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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인터넷 웹사이트에 게재하도록 허락해주신 〈미주현대불교〉 잡지사에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잡지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벼르고 벼르다 김기덕 감독의 이 영화 DVD를 구입하여 보게 되었다. 2003년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되었을 때 이래로, 한국에서는 별 언급이 없어도 서양에서는 불교영화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어디서나 〈Spring, Summer, Autumn, Winter, and Spring〉을 꼽고 있어서 언젠가는 꼭 봐야겠다고 벼르던 차였다. 이번 연재를 이 영화로 정하고서야 비로소 김기덕 감독의 특색 있는 구도(求道) 영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나 최근 〈피에타〉로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불교적 세계관은 어떤 색조와 톤과 깊이를 지녔을지, 필자의 호기심이 크게 발동했다.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나는 네 계절과 한 승려의 삶을 통해 우리 인생에 내재한 환희, 분노, 슬픔, 기쁨을 그려내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과연 이 영화는 천진한 동자승이 빚어내는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는 굴곡 많은 인생사를, 신비로운 호수 위 암자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계(四季)라는 화폭에 그려내고 있다. 영화 감상자는 이를 통해 반복 순환되는 인간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나아가 자기성찰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 내내 인물들 간에 대화는 별로 없으며, 그저 잔잔하고 아름다운 배경이 주를 이루고 그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그리 특별나지도 위대하지도 않는 듯하다. 계절의 순환처럼 작품 속 인물들의 삶도 자연과 같이 순환할 뿐이다.
봄
수풀이 가득히 들어찬 고요한 산속 어느 호수에 작은 암자 하나가 떠 있는데, 그곳에 어린 동자승 하나가 스승과 함께 살고 있다. 동자승과 스님은 기도하고 참선하며 사는데, 노로 젓는 배를 이용해 산책을 하거나 약초를 캐러 뭍으로 나가기도 한다. 어느 날 바위들이 둘러 싼 계곡에서 동자승이 물고기를 잡아서는 돌멩이를 실에 메달아 물고기에 묶어 다시 물에 놓아준다. 헤엄치고자 버둥거리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며 동자승은 킬킬 웃어댄다. 곧 이어, 동자승은 뱀과 개구리한테도 똑같은 식으로 돌멩이를 메달아 놓는다. 이 모든 장난질을 쳐다보고 있던 스님은, 그날 밤 잠든 동자승의 몸에다 역시 큰 돌멩이를 묶어둔다. 아침이 되자 스님이 동자승을 꾸짖으며 이른다. “괴롭혔던 동물들에게서 돌멩이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 돌멩이를 계속 묶고 다녀야 돼. 그리고 만일 하나라도 죽었다면, 네 가슴 속에 그 돌멩이를 영원히 지고 다녀야 할께야.” 동자승이 돌멩이를 등에 매단 채 낑낑거리며 계곡으로 가서보니, 물고기는 죽어있고, 개구리는 죽지는 않았지만 안간힘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고 있으며, 뱀은 피에 흥건히 젖은 채 거의 죽어 있음을 발견한다. 동자승은 소리 내어 울고, 스님은 동자승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봄의 장면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탐욕과 그로 인해 살생을 비롯한 죄업의 씨앗을 뿌리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이 사바세계에 출현한 이래로 언제나 드러냈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무명(無明)으로 인한 어리석은 마음에 이끌려 탐욕을 부리는 데서 인간의 괴로움이 잉태된다. 이 모든 이야기와 메시지가, 화려한 꽃망울과 봄의 정취 가득한 산과 호수와 계곡의 모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전개되어 영화 감상자는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여름
동자승은 자라 이제 사춘기를 맞이했는데, 절을 찾아온 한 아주머니와 그녀의 딸과 마주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딸을 스님의 법력을 빌어 낫게 하려는 아주머니의 바람에서 암자를 방문한 모녀다. 스님은 당분간 소녀를 데리고 있으면서 돌보기로 결정한다. 며칠 지나면서 소년승은 자신이 소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림을 느끼지만,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승과 소녀는 친해지고 숲 속으로 가서 첫 성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몇 날 밤을 성행위를 계속하다 어느 날 스님은 둘이 벌거벗고 자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깨어난 소년승한테 스님이 말한다. “탐욕이 소유욕을 낳고, 소유욕은 살인으로까지 이르게 한다. 이제 소녀는 절을 떠나야 한다.” 소녀가 떠난 뒤, 소년승은 스님께 반발해 야밤을 틈타 소녀를 찾아 불상과 수탉을 챙겨 암자를 떠난다.
여름철의 자연이 드러내는 푸르른 모습처럼 동자승이 자라 소년승이 되었고, 그의 인생에도 푸르름이 더해진다. 우연한 인연으로 절에 찾아온 한 소녀를 상대로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적 사랑에 탐닉하다, 결국 암자를 떠나는 소년승이, 애욕과 그로 인한 집착을 절절히 체험하는 장면이 여름 시퀀스에서 전개된다. 동자승이었을 때 욕망의 대상이 물고기나 개구리였다면, 소년승이 되면서 욕망의 대상은 이성으로 바뀌었을 뿐, 탐욕과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한 괴로움의 순환은 반복되고 지속된다. 영화촬영 또한 여름에 맞춰 이뤄져 여름의 정취가 화면 가득한 가운데, 필자로서는 이 여름 시퀀스에서, ‘인간사라는 게 저리 바보 같은 괴로움의 윤회를 거듭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인간사의 지난함이 못내 서글펐던지 필자로서는 바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지 않고, 한참 딴전을 피우다 가을 편을 보았다. 보고 싶을 때 보고 쉬고 싶을 때는 보지 않는, 극장 영화감상이 아닌 DVD 감상의 묘미를 한껏 누려보았다.
가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떡을 싼 신문지에서 한 기사가 노스님의 시선을 끈다. 자신이 가르쳤던 과거 소년승이 아내 살해범으로 지명 수배되었다는 기사다. 마침내 성인이 되어 돌아온 옛 제자는 여전히 분노에 들끓고 있다. 딴 남자와 바람을 피운 아내를 찔러 죽인 칼을 여전히 손에 부여잡은 채. 옛 제자가 자살의 의식을 치르며 눈, 코, 입을 봉하고 도로 갖고 온 불상 앞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자, 노스님은 그에게 마구 매질을 가하고 밧줄로 그를 천장에 매달아 놓는다. 노스님은 암자의 갑판에다 고양이의 꼬리를 붓 삼아 한문으로 ‘반야심경’을 쓴다. 옛 제자는 자신의 머리를 자른 뒤 스승이 써놓은 글씨를 칼로 파내기 시작해, 다음 날 동이 틀 때야 끝내고서 쓰러져 잠든다. 전날 밤부터 옛 제자를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던 형사 두 사람은 스님을 도와 파여진 반야심경 구절에 페인트를 칠한다. 옛 제자와 형사가 떠난 뒤, 노스님은 자신의 입적을 예감하곤 배에 장작더미를 쌓더니 귀, 눈, 코, 입을 봉한 뒤 깊은 참선에 들기 직전 장작에 불을 붙여 자신의 몸을 화장시킨다. 화염이 노스님을 집어 삼킬 때 얼굴 부위를 봉했던 종이 사이로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온 옛 제자가 스승의 인도로 반야심경을 되새기며 뉘우치는 장면이다. 모든 것이 공(空)함을 깨달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반야심경을, 적어도 과거 소년승 시절에 몇 백번이고 외었을 테지만, 옛 제자는 욕망의 불길에 자신을 내던진 채 괴로움의 바다를 헤맨 뒤에야 욕망이 공허하며 괴로움의 원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너무도 늦어, 출세간법의 적용은 차치하고 당장, 세간법의 적용을 받아 적어도 수십 년은 감옥에서 죗값을 치러야 하리라. 불타오르는 단풍의 풍광 등 무르녹은 가을의 정취 속에 지극한 괴로움을 겪는 인간의 모습이 저 단풍잎만큼이나 핏빛 낭자하게 전개된다.
겨울
옛 동자승이 성년이 되어 들어간 감옥에서 출옥해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 암자에서 중년의 장년승으로 생활한다. (장년승 역을 이 영화를 감독한 김기덕 씨가 맡고 있음은 이채롭다.) 장년승은 스승의 옷을 수습하고, 얼음을 깨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 뒤 그것을 넣은 얼음불상을 폭포 아래다 놓아둔다. 암자를 비롯한 수도 도량이라 할 만한 가능한 범위 내의 공간을 나름대로 가장 성스럽게 장엄(莊嚴)하는 모습이다. 또한 장년승은 선무도(禪武道)의 동작을 기록해놓은 책을 토대로 무도 수련을 한다. 신체의 장엄이라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암자를 들렀는데, 아이를 놓아두고 야반도주하다, 장년승이 물을 얻으려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다음날 스님이 시체를 발견하곤 수건을 벗겨 얼굴을 보는데, 영화 감상자는 볼 수가 없고 대신 그 자리에 스님이 부처의 두상을 놓아둔다. “아들을 놓아두고 도망가는 여인 또한 부처”라는 대승불교적 메시지를 영상을 통해 충격적으로 전하는 듯싶다. 스님은 자신이 그간 저질렀던 죄에 대한 세간법적 속죄는 끝났다 해도 근본적 죄의 정화를 위해 등에 멧돌을 하나 달고 암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미륵반가사유상인 듯한 불상을 안고 힘겹게 올라간다. 스님은 얼어붙은 호수 위 암자가 잘 보이는 봉우리 한쪽 켠에 불상을 놓아둔다. 겨울의 호수와 겨울 산의 계곡과 폭포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신비로운 정경 속에 참회와 수행의 대정진이 펼쳐진다. 동자승 시절의 물고기, 개구리, 뱀을 괴롭히고 아내를 죽였던 자신의 업보에 대한 정확한 인과법적 결산이 눈부신 설백의 천지에서 비장하게 전개된다.
겨울에 펼쳐지는 장년승의 고행과 출세간적 참회의 행위 속에 민요가수 김영임 명인의 〈정선아리랑〉이 감동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 사용된 전체 음악을 생각해보면, 〈정선아리랑〉이 돋보이는 만큼이나 다른 음악과의 부조화가 두드러진다는 판단이다. 수백 년 혹은 천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정련되고 완성되어 예술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통음악과, 아직은 미흡한 창작음악의 부조화를 이 영화에 담긴 음악에서도 접하게 됨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전통음악에 토대한 창작음악의 빈곤이라는 한국음악계 전반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므로, 한국 창작음악의 발전적 전개 속에 점차 해소될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봄
마침내 ‘봄’으로 돌아와 계절의 순환이 완성된다. 노년의 스님이 버려진 아이를 자신의 제자로 삼아 암자에서 함께 산다. 소년은 노스님이 이전 동자승이었을 때처럼 거북이를 못살게 굴고, 물고기, 개구리, 뱀의 입 속에다 돌멩이를 집어넣는 식으로 동물들을 괴롭히며 죄업을 쌓기 시작한다. 동물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천진하게 “하하하” 좋다고 크게 웃으면서!
깊은 산속 호수에 떠있는 암자와 그곳에 등장하는 소수의 사람은 사바세계와 그 속의 인간을 상징한다. 4계절의 변화는 세계와 인간의 변화를 나타내고, 그 변화의 동력은 업보(業報)와 수행이다. 영화감상자는 이 영화를 통해, 죄업보다는 선업(善業)을, 나아가 도업(道業)을 닦아 윤회와 죄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성불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지극히 아름다운 자연풍광, 다양한 상징적 장치를 통해 훌륭하게 불교의 사상을 드러내주고 있다. 성인불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예술적 체험 속에서 불교사상을 새롭게 반추할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또한 15세 이상의 청소년들에게 불교 입문 영화로서 ‘강추’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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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통한 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그간 필자는 이 원고를 다음카페에 연재해 왔는데 계속해서 이 연재물을 읽고 싶으신 분은, ‘미주현대불교,’ ‘대원불교대학,’ ‘International Dharma Instructor,’ ‘나무아미타불,’ ‘달마가 영어를 만났을 때,’ ‘금강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연지해회,’ ‘아미타불과 함께 하는 마음의 고향 무주선원’과 같은 ‘daum’ 카페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naver’ 카페의 ‘금강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에서도 이 연재물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매달 10일쯤에 주로 ‘자유게시판’에다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그간 필자에게 영화이야기를 쓸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도록 발심하게 해주신 〈미주현대불교〉 잡지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도림행님,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