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원택 스님
오는 11일은 성철 스님(1912~93) 탄신 100돌이 되는 날이다. 성철 스님은 득력을 한 뒤 해방 후부터 철조망을 치고 숨어지내거나 3천배를 한 사람만 만나주며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그가 열반에 들자 해인사에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까지 수십리에 걸쳐 수십만명의 인파가 가득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과적으로 ‘성철’이란 신화화된 외적 이미지만 부각되고 진면목은 모호함 속으로 감춰지고 말았다.
그래서 ‘성철’의 실상을 찾아 경남 합천 가야산 백련암을 찾았다. 풍수지리로 보면, 아홉마리 용이 달려들고 있다는 여의주 같은 거대한 불면석(부처의 얼굴 바위) 앞에서 성철의 그림자가 반긴다. 원택(68) 스님이다. 어느 노비구니 스님이 “성철 스님 시자가 왜 이렇게 늙었어?”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그는 영원한 성철 스님의 젊은 시자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그도 우리 나이로 내년이면 70이다. 1970~80년대 불교계를 주름 잡던 성철 스님과 같은 나이에 접어들어, 보다 넉넉해진 그에게 성철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물었다.
열반송은 지옥행 고백록인가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이 열반 전에 썼다는 열반송이다. 인터넷상엔 개신교 부흥사들이 지옥에 갈 것을 고백한 ‘성철 스님의 유언’이라고 올린 글들이 수없이 돌고 있다. 이에 대해 원택 스님은 “반어적인 긍정이 선(禪)적 표현의 묘미인데, 진의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혀를 찼다. 그가 건네준 <자기를 바로 봅시다>(장경각 펴냄)라는 책을 펼쳐보니, 1986년 1월 성철 스님의 신년법어가 눈에 뜨인다.
“석가와 예수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악마 사라지고 천당·지옥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 소리 요란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희다 시비 싸움 꿈 속의 일입니다.”
1993년 성철 스님 영결식이 봉행된 해인사에 모인 인파들 사진 <한겨레> 자료
대우 받기 위해 3000배를 하게 했나
원택 스님은 “당시엔 스님이 3천배를 시키는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명백해진다”고 했다. 그는 “스님은 산중에 머물렀지만 절친한 도반들이 종정과 총무원장을 했기에, 종단 정치판과 브로커들의 장난질에 큰스님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잘 알았다”며 “권력과 돈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3천배라는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보았다. 욕망을 채우려는 아만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없애는 방식으로 취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이 자신의 상좌들은 일체 주지나 주요 소임을 맞지 못하도록 못박은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3천배’ 조건으로 대통령과 재벌 오너들도 스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해인사를 찾았지만, 성철 스님이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할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큰절로 내려오지 않아 만남이 무산됐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훗날 금융사기사건으로 구속된 ‘큰손’인 장영자·이철희씨 부부를 만나주기만 하면 그들이 한국 불교 불사를 다 책임져 줄 것이라는 일부 스님들의 권유에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3천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택 스님은 “부산지역의 최고 재벌이 노인이어서 그에겐 3천배를 하지 않아도 만나주었는데 결국 좋지 않게 끝났다”고 회고했다. 성철 스님이 그이에게 ‘죽을 때 돈을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니 지금부터 종업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고 베풀며 살아라’고 하자 ‘스님이 (회사 일에 대해) 뭘 안다고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언성을 높이더라는 것이다.
출가자에겐 무조건 3배를 하게 한 승속 차별주의자였나
성철 스님은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부터 찾아온 불자들에게 스님들을 향해 무조건 큰절 3배를 하도록 했다. 인천(人天)의 스승인 스님들에게 그만한 예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불교계엔 스님들에게 3배의 예를 취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를 두고는 봉건시대도 아닌데, 왕에게도 취하지 않는 예법이 강요되면서 불교 대중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원택 스님은 “조선 500년간 행해진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당시만 해도 스님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마을을 지나지 못하고, 숨어 다니다시피 할 정도로 스님들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의 자존감을 되살리기 위해 그런 예를 취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종정 고암 스님 같은 경우는 ‘나는 옛날식이 아니고 신식’이라고 큰절을 못하게 하고 악수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절에 가면 스님한테 3배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남편이 절에 오려하지 않는다’고 하는 보살(여성불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한다”며 “이런 예법이 불교가 자연스럽게 대중들과 접하는 데 장벽이 된다면 바람직하게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생전에 가야산을 포행(산책)하는 성철 스님
그는 일체 책을 보지 못하게 했는가
세간엔 성철 스님이 일체 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참선만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작 성철 스님은 충청도의 갑부인 김병용 거사로부터 책 수천권을 보시 받아 탐독했으며, 1960년대 말 동서양을 넘나드는 지식을 동원한 ‘백일법문’으로 불교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자기는 그렇게 책을 많이 보고 다른 사람들은 책을 못 보게 한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원택 스님은 “스님은 백련암에 출가한 상좌들에게 6개월 정도 일본어를 익히도록 한 뒤 일본어로 된 불교학개론 등 책 10권 가량을 독파해 불교의 기본 지식을 익히고 2년이 지나면 선방으로 보냈다”며 “부처님 가르침도 제대로 모른 채 선방에 가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보지 마라’는 것은 일반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 한 말이 아니라 선방 수좌(선승)들에게 내린 ‘수좌 5계’ 중 하나”라면서 “선방 수좌들은 마음을 깨치기 위해 일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두선 근본주의자였나
수좌들은 성철 스님이 화두선 이외엔 모든 수행을 사도로 여긴 것처럼 종종 말하곤 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자신을 따르는 불자들에게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곧추 세우는 장궤 자세로 ‘청정 본심’을 불러오는 주문을 하는, 아비라기도를 시켰다. 1년에 네차례씩 4박5일간 하는 아비라기도는 지금도 백련암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전해오고 있다. 백련암엔 지금도 주말이면 아비라기도와 3천배를 하러 오는 재가 수행자들로 늘 붐빈다.
원택 스님은 “아비라기도와 3천배는 수행 중에서도 몸이 가장 힘든 수행”이라면서 “스님은 이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새벽 우연히 스님 방에 들어갔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벽에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며 “스님은 새벽마다 빼놓지 않고 요가 같은 선(禪)체조와 108배를 했고, 점심 후에는 꼭 한두시간씩 산책을 했다”고 전했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의 선사상을 선양하면서도, 자신의 상좌들이나 아는 비구니 스님들이 ‘참선을 한다면서 세상에 대한 자비 구제를 폄하하는 것’에 대해 마뜩치 않아 한다. 그는 “성철 스님은 자신을 따르는 불자들에게 늘 ‘남 모르게 남을 도와주라’고 했고, 그 불자들이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 방생을 하면서 돈을 모아 남 모르게 불우이웃을 돕는 자비행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택 스님은 스승이 심어놓은 백모란을 만지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스님이 꽃을 무척 좋아해 이맘때가 되면 꽃을 심느라 분주했다는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은 성철 스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였다는 것이다. 신화 속에 감춰진 ‘인간 성철’이 봄바람을 타고 오고 있었다.
합천 가야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백련암에서 스승을 회상하는 원택스님
원택 스님은
대구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그는 1972년 성철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성철 스님은 성격이 까다롭고 무서워 쉽게 시봉하기 어려운 어른으로 꼽혔다.
그러나 대학 때 하숙방도 옮기지 않고 한곳에만 머물렀다는 그는 스승 곁을 지켰고, 상좌들을 길어야 2년이 지나면 선방으로 보내던 성철 스님도 그에겐 “선방으로 가라”는 명을 내리지 않고 곁에 두었다. 그는 백련불교문화재단과 도서출판 장경각을 설립해 성철 스님의 책을 발간하고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벌여왔다.
그는 성철 스님의 애제자이면서도 ‘화두선 근본주의’에 반기를 든 개혁 성향의 스님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란 평을 듣고 있다.
첫댓글 고이 옮겨갑니다.
누가 뭐라해도 성철 큰 스님께서는 우리들의 큰 스승이자 선지식이며 모든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는 이 시대의 참 수행자였습니다 성철 큰스님이 그립습니다 ()
권력과 돈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천배라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감동입니다..모셔갑니다.()
흐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