 나올 당시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했던
박경리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시입니다. 작가의 마지막 시이지요.
작가는 소설을 쓰는 틈틈이 일기를 쓰듯 시들을 쓰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 가끔 만나던 작가의 시들이 참 담백했었다는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첫댓글 내 이다지도 불편찮은 것은 비우지 못하고 가득가득 채우고 싶은 욕심때문...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선생님, 편히 좋은 곳으로 가셨겠지요.
토지의 어머니, 어린 아이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흙으로 돌아가셨지요. 문학과 환경의 보전을 위해 힘쓰셨던...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삶을 실천하셨던... 고인dl 되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흙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겁니다.
참 아쉽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끝의 끝이라니... 더하여 사마천을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토지>라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