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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선정[五種禪] |
다섯 가지 장애[五蓋] | |
1 |
일으킨 생각(尋, vitakka) |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
2 |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
회의적 의심(vicikicchā) |
3 |
희열(喜, piīti) |
악의(vyāpāda) |
4 |
행복(樂, sukha) |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
5 |
집중(心一境, cittassekaggatā) |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
출처: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법문집 주해서, 수마나(김한상)역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것에 의해서만 수행자는 색계 초선정의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띠빳타나경(염처경)에서
인도경전은 이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대응책을 가르치고 있다. 염처경의 다양한 교정본은 이 장애에 대응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수행자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온전히 집중해서 마음속에 의정이나 다른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라고 가르친다.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내 안에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의심이 없으면 ‘의심이 내 안에 없다’고 분명히 알아차린다.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분명히 알아차리며,
의심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분명히 알아차리며,
버려진 의심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분명히 알아차린다.”
(사띠빳타나경-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이 기본적인 인식의 두가지 의도가 언급되고 있다. 현재 나타난 장애의 작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며, 그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강해짐에 따라 그것이 장래에 인식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는 것이다.
선한 사유와 악한 사유는 함께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전 순간에 일어났던 의심을 아는 때에, 의심이라는 그 부정적인 행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만 앎이라는 긍정적 행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의심의 근인이 부정사유라고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불교문헌들은 의심을 버리는 것에 기여한다고 간주되는 특별한 수행과 관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수행법들은 특히 정과 부정, 귀와 천, 선과 악등의 구별과 같은 이분법에 대해 대체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포함하며, 따라서 수행자들은 올바른 교리적 지식, 즉 지혜로 그들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다.
의심은 망상의 산물
불교경전에 대한 지속적인 공부와 암기 또한 의심을 제어하는 것을 더욱 돕는 영적능력으로 지혜가 발전하도록 한다.
불교명상에 대해 저술된 가장 초기의 체계적인 설명들 가운데 하나인 구마라지바의 ‘좌선삼매경’은 인도 주류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의 많은 고승들에게서 유래한 선정수행에 대한 가르침들을 모은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 경전은 의심을 망상의 산물로서 다섯가지 번뇌를 억제 또는 중화하는 관법인 ‘오정심관(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수식관,계분별관)’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 극복해야 하며, 이 경우에는 연기에 대한 관법인 인연관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브라흐마나 경전에서
의심을 부정한 정신적 상태로 간주하는 거의 일방적인 부정적인 취급에도 불구하고, 인도 종교 문헌들에는 이 용어가 나중에 동아시아 불교에서 얻은 보다 긍정적인 함축을 희미하게나마 상기시키는 몇 가지 암시가 있다.
예를 들면 브라흐마나와 같은 인도의 경전들은 종교적 탐구에 있어서 의심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의심이 내세의 존재 여부와 같은 종말론적 문제들에 대해서 질문하게끔 유도하는 몇몇 구절들에서 의심의 유익한 역할이 언급된다.
이런 종류의 의심들은 종교적 탐구 그리고 심지어 진정한 철학적 탐구를 촉진시킨다. 그러므로 의심은 항상 믿음이라는 정서적 기능이 아닌 지혜라는 보다 지적인 기능에 대해 직접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오근의 상호역학관계
인도불교에서 믿음(saddha)은 정진(viriya), 마음챙김(sati), 통찰지(panna), 집중(samadhi)과 함께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오근 가운데 하나로 간주 되었다.
신근은 일반적으로 의심이 아니라 진애의 직접적인 반대동인으로 간주되면서 분명하게 그 감정적 차원을 드러낸다.
믿음은 마음과 사유의 평온함을 가져오는 ‘희 (piīti)’라는 감정적 양상을 일으킨다. 나아가 그것은 또한 정진이라는 능동적 특성을 낳는 자신감을 가져온다.
염근(念根)으로 부터 양극에 위치한 믿음과 지혜는 항상 균형이 유지되어야 했다. 그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것에 의해서 믿음은 지혜가 과도해서 회의로 이끌 수 있게 되는 것을 막는 반면에, 지혜는 믿음이 지나쳐서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끄는 것을 막는 것이다.
지혜는 믿음이 지나쳐서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끄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 결과는 ‘합리적 믿음’으로 이것은 묵인보다는 탐구에 의해 더욱 촉발된다.
오근과 오력의 역할
불교의 가르침들에 대한 예비적 검토는 그 수행자가 종교적 수행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불교의 가르침들에 대한 예비적 검토는 그 수행자가 종교적 수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그 가르침들을 닦은 후에, 그가 처음 가졌던 무언의 믿음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확인 되는 것이다.
이런 배열자체가 인도불교 수행에 있어서 믿음이 차지했던 종속적 위치를 증언한다. 즉, 믿음은 수행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항상 지적인 이해에 의해서 주의깊게 균형이 맞추어져야 했던 것이다.
믿음과 의심은 그러므로 종교적 수행이라는 연속체의 일부이다. 의심은 가르침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촉발시키며, 이해를 통해서 나오는 확신으로부터 생겨나는 믿음은 다시 능동적 동력을 더욱 촉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지적탐구의 사유와 명확화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공감’ 또는 ‘지적 즐거움’이다. 그것은 또한 의심의 해결에서 기인하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간화선은 선의 내적 위기의 산물
의심은 간화선 수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간화선 수행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불교명상법으로서 선의 고전 그리고 후기 고전시기에 특히 임제종의 상징적인 수행법이 되었다.
선수행에 있어서 의심은 특별히 ‘의정(疑情)’이라고 불리며, 의심의 감정, 느낌, 또는 감각을 의미한다.
의정에서 ‘정(情)’은 선문학에서 전혀 설명되고 있징 않지만, 의정이 간화선 수행을 통해서 일어날 때, 이 정은 궁극적으로 사유, 느낌, 감정 그리고 심지어 육체까지 고루 미치는 작용을 하는 지각할 수 있는 ‘능동적인 감각’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수행법의 발전은 당대의 카리스마 있는 선사들이 입적한 후 선 전통이 퇴락하면서 발생한 송대 ‘선의 내적 위기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종종 단언 하였다. 그러나 간화선을 불교의 중국화가 가져온 여러 산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 할 수도 있다.
간화선 수행은 당대에 시작해서 송대에 그 최고조에 이른 선의 내적 역동성이 그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돈(頓)’적인 수사어휘가 교수법 그리고 마침내 수행법까지 확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은 선 역사의 초기부터 분명하게 주창되었던 ‘돈교’의 실천적 작용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상반된 주장
초기 간화선 수행법에 있어서 의심의 위치에 대한 논의들은 여전히 그것을 명상의 발전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초기 인도의 의심에 대한 개념들에 가깝게 다루었다.
예를 들면 공안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명상체계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원오극근’은 여전히 의정을 항상, 특히 공안 참구의 과정에서 부단히 애써서 ‘피해야 하는’ ‘믿음에 해가 되는’ 어떤 것으로 다룬다.
원오가 “금강검으로 의정을 절단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의심은 믿음 그리고 이해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의심에 대한 원오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그것을 오히려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주요한 힘으로 다시금 착상해 낸 것은 그의 유명한 제자인 대혜종고이다.
간화선에 대한 고봉의 기여
간화선에 대한 고봉의 기여는 혁신적인 사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선사들의 사유를 그가 명확하게 설명하고 체계화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고봉의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개념들은 중국 임제종의 선조들에게 유래한다. 그럼에두 다른 선사들은 이 주제를 고봉이 다루었던 정도의 명확성과 직관을 가지고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고봉의 설명은 선종에 대한 서구의 묘사에서 종종 선 수행에 대해 드리워져 있는 많은 부분 ‘신비의 베일’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봉의 설명이 가진 명확성은 또한 적어도 조선중기 이후부터 사원 교과과정의 핵심이었던 ‘사집’에 그 선요가 포함된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고봉의 간화선 수행에 대한 설명이 가진 가장 영향력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간화선 수행의 주요 요소를 ‘삼요’라는 용어로 체계화한 것이다.
대신근, 대분지, 그리고 대의정
고봉에 따르면 이 삼요는 대신근, 대분지, 그리고 대의정이다. 고봉의 이 분류는 이후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독자적인 선 전통에서 따르게 된다. 후기 고전 선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한 구절에서 고봉은 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만역 착실한 참선을 말한다면 결단코 세 가지 요점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요점은 ‘큰 신심’이 있어야 하니, 신심이 수미산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두 번째 요점은 ‘큰 분심’이 있어야 하니, 이 분심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바로 두 동강 내려는 마음과 같아야 한다.
세 번째 요점은 ‘큰 의심’이 있어야 하니, 이 의심은 아무도 모르는 것에서 큰 일을 저질러 은폐되었던 일들이 막 폭로 되려고 할 때와 같은 것이다.
간화선에서 믿음이란
앞에서 직관에 대한 전신으로서 인도의 믿음개념을 다루었다. 선 전통에서 믿음은 다소 다르게 여겨졌다. 중국불교 그리고 특히 선 전통의 교리적 기초는 깨달음이 모든 사람에게 내재한다는 주장인데, 이 관념은 불성이라는 용어에서 표현되고 있다.
고봉이 설명하듯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즉 이 사실에 대해 온 마음으로 믿음을 갖고, 그렇게 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는 잘못된 관념을 내버리는 것뿐이다. 믿음은 이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이었다. 그것은 깨달은 본성으로부토 끊임없이 발산되는 유익한 힘으로서 모든 의식 있는 존재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종류의 믿음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는 확신은 “마치 세계의 중심축인 수미산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수행자의 믿음이 충분하게 되면 그는 즉시 자신의 원래 마음 상태를 인정하고, 그의 본래적 깨달음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에 이르러서 믿음은 수행에 필요하지만 분명히 종속적 요소 였던 것으로부터 깨달음의 주요한 촉매로서 격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봉이 재가신자를 선 수행 가르침의 이상적인 대상으로 간주했던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간화선은 재가자를 위한 것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 의심에 대한 강조는 수행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혼동과 당혹감을 길러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세속적 삶이 종교적 수행을 위한 이상적인 수련장소가 되었는데, 세속적 삶은 간화선의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이라고 할 수 있는 좌절, 의심, 그리고 불안이 생겨나는 많은 상황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가신자가 직면하는 장애물들은 어디에나 있고 유혹적이어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막대한 ‘힘’을 발전시키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립된 승려의 힘보다 뛰어나다고 주창되었다.
이 힘은 수행자들을 뒤흔들어서 집착과 그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고, 따라서 선수행의 목표인 몸과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무집착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를 망상에 빠진 범부로부터 깨달은 성인으로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은 동아시아 선의 독특한 의심 개념이며, 이것은 이 용어에 대한 인도불교의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버트 버스웰, 간화선에 있어서 의정의 전환 고봉원묘의 증언, 불교tv 2011-11-01)
이상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녹취하여 정리하였다. 강의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적인 수행방법
첫째로 간화선은 부처님의 수행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화엄종, 천태종 등으로 대표되는 교학의 불교(주류불교)와 차별화된 선종의 독특한 수행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불성을 보면 단박에 깨친다는 ‘돈오’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도 ‘이번 생’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화엄종에서 말하는 성불하기 까지 52단계를 거치고 3아승지겁이 걸린다는 것을 깨는 가히 혁명적인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해로운 마음의 작용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간화선은 의심을 통하여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심은 해로운 마음의 작용으로서 극복의 대상이다. 그런 의심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또 의심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 것을 방해 하므로 지속적 고찰을 할 수 없다.
이렇게 의심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버려야할 것이지만, 간화선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겨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된다. 그것은 ‘참나’를 찾는 것이다.
브라흐마나 경전의 영향?
세 번째로 간화선은 브라흐마나 경전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버스웰 교수가 의심에 대하여 “브라흐마나와 같은 인도의 경전들은 종교적 탐구에 있어서 의심이 할 수 있는 역할”라고 말한 문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는 브라만과 아뜨만과 합일 되는 ‘범아일여’가 목표인데, 간화선에서 참나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심을 활용한다는 것이 브라만 경전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
네 번째로 간화선으로 찾는 참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간화선 수행을 하는 목적이 참나를 찾기 위한 여정인데 이에 대하여 혜민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깨달음에 대하여 썼다.
부모에게 몸받기 전에 내 진짜 모습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낙처(落處)
이뭐꼬에서 “이”가 바로 그거다.
그것이 바로 그 마음바탕이다.
.
.
지금 생각이 없다고
생각이 다 인줄 알았는데, 어라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도 또 뭐가(알아채는 놈) 하나 더 있다.
알아채는 놈은 생각이 아니다. 생각 전부터 있었던 ‘놈’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숨죽이고 살펴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그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
알아채는 그 놈이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나?
이 두가지 답을 찾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진짜다. 쉽게 가르쳐 준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정말 그렇다.
(혜민스님, http://blog.naver.com/monkhaemin/120148443644)
이뭐꼬 화두를 들어 “나는 무엇인가”하고 의심하는데, 그런 생각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고 한다. 알아채는 그놈은 생각 전에도 있었던 놈이라 한다. 그놈이 어떻게 생겼나, 그놈이 어디에 있나를 알게 되면 참나를 깨닫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유신견은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말한다. 따라서 간화선으로 참나를 찾는 것은 유신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Sn 2.1)에서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간화선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간화선으로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는데, 이는 초기경에서도 볼 수 있다.
라따나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0.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야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īlabbataṃ vāpi yadatthi kiñci, 시-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ābhiṭhānāni abhabbo kātuṃ 차 짜-비타-나-니 아밥보 까-뚱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와 쿳다까빠타 (Khp 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는 단계에 대한 것이다. 즉, 유신견 (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itañca), 잘못된 수행방법(Sīlabbataṃ) 이렇게 세가지를 타파 해야만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화선 수행은 이 세 가지 사항에 모두 걸린다.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실체적 견해’,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의심’, 그리고 이런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수행방법’이라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hi)는
특히 “나는 무엇인가”라고 의심하는 것은 부처님의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회의적 의심 16가지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인데, “나는 무엇인가”라고 의심하는 것은 힌두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hi)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앞서 언급된 혜민스님의 “이뭐꼬에서 ‘이’가 바로 그거다. 그것이 바로 그 마음바탕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조건에 따라
따라서 불자라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등의 16가지 의심을 하며 참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적으로’ 사유해야 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5. 이와 같이 물질의 몸의 조건을 파악한 뒤 단시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S.ii.72)."라는 방법으로 정신의 몸을 파악한다.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정신 · 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턴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
(청정도론, 제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5절)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등의 현재에 대한 의심, “나는 정말 과거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 등의 과거에 대한 의심, “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 아니면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을까?”등의 미래에 대한 의심을 회의적 의심이라 한다.
이런 삼세에 대한 의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며 참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정신 · 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다”라고 관찰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기적으로 관찰하였을 때 “나는 누구인가?”등의 삼세에 대한 모든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2012-01-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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