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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_경주법회 인각 큰스님 법문
지구의 멸망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만 겁을 사는 것 아니지요
이 겁의 단어는 이 세상 어디엔가 다 적용이 되는 겁니다.
지구의 겁은 제일 높은 것입니다.
하늘의 천녀가 백년에 한번씩 하강해서 사방 16km나 되는 바위를 치마로 갈아 없에는게 한겁이다.
지구가 다시 성주괴멸이라는 또 그 단계를 밟아갈 뿐이다.
지구의 한 단계의 겁을 변천해 가는 과정 일 뿐이다.
그것을 성주괴멸이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불변입니다.
이 지구 바다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비밀들이 수없이 묻혀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해 우주를 정복한다고 하지만 종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로케트를 개발하는 그 나라속에 우리는 생각도 못하는 자만속에 빠져서 또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하는 것이 바로 지식자들이 하는 것이다.
식자들이 그것을 추종하고 가르치고 유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우리는 그들의 농락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자중을 하셔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생각을 하지마라 바보천치가 되어라 여러분들이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나의 상식과 지식과 알음알이의 그 기준이 나를 고통 속으로 괴로움속으로 원망속으로 슬픔속으로 빠트리는 근본이다.
이것을 우리는 즐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즐기는 것입니다.
즐기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 자리를 계속해서 찾아가고있는게 여러분들입니다.
원효대사가 일체유심조라고 했지요?
그 일체유심조란 것은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장난에 내가 놀아나고 있다.
내가 일으키는 내 생각하나가 고통 속으로도 빠트리고 지옥 속으로도 빠트리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고통이 없는 겁니다.
그 활활타는 불꽃이 아름다운 꽃으로 보일 때 그 불 속으로 뛰어든다면 꽃이 나를 감싸줄 뿐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 생각의 무서움은 나를 기만하고 남을 원망하고 남을 미움의 대상인 원결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내 하나만 남을 미워하면 끝이 날 것같지요?
그 대상이 없다면 우리는 따라다닐 일이 없습니다.
죽은 영혼이 그 상대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일이 없습니다.
내가 몸뚱아리를 가지고있을 때에는 내 육신이 묶여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집착이 끊어지면 내 망념의 생각이 끊어지면 내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자유로운데 내 집착이 묶어 놔버렸기 때문에
내 집착이 끊어지지 않으니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내 자신을 이원화를 시켜서 집속에 들락 날락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겠지요?
몸이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수이겠지요?
운전수가 운전하고 목적지 도착하면 그 자동차는 놓아두고 운전수는 내리지요?
여러분들도 똑 같아요
내 집착이 끊어지면 그 동아줄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얽어 매어둔 그 악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니 몸뚱아리 거기 세워 하고 나 혼자 나와서 유유히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운전수가 필요하면 또 자동차를 타고 새로운 목적지로 행하여 가듯이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같이 거기를 갈려하지 않고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내 지식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내 몸뚱아리에 묶여서 떠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일체유심조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을것인가
아니면 그 통을 따라 그것을 즐기고 살것인가?
그 고통을 즐기면 육도윤회로 노예가 되어서 끌려다녀야 된다고
지옥이 지옥인줄모르고 불구덩이가 꽃으로 보여서 내가 그것을 취하러 즐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고 자유로워라!
그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한번 자유로우면 영원히 자유로운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마음껏 누리다가 갈것이요
내가 어느 한곳에 집착하고 그 집착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팔만사천지옥도 내 한 생각이 만들어간다.
그게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아주 명확하고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을 잘 해준 것이 원효대사의 그 말 한마디입니다.
어떻게 하면 집착이 끊어 질 것인가?
그것도 여러분들에게 답을 주었습니다.
바보가 되어라
내 감정이 없는 바보가 되어라고 수없이 가르쳤는데 바보가 안될려고 지옥에 내발로 자처해서 들어갈려고 기를 쓰고 아는 알음알이로 내 기준의 알음알이로 다시 거론할 때 내 집착이란 놈은 기성을 부리면 그 미움이 움터고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이 여러분에게 욕을 하던 무엇을 하던 안들었거던 욕하는 니 입만 아플 것이고 업으로 받아 고통 받을 것이다.
그 지옥 속에 울고있는 너를 하늘위에서 쳐다보고 불쌍하다는 그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그 대상을 못 끊어서 또 울분이 기올라오지요?언제까지 그 길을 되풀이 할 것입니까?
욕을 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미워해라 원망해라
나는 미워 하지 않고 원망 하지 않고 나는 무심으로 바라볼 수 있거던
이게 답인 것입니다.
그것을 무심으로 바라보지 못하니 평지풍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구의 멸망이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요
식자가 자기의 희노애락을 만끽하기위해서 만들어가는 그 유기물이 가져오는 이용하는 여러분들의 그 마음이 동조자가 된 것이지요?
그것을 동조자라고 하기도 하고 반려자라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앞당기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지구가 백년 이전에는 사회주의도 없었고 공산주의도 없었고 그냥 평범하게 자기 나라만 챙기고 살아갔습니다.
급속도로 망쳐가는 것이 21세기 들어서입니다.
백년이내 이 지구를 급속도로 망쳐 나가고 있습니다
올림픽이 생겨난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1894년 근대올림픽이 새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광범위한 세상에 방귀를 뀌면 미국에서 듣게끔 만드는 天耳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수 만리가되는데 여기서 뀌는 방구를 거기서 다들리게 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그 현실 세계에 여러분들은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부족한 게 그렇게 많습니다.
전부를 다 갖추어서 살면서도 무엇이 불만이 그렇게 많습니다.
남들은 고통스럽게 육신이 불구가 되어 제대로 걸음도 못 걷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지옥 속에 빠져있는 중생이 한 두사람입니까?
육신을 서도 내 마음이 병들어 있으면 똑같은 환자 일 뿐입니다.
마음이 병 들었다는 게 어떤 것입니까?
<보현화>
내가 정견으로 옳게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 기준을 버리지 못할 때 바로 마음의 환자 인 것입니다.
육신이 멀정하고 재물을 다가지고 명예까지 다 가진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어서 가도 거기에 나올 수가 없어요
그것처럼 도둑이 치성하고 그 고통을 즐긴 자만이 또 이 지구를 망친자만이 누리는 특혜라고 봅니다.
아 그놈 참 잘 죽었구나
저놈이 망쳐 놓고 간 이지구의 악마 하나가 죽어갔구나
여러분들은 최고의 문학가가 어떻고 최고의 박사가 누구고 지구를 정복한자가 누구이고 그 책도 세을 수 없을 정도이지요?
그 속에서 여러분들은 무슨 답을 찾을려고 뒤적거려 왔습니까?그것을 버리라고 했는데 아직도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깨달음에 가는 길에는 문자가 필요 없고 말이 필요 없다.
깨닫고 나서 그 문자를 이용할 뿐이다 그랬다.
깨닫는데는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그 몸 뚱아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으면 구더기 몸으로 가장 먼저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전생을 내생을 다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다음 내생은 여러분들의 몫이에요
그 구더기 하나로 가르쳐 주었으면 그 몸을 피하면 될 것인데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많이 누리세요
희노애락을 많이 누리세요
이지구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만 그런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적이 제일 먼저 달라던다고 했지요?
어느 중생은 소금쟁이라고 한다고 스님에게 시비를 걸었거던요
소금쟁이는 구더기의 몸을 탈피하고 탈피하고 해서 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착을 끊어 내지 않으면 절대 구더기의 몸을 벗어날 수 가 없습니다.
스님은 한지옥의 자리를 비워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일체유심조안에는 이 우주의 모든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 속에는 삼라만상이 다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한 바보가 되어있어야 그 지옥을 부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아리가 아프면 아이고 예 감사합니다.
가르쳐주셔서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안되지요?
그게 내 기준이 부숴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이 없어지면 바로 예 감사합니다가 나올 것입니다.
바보가 안 될려고하는 그 도둑놈이 치성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나오지 않고 내 감정이 고통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경애보살이
여기 앉은 모든사람에게 되풀이하고 있다.
스님이 전생의 누진은 여러분들이 이 스님을 만나기전까지 겪어온 그 삶은 거의 내 인생관이었지요?
그 인생관의 발자취가 바로 누진업이 되어서 누워있다.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내 마음이 희노애락에 빠져서 어느 한 곳에 멈추어있을 때 그 누진 업은 내 몸을 치로 들어온다.
그러면 지금우리 경애가 바로 누진업이 발작한 자리이다.
수행을 잘했을 때는 그 누진 업은 활동을 못하고 누워있다.
철저히 단속 할 떄에는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 편안함에도 빠지지 마라
그런데 경애가 그것을 놓치는 순간 그 몸에서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예 감사합니다.
내 이 전생숙업을 지금이 몸으로 녹이지 않는다면 언제 녹이겠습니다.
참회를 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누진업 하나가 나와의 악연의 고리를 끊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미워하는 대상을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또 새롭게 만나는 인연에게 그러한 악업을 만들어놓지는 말아야 할 것인데 그게 수행하는 수행자 일뿐이데
여러분들은 그래도요?
이유가 올라붙지요?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니는 죄를 지어라 나는 동조하지 않고 편안하게 갈것이거든?
원망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무시하면 상대도 한 지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해놓은 84000대장경을
나의 알음알이를 고정관념이 깨어지지 않는 한 그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바보천치가 되어서 어는 지옥에서 어느 환영이 나를 유혹하더라도 그기에 동조 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유로운 자가 된다.
가고 오는데 걸림이 없고 어떤 몸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다.
내가 원해서 내가 저 몸을 받아서 저 세계로 들어가봐야 겠구나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내왕을 한다면 그게 극락입니다.
팔만사천세계를 자유롭게 내가 주인이 되어서 다닐 때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아직도 그 대상에 원결을 가지고 상대를 미워하고 있거나 상대에게 내 억하감정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다시 하나하나 참회해나가세요
부산법회때에 대륜심이 한 법문으로
대륜심은 어머니에게 참회를 했어요?
아니요
어머니는 딸에게 참회를 했어요?
아니요
두 분다 안했습니다.
미워해서 얻어지는 게 있고 원망해서 얻어지는 게 있다면 악업이겠지요?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사소한 문제 사적인 감정에서 다음 생에 또 만나고 인과를 심어간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설명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자기가 대상에게 남이 있는 감정이 있다면 하나하나 풀어가세요
그 매듭의 고리를 풀어야만 부딪힘이 없어집니다.
과거에 어머니의 어떠한 행동이 이렇게 가슴에 멍이들었고
어머니 역시 우리 따님의 어떠한 모습이 가슴에 멍이 되어서 매초리로 다스렸노라 이게 참회하고 거두어 들일 때 만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는 대륜심 경우는 어머니와 만나는 시점이 거꾸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륜이가 엄마가 되고 어머니가 자식이 되어서 그 앙갚음을 또 시작하겠지요?
이게 원결의 끄나풀인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순연으로 서로가 감싸 안을 수 있는 인연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숙세에서 다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지 못 한다면 수행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숙업을 짊어지고 한발자국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바로 부딪혀 오는 것은 바로 해결하라고 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미움이 없어집니다.
따님이 엄마가 서로가 바라는 마음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이 해소가 되지않고 풀려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대륜심은 저녁에 가면 어머니와 마주앉아서 참회하고 그 원결을 끊어세요.
이런 부분이 대륜심 혼자이겠어요?여러분들도 모두 똑같습니다.
내 생각이라는 것은 거미줄보다 무섭습니다.
우리생각의 끈이 거미줄과 같이 탄력성이 유연합니다.
끊었다가 올라붙고 끊었다가 올라 붙는 그게 미움의 감정입니다.
<미국의 과학자가 거미줄로 강철같은 줄을 개발했다고...>
그것을 만드는 그자는 또 한 부분을 망쳐가는 것입니다.
식자가없으면 미움의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를 제일먼저 사형장에 보내야 합니다.
이 지구를 멸망시켜나가는 앞잡이가 박사이므로 그 박사가 사거리 사형되어버리면 우리의 알음알이의 치성함을 부채질하는 유혹하는 그 무리들이 없어지면 평범 해진다는 것입니다.
보편화가 되고 평범하다면 더 이상 지구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추구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지요?
좋은 것을 추구하지 않을 때 나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쁨이 커지고 높아지며 악업의 비중도 더 커지겠지요?
미개지역 못사는 나라가
부처님의 법으로 보면 최고로 행복한나라입니다.
천하의 행복한나라를 마구니가 들어가서 망치는 과정을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못느끼니 여러분의 감정이 얼마나 무디어졌습니까?
벌써 물이 다 들어버린 것입니다.
참 훌륭하다 잘 한다 복짓는 사람으로 보였지요?
그게 자칭 데레사 이잖아요?
극락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면서 지옥은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자리가 지옥이라
알량한 도둑놈이 자기 합리화를 시켜서 모든 교만과 기만을 다하고 여러분들의 눈을 속이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미개지역이라면 최고의 극락 이구나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는데 그 사람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여러분들의 눈이 썩어 자빠진 것입니다.
아직도 내 자식 내 손자 잘되게
아직도 그러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매달린다면 여러분들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요
<스님
50년 전으로 돌아가라면 못 살겁니다
빨래비누 하나 없이 재물로 만들어서... >
그것도 무명이 길쌈으로 만들어서 옷으로 만들어 입지 않았다면 그 고통이 없었을 겁니다.
자연이 준 그 피부로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인데 알몸으로 다녔다면 하나도 부끄러운 것이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가리고 가리고 하니 지금은 살만 보이면 욕을 하지요?
똑같은 몸 뚱아리이고 살덩어리인데 여러분들이 그것을 분별해서 가리고 갖추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눈물 보았지 않아요?
성기 다 내어 놓고 장난치고 해도 흉이 안되는데 그것을 흉으로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이 썩어 자빠진 것이에요.
그놈이 극락하나를 파괴시킨 기본입니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무한정으로 있었고 노력하지 않아도 시기질투가 없었고 미워하는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원결이 없는 그 세계에 욕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지식자입니다.
그 원주민은 먹을 것도 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여러분들의 눈으로 바라보며 옳다고 봅니까?
집을 원하지도 않았고 나가기만 하면 강에도 먹을 것이 많았고 가축도 많았는데 그것을 몰살시킨 것이 여러분입니다.
비축이라는 욕심을 갖는 순간 한 극락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여러분들이다.
거기에는 울일도 없고 미움도 없고 원망도 없고 병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맨발로 산천을 뛰어다녀도 그 사람들은 아픔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자유를 다누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 지식자들이 그 세계를 망쳐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잖아요?
그게 망치는 것이 아니고 개발이라고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그 PD가 그것을 찍으로 가서 그 망치를 과정을 체험하고도 못느끼는 게 중생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아마존의 눈물을 보았겠어요?
전 세계의 중생이 그것을 즐기면서 사는거에요
남극이라는 그 세계도 북극이라는 그 세계도 그 문명인이 들어가서 망쳐가는 그 과정 이게 종말인 것입니다.
종말이 달리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보장될 때 종말이 멀리있다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부서진다는 것은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나의 고통은 커진다.
그게 답인 것입니다.
천리안으로 천이통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자들은 전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스님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목이 터져라고 가르쳐도 여러분들은 사흘을 못 넘기고 그 자리에 돌아가버립니다.
스님이 하루 이틀 얘기했습니까?조금 편하면 편한데 빠져서 흐느적거리고
이 도둑놈 누구를 괴롭힐려고 도둑놈의 목을 쳐라고했지요?
오늘 이 시간부터 철저히 바보가 되어서 그 희노애락을 끊어나가세요
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하나 하나 바로 보고 있으면서도 놓치고 있으니 어리석지요
자식이 자기 업으로 살아가는 것을 무심으로 보지 못하고 “왜저러나?” 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철저히 바보가 되면 보아줄 대상이 없으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항상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다툼이 시작되고 미움이 시작되고 원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술이 만드레가 되어 와서도 아이고 잘 드시고 오셨어요 하면서 잘주무시게 한잔더 올리겠습니다.
하던지랄도 하라고 멍석을 깔아놓으면 안합니다.
내가 배웠으면 인용해서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쓰지 못하고 행을 못하는 것이 무식한 것입니다.
내 알음알이를 버리고 나면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그 지식을 활용 할 수 있는지혜
그 지식을 버리지 않는 한 지혜는 열리지 않습니다.
알고 버리라
여러분은 알면은 버릴 줄 몰라 그 기준의 잣대를 들고 계속 설치는 것입니다.
스님은 먼저 버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 순간의 마음이 미래를 만든다라고 숭산스님이 하신 법문
우리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과 내 감정이 바로 누진업이다.
이것이 업이라고 했다.
그것을 숙업으로 다음 생으로 연관을 짓는 고리가 되고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프리카 등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있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우리가 바라 볼 때는 그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고 보지요?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이 몸을 벗고 새로운 몸을 받으로 갈 뿐입니다.
바로바라 보면 바른 답이 보이고
내 틀어진 눈으로 보면 거꾸로가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인다고 보지요
그 나라에서 생산되고 먹을 수 있는 짧은 수명 일 뿐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누워있는 것이나
그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차라리 병원에 누워서 잉여 인간으로 살아가느니 빨리 그 고통을 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기에 아무리 맛있는 영양제와 음식을 주어서 생명을 연장시킨들 똑같은 환경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안 주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지요
먹이사슬에 먹이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지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먹이를 주면 그 먹이를 이용해서 남을 등치는 법을 연구 하겠지요?
더 큰 도둑놈이 되려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가장 큰 도둑놈이다.
누구나 해야 되지 않아요?
바보천치를 대통령으로 시키면 일일이 귀를 열어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여 할것이다.
그게 이력서이다.
스님의 길을 동참해서 수행해서 성문의 자리를 뛰어넘어 보살의 자리로 가라고 했지요?
석불사에는 수행자 일 뿐이에요
신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자라야만 이 자리에 참석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떠나는 자를 잡지 않고 오는 자를 막지 않습니다.
그 천안통을 만든 사람이 또 도둑놈이 올라붙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 와서 해볼 것은 다해보고 하고나서 알면은 다 버려라 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워갈려고 꿍꿍대면서 매고 갈려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알음알이로
생각은 필요 없고 몸이 가서 움직여야만 먹이사슬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화상이 나가지 않고 이 법문이 나가지 않았다면 석불사의 마당이 발디딜틈이 없었을 것 입니다.
이게 답입니다.
필요악입니다.
스님법문을 직접 듣는 것과 화상으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도무지 나쁜 업을 지을 수 없는 어린이까지 에이즈에 걸리고
내 자식 잘 되기를 빌고 내 남편 잘 되기를 빈다면 부처님은 절대 복을 주지 않는다.
고정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우리는 오고 가고 오고 가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자연의 순리에 우리는 그냥 순응해서 갈 것인데 억지로 누릴려고하니까
백만장자가 무엇을 합니까?
죽을 때까지 다 쓸려면 하루에 얼마씩 써야 다 쓰겠습니까?
그것을 쓸려면 필요 없는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야 겠지요?
여러분들이나 그 놈이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나?
그것을 얻을려고 여러분은 기를 쓰고 쫓아가지 않나?
부처님은 그것을 보고 내일 먹을 양식을 오늘 비축하지마라
이것을 바로 인용하면 아마존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 딱 떨어지는 곳이다.
온 천하에 먹을 것이 있으니 날 새면 구하러가면 되는데 왜 죽여서 비축하나?
이 지구를 파괴하지 말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면 온 천하에 먹을 것이 깔려있다.
<지금은 배고픈 사람이 없지않아요?>희자보살 질문
우리나라에도 배고픈 사람이 많다.
노숙자가 얼마나 많으나
상대입장이 되어서 단 한 번도 부딪혀보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 사람이 할 짓이 없어서 남이 버린 것을 주서먹겠니?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희자 보살이 남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가지 끓고 잔소리했지?
그 남편을 어디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네가 세워둔 기준에 맞추어 주지 않는 것에 바가지를 끍었고...
니 기분만 퍼부었을 뿐이다.
남편이 밖에서 부딪히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하루를 힘겹게 일을 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그렇게 한 것이다.
불교를 믿는 국가는 가난하고 기독교를 믿는 나라는 강하다고 진각이가 질문하였다.
부처님을 따르면 더 잘살아야 하고 죄를 많이 짓는 기독교를 믿으면 가난하게 못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장려하는 그 나라는 부강하게 사는가?
그런데 스님은 내일 걱정하지 않고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 그 아마존이 극락이고 이 지구를 다 가지고 있는 주인이었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에 의지해서 하나도 죄를 짓지 않는 먹이 사슬에만 의존해서 욕심이 없는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행복을 짓밟아버린 것이 누구인가?
불쌍하게 바라보았던 지구의 천하의 마구니가 그 사람을 유혹한 것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그 사람은 내가 바라보니 허덕인다고 보았지 그 사람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즐기면서 살아가고있는데
나의 환경과 그 사람의 환경을 착각하고 있으니 일어난 것이다.
하루 먹을 것만 가져도 행복한데 가지고도 가지고도 더가지고 싶은 게 바로 그 사람들이다
어떤 것이 진정 불쌍한 것인지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모든 선은 점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한 점을 찍는 순간 한 원결이 시작되는 것이고 한 사고가 만들어지는 지점이 점이 찍히는 순간이 시작일 뿐이다.
그 점이 얼마나 길게 이어지느냐 이게 원인의 결과이다.
아마존의 미개인은 그 못 사는 사람은 못사는 게 아니고 먹을 게 해결되면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끼리는 벗은 것도 아니요
지 옷 그대로 입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
지금 너희들이 받고 있는 모든 병들이 너희들이 누린 그 죄이다.
바로 내 감정이 나를 계속 흔들어 제낀다.
고요하고 아무생각이 없으면 편안한데
그 망념이 여러분의 편안함을 깨뜨린다.
불안정이 왜 생깁니까?
지 열등의식이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불안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가 망상하는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불안이 생기고 안절 부절 못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왜 합니까?
바로 그 대목에서 자기를 자해하는 것이지요?
내가 구더기가 되기 싫거든 내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야 될지를 스님은 여러분에게 답을 주었다.
숭산 스님은 답없는 얘기를 막연하게 했지만 스님은 완벽한 전생과 내생의 답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스님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사람 손들어봐요?
부끄러워하지말고
지 감정 그대로 얘기할 수 있어야겠지요?
착한 일 이라는 존재자체가 없다.
내가 세워둔 기준이 나를 망친다.
내가 나를 망치는데 착한일이 있습니까?
내가 기준의 틀을 깨지 못했는데 착한일이 어디있어요?
희자보살이 얘기한 그 기준이 부서지지 않는한 착한일도 나쁜 일이요 나쁜 일도 착한일로 거꾸로 갈 수 있다.
내가 세워둔 나의 기준이라는 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린 내 기준의 잣대를 버리지 않는 한 옳고 그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쁘고 내가 나쁘다고 생각한 그것이 옳은 것이다.
나를 지적해주는 그 사람의 말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낄 때 그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희자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은 너를 악평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가 그 사람을 좋은 감정으로 바라볼 수 있나?
“니가 나를 가르쳐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한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나에게 대 놓고 나를 악평하는 사람은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고 뒤에서 악평을 하는 사람은 전생에 빚쟁이이기에 산더미처럼 눈덩이처럼 키워서 나에게 다가올 뿐이다. 그것이 죄 값을 치루는 부피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법은 아주 많다.
스님은 여러분을 세 살짜리 애기로 살아라고 했습니다.
연령에 구애 받지 말고 다 버려라 했지요
내가 80을 살았다면 77세를 공 벌은것입니다. 덤으로 더 얻은것이지요
80년동안 살아온 짐을 다 벗어버리고 놓아라
내가 세살 때부터 악업의 길을 영위하고 만들어갔기 때문에 세 살 이전에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았 것이다.
세 살 이후에 죄를 짓기 시작 한 것이다.
죄를 시작하기이전에 먼저 갔다 놓고 하나씩 업을 녹여나가라
우리의 악업을 짊어지고 한발자국 나갈려면 그 기준이 자꾸 움턴다.
그 기준을 한꺼번에 전멸시켜야만 내가 빨리 갈 수 있는 것이다.
80년의 업을 짊어지고 내 기준을 그냥 살아 있다면 천억겁을 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내 기준이 없어지면 자유로 와 진다.
걸림이 없고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몸 뚱아리에 내 마음이 묶여서 떠날 수 없는 것 이지요.
그러니 구더기가 내몸을 뜯어먹으면 여러분은 구더기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없습니다.
그게 집착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빨리 버리고 빨리 탈피하려면 기준이 없어지는 지점 기준이 만들어지는 지점으로 가는 것이다.
3살이 되면 지 고집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 때부터 업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내가 세 살짜리로 내가 업을 녹여나간다면 2살이 될 것이요 또 업을 녹여 나간다면 1살이 될 것이요 1살짜리는 보살의 자리이고 0살이 부처의 자리이다.
2살짜리가 독각의 자리이고 3살자리가 성문의 자리이다.
미라는 어떻게 됩니까?
미라도 역시한가지가 되겠지
몸 뚱아리 형체는 그냥 있지만 그 몸 뚱아리의 집착에 그 지옥을 하나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몸이 야 썩었던 안 썩었던 자유롭게 우주를 내 왕 할 수 있을 것인데 한빙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갖혀있을 뿐이다.
지 몸 뚱아리를 버리지 못하는 그 결과이다.
수 억만년 있었 다면 그 동안 무간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미라가 되었을 때는 그게 한이 된 것이다.
그게 업보인 것이다.
지 육신을 떠날 수가 없는데 내 생각이 내 몸 뚱아리를 버릴 수 있어야 떠날 수 있는데 집착이 끊어져야만 되는데 모든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욕심을 부린 그자가 미라가되어서 단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진정한 자유를 얻어 어느 곳이던지 오고갈 수 있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 것이다.
내가 걸림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이 우주에는 천국이나 지옥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은 모두 불국정토이고 극락 일 뿐이다.
내가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극락이다.
여러분은 죽어서도 이 지구를 떠날 수 없다.
내 집착이 끊어지지 않는 한 이 지구를 단 한발자국도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지구를 벗어나서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가고 오는 데에는 어떠한 걸림도 없고 어떠한 분별이 일어나지 않기 떄문에 가는 곳이 모든 곳이 아미타세계이고 불국정토이다.
어느 것 하나도 우연히 생기는 것이 없다.
우리의 업을 다른 중생을 돕는데 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해 쓸 것인가?
마음이 사라지면 업 또한 사라진다.
생각이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생각 없이 멍청한 것이 극락이요
그 멍청함을 뛰어넘으면 삼라만상이 다 보인다.
내가 없어진 자리가 그 자리이다.
생각을 버려라 가르치면 멍청해지고 고요해지면 여러분들은 오히려 불안하다.
내가 이래도 되나?
도둑 놈 불러들인 것이 바로 여러분들이다.
이 멍청한 것 조차도 버려라 했거던
그 멍청함에 내가 또다시 탈피하려면 무기로 들어가 진짜 바보천치가 된다.
그 바보 천치는 멍청해진다.
바로 내가 멍청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단계를 뛰어 넘을려면 너가 왔구나 너 속에 내가 들어가야 하거던 그래야 이우주가 여러분의 눈에 펼쳐질 것이다.
이게 바로 스님이 그 세계를 하나한 보았던 것을 되돌려줄 뿐이다.
오직모르뿐이란 것을 간직한다면 업을 만들지 않는 공허함을 만든다.
편안하면서 내 생각이 딱 끊어지면 천하태평이 된다.
바쁠 것도 없고 답답할 것도 없고
그 천하태평이 왔을 때 너 속에 너를 봤으니 이것도 버리라했다.
그 속으로 내가 들어갈려고 그게 4차원의 세계이다.
그 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스님의 모습을 보고 빠진자가 있다라는 말이 많이 떠돌았다.
스님 때문에 빠졌다는 그 중생은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중생이다.
그놈의 분별은 만연에 만연에 곱해져서
스승이 빠졌다면 스승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가
지 분별이 이제 도가 넘었다는 것이고 도가 넘은 그자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나?
항간에 떠도는 그 소리가 많이 들려와서 무시했거던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니가
너희들이 바로 스님의 자리에 가면 이세상이 다 자유로워진다.
스님이 고함도 칠 수 있고 진여화가 참 이쁘구나 안아 줄 수 도있고
때에 따라서는 야이놈아 하고 호통을 칠 수 도 있는 것이다.
방편을 쓰는것이다.
삼장을 완성할 수 있어야만 자유자재로 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중생을 도우면서 살 수 있는가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본성을 찾으면 바로 갈 수 있다.
그러면 석불사의 수행자들은 내 본성을 다 보았어요?
본 자리 일 뿐이고 더 처절하게 더 치열하게 요지부동으로 앉 힐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효대사가 일체유심조라고 했는데 자기 마음의 변화가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게 요석공주를 취한자리도 그것이요
깡통을 들고다니면서 걸인을 한 그 지점도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 그 원효대사의 말을 믿어 주지 않고 얻을려하지 않기떄문에 스스로 잠적 해버린 것입니다.
그 시대에 뛰어난 설법자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이 상법이 머무는 기간에 원효대사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원효대사의 수행의 척도를 바라본다면 하늘과 땅이다.
원효대사는 한 순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모든 것을 깨쳤지만 석가는 모든 것을 다 접하고 그 세계로 갈려니 담아서 버리는 법을 석가는 가르쳤고 원효는 스스로 깨우친 것을 낮추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게 두 분이 간 길이 다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힘 들겠습니까?
원효가 간 길은 참 쉬운 길이고 부처님 길은 참 힘든 길입니다.
마음하나한 생각하나 끊어나가는 것을 몸소 가르쳤다.
여러분들은 원효와 석가가 서로 상반되는 그 길을 나를 버리는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 이것을 보았으면 견승을 한자리이다. 성문의 자리를 뛰어넘은 것이다.
내 마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그놈의 행적을 자제 시켜나간다면 답은 원효보다 빨리가는 길이다.
원효도 탁발을 하고 아이와 뛰어놀면서 미친개이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않고 자기를 낮출 수 있는 행이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만 앞질러간다면 누구나다 그 자리를 뛰어넘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데 왜 지금 제 자리에 멈추어서 그 망념과 놀고 있어요?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망념이라고 했지요?
보지 못 할 경우는 잡을 수 없지만 이제 그놈의 목을 댕강 댕강 쳐서 목이 굴러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갖추어야 한다.
한순간도 놓지면 잡아먹힌다.
원래가지고 온 목적까지 놓치게 된 것이 여러분이다.
몸으로 보여주기만 하라그랬지
그런데 입으로만 가르칠려고하고 있다.
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면 기만으로 보이고 그 아이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너가 동업의 죄를 안 지을려면 바로 철저히 지우고 버려라 .
그놈의 인생은 지가 지 팔자대로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놈의 팔자를 바꿀려고 하니 안되잖아
아드님이 공부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해서 하십시요
그동안 네 집착을 끊게끔
정말 아들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놀아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바로 아드님이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할 뿐인데 엄마가 대신해서 결정하여 아드님을 고통에 빠트리게 해서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포장을 해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네 생각이 엄청나게 들어간 것이다.
그냥 편안하게 할뿐이고 그기에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
<대각심 법사법문>
안녕하십니까?
많이 오셔서 휴가철인데도 오셔서 감사합니다.
8월1일 어머니 기일이어서 갔더니
초저녁 제사지내는 친정제사에 안갑니다.
제대로 법상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법을 하면서 조상님께 제도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참회를 한 것입니다.
제 법문을 하면서 잘 못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냥 기다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먼저 다가서서 제 잘못을 가르쳐주시는 분들에게 저도 돌아보면서 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앞으로 저를 법사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 스님 법문>
대각심법사가 법을 설하면서 많은 공덕을 지었습니다.
조상님들은 본인의 업식으로 제도를 받았습니다.
그 조상님과 형제 오빠에게 지은 원결과 원한은 단 하가지도 녹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게 업식이라는것입니다.
이게 삼매에 들어가서 자기의 누진업을 보고오니까 스님이 그 부분하나를 지적해주고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생 한 순간 내 숙업만 녹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부딪혀 오는 인연도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니기에 잠 안자고 24시간 쉬지않고 회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업이 다 녹아지지 않았다.
그 말은 어찌보면 안 맞는 말이지요?
자기와 연관된 조상은 그의 제도되었으나 형제간에 맺어진 숙명의 고리는 단 하나도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도 살아생전에 원결의 고리를 끊고 갔습니다.
그 형제간이 얽혀있는 숙명의 업보는 누진 업인데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진업이 하나씩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본인의 남은 숙제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감정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 한 지속되어가는 것입니다.
스님도 똑같습니다.
스님의 악연을 하나도 제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스님의 전생의 숙업과 누진업과 그 악연들이 다음에 해결해야할 숙제일 뿐이고 그 숙제를 이 몸받아서 다 해결할려면 여러분을 한사람도 제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연에 붙이고 여러분을 선택한 것입니다.
속가의 인연은 다버려버린 것입니다.
차후에 그 업식따라갈 때 제도하는 방법을 쓰면되겠지만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먼저 선택한것입니다.
내 속가의 인연은 여기에 오지않지요
오고 싶어도 잘 못옵니다.
[출처] 8월_경주법회법문 (석불사) |작성자 행복전도사진각
첫댓글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좋은글 새겨도새겨 감사히 읽고 또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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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