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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샬롬나비 대표/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
머리말
한국 보수주의 교회 내에서 박윤선 목사는 목회자의 사표요 인생의 사부요 훌륭한 신학자요 신앙가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른 이도 아닌 그의 친딸이 저서 『목사의 딸』에서 그에 대해 쓴 비판적 평가로 인하여, 교계 안에서 논란(論難)이 일어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윤선에 대한 평가는 크게 훼손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단지 “그러한 인간적인 면, 심지어는 약한 점도 가지고 계셨구나” 하면서, 그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가지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다.
그럼에도 이 논란이 단지 그분에 대한 이해에서 끝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 및 보수교회 목회자의 자기 이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는 박윤선 목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의 딸』은 한국 보수주의 목회자들의 신관과 자기 삶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1. 모든 인간은 그 시대의 아들 딸이다.
저자인 딸(박혜란 목사)은 ‘아버지’(박윤선)에 대해 “매우 단순한 분이셨기에, 사람이 상당히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며 “암기력이 뛰어나고 집중력이 있어 늘 훌륭한 학생이고 스승으로 인정받으셨지만, 성격이 급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서 가부장적으로 주의 종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손찌검까지 한 적이 많다고 하다가, 점점 강도를 높여 마침내는 “상습적으로 구타했다”고 언급한다. 친어머니는 딸이 어린 시절 별세했는데, 아버지는 재혼한 후 전처의 자녀들인 자신과 남매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어머니가 별세한 후 6개월도 안 되어 재혼한 아버지에 대하여 딸로서는 의당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를 새어머니에게 빼앗긴 딸의 그런 관점에서,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잃은 자녀들에 대한 양육 책임(심적 외로움과 상실 감정에 대한 공명)을 다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박윤선 목사도 그러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의당 가부장적 사고 속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대했을 것이다. 물론 복음을 믿었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그러한 시대적 제약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인인 것이다.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서 첩을 가졌고, 부인 사라의 자식인 이삭과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 사이의 갈등을 가정의 골칫거리로 보고 고민한, 믿음의 선구자였다. 오늘날 우리가 박윤선 시대의 윤리를 보고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 후손들이 우리의 윤리를 볼 때 미흡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러한 시대의 제약 속에 살지만, 그러한 제약을 믿음으로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박윤선 목사를 가까이 아는 후학들이나 제자들은 그분이 별세하기 전 한 주간 “자기 의”를 버리게 해 달라는 회개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그만큼 자신의 약점을 아시는 분이었고,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이 모든 허물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씻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 가족관계의 깊은 차원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이 책 독자들은 “박윤선 목사의 가족관계에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었구나”라고 느낀다. 이 책은 이러한 숨겨진 사실 보고(報告)를 넘어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아들과 딸들에게 어떠한 아버지로 비치고 있나”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2. 인간의 지식도 다 그 시대의 제약물로서 한계를 지닌다.
딸은 명문대학을 나오고 목회학을 전공하고 안수받은 목회자로서, 아버지의 대표적 ‘업적’인 신·구약 전권 주석에 대해서도 “외국어에 능통하셨지만 주석은 한글 성경으로 하셨는데, 당시 한글 성경은 히브리어·헬라어 원문을 번역한 게 아니라 몇 가지 언어로 중역된 성경이었다”며 “그래서 곳곳에 오역이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주석을 참조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주석이 “참고할 만한 것이 없고 빈곤하다”고 비판했다.
딸은 “예를 들어 성경 속 ‘충성’이라는 단어는 ‘신실함, 꾸준함, 변절하지 않음’ 등을 뜻하는데, 아버지는 ‘군신 관계’만으로 이해하셨다”며 “이는 아마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교육받으면서 유교적·군사적 가치관을 갖게 됐기 때문일 것인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런 아버지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의 관점에 의하면 박윤선 박사의 지식을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는 그의 시대에 최고 명문인 평양숭실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과 화란자유대학에 유학한 최상급의 학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목회자를 위하여 그의 주석을 썼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을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고, 성경주석학이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시기에 오역(誤譯)까지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보인다.
독일 지식사회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지식이란 역사적 시대에 제약된 지식이기 때문에, 오늘날 주석학에서는 본문 번역의 정확성이 문제시되나 그 시대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수준이 아직도 거기에까지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3. 박윤선도 그 시대의 유교적 가부장 속에서 표상된 하나님 이해과 윤리를 가졌다는 것은 당연하다.
딸이 비판하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틀이다. 아버지가 유교 문화에서 태어나서 유교의 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유교적 가치관이 그의 삶을 지배했다고 한다. 딸은 아버지가 후에 성경과 신학을 배웠지만, 그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유교적 가부장적 하나님은 정죄하시거나 벌 주시는 데 모든 힘을 쓰시는 그런 분, 주신 은혜를 되받기를 원하시는 분, 너무도 거룩하여서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던지는 도전은 한국 교회는 유교적 가부장제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고, “…대형교회들의 문제점은, 목회자가 마치 황제처럼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성경적 윤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지적은 정당하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박윤선 목사가 유교적 가부장적 신관을 가졌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인격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으나, 그런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그가 자라난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의 틀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식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체득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언어와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가부장적 신관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가부장적 신관을 비판하고 수정해야 한다.
이러한 딸의 비판적 지적에는 오늘날 세상을 섬기고 자신을 주고자 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분리되어서 자기 독선 가운데서 세상의 일방적인 존경만을 받으려 하는 한국 보수주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딸도 한국에 있을 때는 그 문화 속에 있어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는데, 오랜 전통의 미국 교회 교인들의 삶을 보면서, 또 신학을 공부하면서, 유교적 가부장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보수교회 목회자들이 이러한 신관과 윤리를 가지고 목회함으로써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교회의 목회자들은 이러한 유교적 가부장적 모습에서 탈피하여, 복음적이고 인간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딸이 모르고 있는, 그의 아버지 박윤선의 아름다운 모습들도 많이 있다. 그분을 가까이 모신 김명혁 교수가 다음 사실을 말해 주어 필자는 감명 깊게 들었었다. 1980년대 초 총신 사태 시 학생들이 자동차를 뒤엎는 상황 속에서도, 학장으로서 주동 학생을 징계하려 하기보다는 기도주간을 선포하여, 학생들이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스스로 회개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었디.
이 사례는 그분이 일방적으로 유교적이고 가부장적 신관과 윤리를 가진 분이 아니라, 복음적이고 사랑의 윤리를 가진 지도자였다는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다른 사례는 교수회를 할 때도 본인이 느끼기에 스스로 풀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점은, 김 교수에게 직접 전화로 연락하여 어려운 심경을 토로하고 의논하려 한 점이다. 이 사례도 그분의 따뜻한 인간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점이라고 김명혁 박사께서 말해주던 것이 기억이 난다.
4. 딸 박혜란 목사의 공헌: 자기 아버지의 결점을 공개할 수 있는 용기와 정직성
딸은 그의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며, 그의 신학이 남존여비·충효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영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이라고 평가한다. 딸은 “한국교회가 이렇게 큰 결함이 있는 분을 칼빈주의 대학자로 숭상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그녀의 비판은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극한 자만과 여자로서 목사 안수받은 여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싶다.
딸은 “집필하면서 부담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특히 아버지를 존경하다 못해 숭상하려는 느낌을 주는 분들도 있어 무섭기도 했다”며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집필하면서 20번 넘게 읽고 그때마다 울어야 했다는 점”이라고 피력한다. 딸은 이 책을 통하여 파묻혀야 할 일을 들추어 논란거리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표(師表)로 추앙받는 아버지의 허물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에 투영되는 한국 보수교회 목회자들 자신의 편견과 허물을 되돌아 보자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딸의 저서는 하나의 공헌을 하고 있다.
5. 보수교회와 그의 제자들은 딸의 저서를 “허구”나 “아버지 비하”로 돌려서는 안 된다.
허순길 목사를 비롯한 고신과 합신, 총신의 일부 박윤선 제자들은 이 저서에 나타난 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려고 한다. “거의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박윤선에 대해 가능한 극단적인 모든 표현을 동원하여 매장하려 한다” “책의 내용 대부분이 허구요, 이것이 주님의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혜란은 한국 교회가 자기 아버지의 신학과 생활을 바로 판단하도록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책의 핵심 내용은 그의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생활도 잘못되었다고 아버지를 비하(卑下)하며, 이제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그 이름을 잊어버리자는 요구이다” “그(딸)는 세상에서 박윤선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원한다.
사랑을 말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간 그의 아버지를 향해 살인적인 독을 뿜어내고 있다” “혜란은 새어머니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잊거나 버리지 않았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글로 옮기고 그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기다린 듯이 세상에 책으로 펴냈다… 그는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하지 않았다. 무서운 위선자이다. 글로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에는 미움의 독을 그대로 간직해 왔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허순길, “박혜란의 ‘목사의 딸’에 대한 유감” 승인 2015.03.09. 23:07:48, 코람데오닷컴).
이는 딸의 순수한 의도를 비하하는, 너무 지나친 문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딸은 이런 책을 쓰면서 20번 넘게 울면서 자신의 허물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딸에 대한 평가절하의 시도는 스승이나 사표(師表)에 대한 과잉충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변호일변도의 과잉충성 사고에 머무른다면 한국 보수교회에 아무런 발전이 없다고 보인다.
친딸이 용기있게 지적해 준 스승의 인간적 한계와 허물을 직시하고, 이것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 자신의 모습을 겸허하게 살펴야 한다. 딸은 “아버지를 힐난하기 위해 쓴 책이 결코 아니다”며 “아버지를 통해 말씀과 기도의 전통을 유산으로 받았다면, 아버지의 부족한 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인습(因習)도 인정하고 개선해야 하는 것이고, 이는 제가 딸이기에 가능한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
6. 보수교회 목회자들은 이번 출판물을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딸 박혜란 목사는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유교적 가부장적 신학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려고만 하는 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 저서를 낸 것으로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일부 보수주의 목회자들은 너무 일방적으로 박윤선을 옹호하고 아버지를 비판하는 딸의 의도를 비하하려는 태도에서 돌이켜, 냉정하게 이 저서에 투영된 오늘날 보수교회와 목회자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 저서는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오늘날 보수교회와 목회자 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거울의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된다. 오늘을 살고 있는 보수주의 목회자들이 이런 식으로 저서의 의미를 폄하해버리고 만다면 『목사의 딸』 저서의 발간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옹호 목회자들은 딸을 폄하하기 이전에, 먼저 칼 만하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 존재와 윤리가 그 시대와 환경에 제약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이러한 인간 박윤선 목사 안에 잠재적으로 투영된 보수교회와 목회자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맺음말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상의 책을 읽고 또 논란의 글을 읽고 난 뒤, 박윤선 목사에 대한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시대 한국교회의 사표요 대신학자요 지도자인 그분도 “그러한 인간적인 약점도 가지셨구나” 하는, 그분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가정사의 한 면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성경의 오역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고 다른 주석을 제대로 인용하지 아니했다고 그의 학문성이 반감되는 것도 없고, 그분이 가부장적 태도로, 전처와 자녀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조차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지, 그분에 대한 존경이 훼손되지 않았다고 본다. 인간이란 그 시대의 제약을 받는 존재요 죄인이기 때문이다.
딸이 아버지가 너무 성인으로서 우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러한 비판적 저서를 낸 것은,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를 “죄인이요 의인”이라는 개혁주의적 인물로 각인시켜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면에 있어서 딸은 교계가 존경하는 아버지를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훌륭한 여성으로서, “과연 그분의 딸이구나”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준다.
이 저서는 아버지 비판을 통해서 거기에 잠재적으로 투영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신관과 윤리를 비판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보수교회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 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저서는 보수교회 목회자들의 신관과 윤리 정립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2015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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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 박윤선 목사님의 가정적인 면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ㅡ하는 군요 목회자의 가정에서 가정 목회도 잘 해야겠군아. 하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