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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 쓴다 하면서 미루고 미루던
이 주제의 포스팅을 드디어 써내려가려고 한다.
올림픽 본선이 시작되기전
후딱 해치우는게 시기적으로도 맞다 싶기 때문에..
이 주제의 글을 들고 나온 이유는 크게 2가지다.
과거 한국축구의 풍토상
괜찮은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안타까운 플레이메이커들을 다시한번 되짚어 보기 위함이고,
또하나는
지난번에 밝혔던 바대로
필자가 상당히 좋아라 하는
안진범 이야기를 간만에 주절대고 싶긴한데,
마땅한 명분은 없고 해서
괜히 그럴싸한 주제를 들먹이면서
맨 마지막에가서 이 계보를 이을 차세대 주자로
안진범 이야기를 읊조리며
글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이다.
사실 한편의 글에
그간 한국축구를 거쳐갔던 대표적인 플레이메이커들을
모조리 다 소개를 하려고 했으나,
쓰다보니 또 글이 길어지는 터라
한 페이지에 모든 선수를 다 설명했다가는
스크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할탓에
1부 - 2부 - 3부 이렇게 나눠서 글을 올릴 예정이다.
일단 오늘은 그 첫번째 1편이다.
1편에서 다룰 이들은
조광래 - 이영진 - 최문식 - 윤정환 이다.
아마 많은이들에게 좀더 친숙한 이름들은
2편 부터 많이 나올것이라 생각한다.
(예를들어 고종수, 이관우, 안정환 같은.)
3편에는 현재 현역으로 뛰는 후발주자들이 설명될것이다.
다음주 올림픽팀의 세네갈과의 평가전이 펼쳐지기 전까지
3편 까지 모두 올리도록 하겠다.
그럼 이제 바로 시작하겠다.
조광래다.
이 사진 한가운데에서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하는 선수가 바로 조광래다.
이 장면은
86 서울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조광래가 중거리슛으로 선취골을 뽑아낸뒤
세레모니를 하는 장면이다.
( 이 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조광래의 중거리포 선취골 덕분에 금메달을 따냈고,
문제는 이후 현재까지 AG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감독으로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조광래일 것이다.
허나, 80년대 대한민국 국가대표 미드필더로서
80경기에 달하는 A매치를 뛰었고
그중에는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던
86 멕시코 월드컵 출전과
86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의
커리어가 들어가 있다.
선수시절 조광래의 닉네임이었던
'컴퓨터 링커' 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조광래는 자로 잰듯한 예리한 패싱력을 선보이는
중앙 미드필더 였다.
드넓은 시야와 더불어 머리를 쓰며 플레이 할줄 아는
영리한 미드필더 였다.
그가 감독이 된 현재에도
늘상 '패싱게임, 패싱게임' 을 강조 하는것도
그의 현역시절 플레이 스타일을 떠올리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그는 패싱과 테크닉 뿐만아니라
활동량과 투쟁심, 수비밸런스도 갖춘
중앙미드필더 였다.
아마 그가 패싱과 기술만 갖춘
반쪽자리 중앙 미드필더 였다면
그 이후나온 여러 후배들처럼
대표팀에서 그 긴 시간동안 중용받진 못했을수도 있다.
허나 그가 보유한 테크닉 만큼이나
왕성한 활동량과 투쟁심을 갖춘 덕분에
7-80년대 한국 A팀의 중원 사령관으로
10년간 활약할수 있었다.
수많은 어시스트와 더불어
A매치에서만 10골이 넘는 숫자의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차붐 처럼 한때 분데스리가에 진출할뻔했던 기회를 맞기도 했으나,
중요한 고비에서 부상을 당하며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비운의 주인공 이기도 하다.
그때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면
조광래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훨씬 좋아졌을런지도 모른다.
무튼, 감독이 된 이후
특히나 지난 1년 여 간의
A팀 사령탑 기간 동안
다소간 아쉬운 언론플레이와
지나친 고집으로 인해
갖은 비난을 듣다가
끝내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긴했지만,
선수시절 조광래는 분명 훌륭한 미드펄더 였고
한국산 플레이메이커의 계보를 여는
첫손에 꼽히는 주자임엔 틀림없다.
(물론 윗세대에 더 대단한 플레이메이커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아는 지식선에서는 조광래 부터가 처음이다.)
이영진이다.
과거 fc서울의 코치였고,
지난해까지 대구fc 감독이었던
바로 그 이영진이다.
8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조광래 이후
90년 월드컵과 94년 월드컵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은 이가
바로 이 이영진 이었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선수시절 이영진을 상당히 좋아라 하였다.
특히나 국내 감독이 이끌었던 월드컵 중에서
역대 최고의 경기력으로 평하는 94 미국월드컵 당시
김호 감독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한국팀의
중원사령관 역할을
바로 이영진이 맡았었다.
이영진은 160 후반대의 작은 키를 지녔지만 (메시랑 키가 비슷하다.)
작은키의 선수가 가진 장점이라고 할수있는
낮은 무게중심과 더불어
볼키핑력이 상당히 우수했고,
활동량도 꽤나 대단했다.
더불어 플레이메이커의 기본이라 할수 있는
드넓은 시야와
예리한 패싱력 까지 갖췄었다.
90년 월드컵 당시에는
한국팀이 보여준 대회 전체 경기력이
워낙 참혹했기에 그냥 넘어가지만
(그 대회에서 건진거라곤 황보관의 캐논슛 밖엔 없다.)
94 미국월드컵에서 보여준
플레이메이커 이영진의 경기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는 매경기 예리한 볼 배급으로
한국 팀의 여러 공격찬스를 만들어냈다.
첫경기 스페인전에서
황선홍이 골키퍼와 맞선 1:1 찬스도
이영진의 상대수비 뒷공간을 후벼파는
스루패스 덕분에 맞은 찬스였다.
황선홍이 '그 상황에서 골키퍼를 제꼈어야 했다' 고
지금까지도 아쉬워하는
바로 그장면 말이다.
무튼, 170이 채안되는 작은신장에도 불구하고
이영진은 발발대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벼다녔고
환상적인 찬스를 만들어내는 선수였다.
물론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A팀에 뽑힌탓에
그의 A매치 출장기록은 50경기 정도 밖에 안되지만
2번의 월드컵에서 활약했고, 빼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90~94년 까지 국산 최고의 플메는
이영진이었다.
자, 이제부터 앞으로 2,3편 까지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이름들이 여럿 나올것이다.
다음 주자는 바로
현 대한민국 u-16 대표팀의 수장
최문식 이다.
사실 이 최문식을 기점으로
앞으로 설명할 선수들 중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른바 '비운의 천재' 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 '비운의 천재' 에 속하는 한명의 주인공이
바로 이 최문식이다.
과거 포항과 전남의 축구를 좋아했던 팬들이라면
이 최문식의 이름을 잊지 못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94년 미국월드컵 당시 최문식은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려
월드컵 팀 스쿼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방금 위에서 설명했던 이영진에게 밀려
최문식은 본선내내 벤치만 달구다 돌아와야만 했다.
그 이후 98프랑스 월드컵 때에는
아시아 예선까지만해도
차붐의 호출을 받아 대표팀에 부름을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호출이 끊어지면서
결국 그는 98프랑스 월드컵도 참가하지 못하게 됐고
결국 선수 커리어에서 그가 뛴 월드컵 본선 기록은 전무 하다.
그저 94 미국월드컵 당시 스쿼드에만 이름을 올린게 전부다.
최문식의 이름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는
단연 '테크니션' 이다.
현역시절 그가 주인공으로 실리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에는 대부분
'테크니션 최문식' 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하는 글들이 많았었다.
더불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로 넘어와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내려간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최문식이 프로로 넘어온게 89년 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그당시때 고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로 넘어오는일은
상상조차 할수없는 일이었다.
이후 10년이 지난 97-98년 당시에도
김은중과 이동국이 고졸후 바로 프로로 넘어오는게
상당히 드문일로 꼽히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그들보다 약 10년이나 앞서
89년 당시에 고졸후 바로 프로로 직행했던 최문식의 커리어가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그는 고졸후 바로 포항으로 넘어와
군입대 전까지 100경기가 넘는 출장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인지도는 급상승 한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화려한 발재간과 예리한 패싱력을 선보이며
당대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던 그는
프로에 와서도 좋은활약을 보여 대표팀에도 승선을 한다.
허나.. 최문식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후 나온
한국산 플레이메이커들이 갖고 있던 동전의 양면이 이제부터 설명해야할 부분이다.
최문식은 분명 상당한 기술력과 패싱을 지닌
훌륭한 미들라이커 였다.
허나 그는 체력과 수비력, 활동량, 적극성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 부분땜에 A팀에서 그는 제대로 중용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가 한국이 아닌
일본 혹은 다른나라에서 태어나
그를 제대로 써먹어줄 축구환경에서 뛰었다면
그는 더 화려한 축구인생을 살았을런지도 모른다.
허나 90년대 한국축구는
무조건 많이 뛰어야 하고,
중원에서의 창의적인 플레이를 만들어나가기 보다는
사이드 어택을 더 강조하는 풍토였다.
기본기 보다 체력과 정신력이 더 강조되던 그런 현실이었다.
물론 94년 미국월드컵 당시에는 김호감독이
패싱으로 풀어나가는 경기운용을 원했기에
최문식이 최종엔트리에 들어갈수 있었지만
위에서 설명했던 그당시 주전 미드필더
선배 이영진 같은경우에는
테크닉과 패싱력에 활동량과 수비밸런스도 갖춘 전천후 선수였다.
허나 최문식은 그러지 못했다.
'반쪽자리' 라는 평가를 들을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98 프랑스 월드컵을 이끌었던 차범근 감독의 스타일은
다들 알다시피 독일식 선굵은 축구.
사이드를 강조하는 전술 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플레이 하는 선수들은
창의적이고 예쁘게 볼을 차기 보다는
피지컬적으로 좀더 강하고 전투적인 그런 미드필더들을 더 원했다.
그리하여 98 프랑스월드컵 당시
공통적인 단점을 지적받았던
최문식과 윤정환은 탈락의 고베를 마셔야 했고
대신 그들 보다 좀더 피지컬적으로 강하고 전투적인 모습을 기대할수 있었던
노정윤과 김도근은 끝까지 살아남아 월드컵 무대를 밟는다.
과거 현역시절
대표팀에서 겪어야 했던 최문식의 아픔은,
이제 현 u-16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나가는
올해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서 해소해야 한다.
그는 현역시절 그가 추구했던
플레이 방식을 고스란히 옮겨
청소년 대표팀을 육성해 나가고 있다.
현역시절에는 그 당시 한국축구의 풍토탓에
'반쪽자리' 플레이메이커 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던 그가
감독이 되어 그의 가슴에 서린 한을 말끔히 풀수 있길 바란다.
현역시절 그는
동료 공격수의 그날 그날 컨디션까지 고려해서
볼배급을 한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정도로
말그대로 천재였다.
감독이 된 그가 재평가 받을수 있길 기대해 본다.
방금전 최문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가장 처음에 했던말이
이제 앞으로 설명할 선수들 중에는
"이른바 '비운의 천재' 들이 많이 나올것이다" 였다.
그러한 비운의 천재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선수..
바로 윤정환이다.
하...
참 윤정환에 대해선 할말이 많다.
아마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많은 이들이 존재할것으로 생각한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팀의 아시아 지역예선 경기들을
전부다 본사람들이라면 모조리 이와 같은 생각을 할것이고
90년대 후반 니폼니쉬 감독이 이끌었던 부천 sk의 축구를 사랑했던 이들이라면
다들 이런 생각을 평생 동안 하게 될 것이다.
윤정환 본인은 오죽할까 싶다...
사실 윤정환은 94년 부터 A팀에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까지 그의 국대 커리어는
고작 A매치 38경기 출장에 불과하다.
8년동안 대표팀에 뽑히면서
40경기도 채 되지 않는 출장기록..
그가 A 대표팀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허나 클럽팀에선 달랐다.
특히나 니폼니쉬와 함께했던
90년대 중후반 부천sk시절
윤정환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사실 '아름다웠다' 라는 말이 그 당시 윤정환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물론 필자가 그당시 니폼니쉬 감독의 부천 sk 축구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이런마음이 더 많이 쏠리는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 윤정환을 설명할때 가장 먼저 이야기할 부분은
바로 그를 배출해낸
'금호고등학교' 이다.
다들알다시피 현 A대표팀의 주전 기성용의 아버지인
기영옥 선생이
이 윤정환을 시작으로
그 이후 고종수, 김경일, 고창현 등의
플레이메이커들을
금호고에서 모두 육성시켜냈다.
뭐 지금은 광주시 축구협회장으로 있는 기영옥 선생이지만
그가 금호고를 조련하던 시절
그는 한국에서 가장
플레이메이커를 잘 육성시키는 지도자 중 하나였다.
사실 이 '한국산 플레이메이커의 계보' 라는
오늘 주제의 포스팅을 쓸수 있는데에는
기영옥 선생의 공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뭐 기영옥 선생이 직접 조련한것은 아니지만
현재 올림픽팀에서 뛰는 백성동도 금호고 출신이다.
무튼, 기영옥 선생이
금호고에서 만들어낸 최초의 걸작
플레이메이커가 바로 이 윤정환 이다.
원래 육상선수였던 윤정환을 금호고로 스카웃 하여,
그에게 '패서 (passer) ' 로서의 가르침을 전수한것이 바로 기영옥 선생이었다.
그리고 이 윤정환의 재능을 훨씬 더 꽃 피워준 이가
앞서 설명했던 니폼니쉬 감독이다.
이 2명의 스승 덕분에 윤정환은
그가 은퇴를 한 지금까지도 많은이들에게 회자되는
국산 플레이메이커 중 최고로 손꼽히는 훌륭한 선수가 될수 있었다.
허나, 차범근 감독과 히딩크 감독이 추구하던
축구색깔에는
윤정환이란 플레이메이커는
그저 반쪽자리 선수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윤정환은 본인 축구인생 절정기 였던
98프랑스 월드컵과 2002 월드컵에서 큰 시련을 경험한다.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그의 금호고 후배인 그당시 만 20세에 불과했던 신성 고종수를 비롯하여
윤정환 보다 피지컬이 좋고, 차붐식 축구컬러에 더 부합했던
노정윤, 김도근 등의 중앙 미드필더들이 최종엔트리에 들어가면서
윤정환은 월드컵 무대를 고국에서 지켜 봐야했고,
안방에서 열렸던 2002 월드컵은
마지막까지 부단한 노력을 한 끝에
가까스로 최종엔트리에 들어갔지만
본선에서 끝내 단 1분도 출장하지 못하며
결국 그는 평생의 한을 간직한채
대표팀 커리어를 마감하고 말았다.
국내 감독중에서 그나마 그를 활용하려고 노력했던 이는
98년 말부터 2000년 가을까지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허정무 감독이었다.
그 당시 허정무 감독은
패싱과 테크닉은 좋지만
피지컬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던
이른바 반쪽자리 플레이메이커들을
중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었다.
그 들이 바로 '윤정환, 이관우, 안정환' 이었다.
허나 허정무 감독은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졸전의 경기력만 남긴채 물러나고
히딩크가 한국땅에 등장하게 된다.
현역시절 윤정환은
여느 플레이메이커들이 다 그렇듯
넓은 시야와 환상적인 킬패스를 뽐내던 선수였다.
특히나 '어떻게 저상황에서 저 공간을 보고 볼을 배급해주지..?'
싶을정도로 감탄스러운 장면들을 수도없이 많이 연출해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 당시
윤정환의 경기력은 단연 백미 였다.
그 당시 올림픽 팀의 최전방 공격수 였던 최용수는
거의 매경기 윤정환의 어시스트를 받으며 골을 뽑아냈고
그렇게 둘은
환상의 콤비로 활약했다.
'최용수와 윤정환이 현역시절 자신의 최고의 파트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언제나 머뭇거림 없이 서로를 지목하는것은
95-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팀의 경기들을 떠올리면 쉽게 알수 있는 대목이다.
윤정환의 패스를 가장 잘 받아먹는 국산 공격수는 최용수 였고,
최용수가 먹기 좋게 딱 알맞게 볼을 배급해주는
국산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도 윤정환 이었다.
아마 2002 월드컵 미국전에서 최용수가 허공으로 날려버린 그 상황에서
최용수는 아마도
'이 패스를 이을용이가 아닌 윤정환이 해줬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했을지도 모른다 ㅋ
윤정환이 올림픽팀에서 활개를 치고있던
그 시기그의 소속팀이었던 부천sk에는
그 당시로서는 생소한
외국인 사령탑 니폼니쉬가 들어서게 됐고
니폼니쉬는 그전까지 한국축구에서 찾아볼수 없던 새로운 방식과 전술을 선보이며
한국축구의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준다.
그 당시 수비를 할때에는 거의 대부분 맨마킹 밖에 할줄 모르던 한국축구에
포백라인 과 지역방어를 도입하면서
유럽식 선진축구를 K리그에 전파한 인물이 니폼니쉬 였다.
더불어 윤정환을 플레이메이커로 놓고
그의 부족한 활동량과 수비력을 커버하기위해
윤정환 밑에
김기동, 윤정춘, 이을용 과 같은 볼란테 들을 배치하는
중원조합을 선보이며
K리그에 충격을 가져다 준다.
그렇게 김기동, 윤정춘, 이을용과 같은 미드필더들이
후방에서 헌신해준 덕분에
윤정환은 활동량이나 수비력에 구애 받지 않고
본인이 하고픈대로 플레이메이킹을 펼쳐나갈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외면받았던 여느 플레이메이커들이 다 그렇듯
윤정환도 어쩌면 90년대에 나타나지 않고
지금 출몰했다면 좀더 다른 축구인생을 살았을지 모르고
애초에 그를 잘 써먹어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런지도 모른다.
뭐 아르헨티나의
리켈메나 베론은
수비력과 활동량, 스피드가 좋아서 슈퍼스타가 되었나?
어쩌면 윤정환이 반쪽자리 선수 였던 것이 아니라
그를 써먹어줄 감독들의 전술이
반쪽자리 구상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강한 반박을 내놓는 이들 또한 많을것이다.
아무리 윤정환이 기술력이 좋고, 패싱이 좋았다 한들
어디까지나 그건 아시아 무대에서 정도나 통하는 수준이고
그정도의 피지컬로는 세계무대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잠식당해 닌자모드에 빠졌을 것이라고..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팀의 수준상
어느 특정 한 선수에게 전술을 맞춰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천sk에서는 윤정환을 중심으로 전술을 구상하여
그의 밑을 바치는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 등의 볼란치들은
철저히 수비적인 부분에만 헌신하게 했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A팀에서 까지 옮겨지길 바라는것은
큰 무리였을수도 있다.
허나, 한국산 정통 플레이메이커가
세계무대에서도 통할수 있다는것을 한번쯤은 보고싶었고
그런 기회가 한번쯤은 주어지길 원했으나
최문식이 그러햇듯 윤정환에게도
월드컵 무대는 단 1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후계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현재의 윤빛가람과
또한 필자가 상당히 아끼는 안진범 또한
현역시절 윤정환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고스란히 짊어진 후배들이라 할수 있다...
화려한 재능에도 불구
그들의 장점을 알아주기 보다는,
그들의 단점만을 지적해대며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과거의 한국축구에 대한 아쉬움 섞인 하소연의 글이 되버린것 같아
1편의 글 마무리가 쫌 찜찜하다...
2편과 3편에서 또 새로운 선수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한국축구에도
아름다운 플레이메이커가
대표팀의 경기를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한번쯤은 제대로 볼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장황한 1편을 마친다.
by. 주휘민.
첫댓글 이글 넘 기다렸네여 ㅋ 선리플 후감상
잘읽었습니다^^
언제나 주휘민님의 글은 너무나 기다려집니다. 혹시 김경일 선수에대해서도 다룰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워낙 기대가 컷던 선수라 ㅠ
다뤄야 겠지요.. 왜 이른나이에 은퇴를 할수 밖에 없었는지도 말을 해야하니. 근데 커리어가 워낙 짧아서; 부상자들은 따로 묶어서 설명해야할듯.
아 그리고 이번올림픽 대표팀에대한 칼럼도 생각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본선 첫경기 직전에 할 계획입니다.
그런데 리켈메, 지단과 최문식, 윤정환이 다른 게 리켈메, 지단 같은 선수들은 활동량과 투쟁심은 떨어지지만 몸싸움(정확히 말하면 바디밸런스)이 뛰어난 선수죠. 공미 위치에서는 볼을 간수하는 것에 있어서 기술도 중요하지만 몸싸움도 잘 견뎌내야 하는데 그런 점에 중용되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동감입니다. 바디밸런스든 뭐든 윗선에서는 탈압박 능력이 중요한데 그게 안되다보니.. 그래서 피를로도 공미뛰다 포백 바로 앞으로 포변한거고..
잘읽었습니다.
김경일선수? ... 뭔가 가물가물한데 혹시 어땠던 선수인가요?
금호고가 낳은 천재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였는데, 부상때문에 이른나이에 선수생활을 접었죠. 수도없이 많은 수술을 해야만 했는데, 알고보니 선천적으로 뼈가 기형이라 애초부터 축구를 하면 안되었었다는 의사의 최종 판정과 함께... 비운의 선수. 이동국과 함께 99년 u20 월드컵을 뛰었던 플레이메이커.
잘읽었습니다 ㅎ 안진범선수이야기기대되네요
와 최문식선수 잊고 살았는데 u-16 감독님이시군요~ 정말 팬이였는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오래기다렸어요ㅋㅋ
윤정환-최용수콤비가 갠적으로 축구에 빠져든 계기.. 어린나이였는데도 비쇼베츠시절 윤정환의 패스와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아직도 잊혀지지않을정도로 충격적이었음.. 그때 우성용 엄청 욕했던 기억이.. 하도 날려먹어서 ㅋㅋ
그래서 올림픽 본선에서는 황선홍을 와일드 카드로 뽑았었드랬죠.ㅎ
대박공감 가네요ㅎ 94, 98, 02년에는 이상하리만큼 사이드 어택에 집중해서 중미들이 빛을 못 본 사례들이 워낙 많았는데 그 부분은 두고두고 아쉬더라고요. 우리나라는 플메들의 계보가 꾸준히 있는데 계속 못 써먹어서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조광래호때 적당한 플메 1명을 놔두고 활동량과 수비력좋은 중미를 배치시켰으면 가장 이상적인 전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윤정환 선수는 이동국선수만큼 월드컵이 아쉬웠을듯
그런데요. 저도 칼럼을 쓰고 싶은데 자료를 어디서 모으시나요?? 글은 쓰고 싶은데 머리속 자료는 있고 증명할만한 자료가 없어서 못쓰는데...
와... 어쩜 글이 이렇게 와닿는지...한국 축구에 대해 더 알고가네요 ㅎ
언제나 흥미롭게 읽고있습니다~ㅎ 주휘민님께선 윤빛가람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 개인적으로 느껴온바는 역대 플메계보에서 킥력은 가장 뛰어난듯하고 준수한 볼키핑,시야등을 갖추긴했지만 너무 기복을 심하게 타는거같거든요 이게 울나라 대표팀 특성상 플메형 선수들을 활용하지 못해 생긴 공통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윤빛가람선수 개인의 기복문제인지 궁금합니다 윤빛가람선수는 애증이 많아 참 연민이 많이 가는 선수라 관심의 끈을 놓을수가없네요ㅠ
3편에서 다룰 내용입니다.
잘읽었습니다.ㅎㅎ 다음편이 기대되네요
기대햇는데 역시는 역시 역시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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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님 말이 맞아요. 기영옥 선생이 금호고 쭉 지도하다가,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으로 옮겼었죠 자리를. 그냥 넘어갈뻔 했는데 감사합니다. / 김병수 감독도 김경일 처럼 어린시절 부터 부상을 달고 살다가, 끝내 일찍 져버린 비운의 천재. 92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 한국을 올려놓은 영웅. 이글에서 다루기엔 커리어가 워낙 짧고, A팀 커리어가 없어서 뺐음. 프리킥도 어마어마 했고, 상당히 유연하여 발리도 잘 꽂아 넣던. 브라질리언 처럼 플레이 하던 선수. 문제는 동양인의 몸으로 그런 플레이를 펼치다 보니 인생내내 부상을 시달리고 결국 4년정도의 성인무대 커리어를 끝마친채 일찍사라져버린 비운의 재능.
좋은글 잘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많이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좋은글 재밌게 잘봤습니다 2,3편도 기대할게요~
아 잘봤습니다~ 재밌고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주휘민님의 칼럼 앞으로 자주 기대할께요~^^
여태 봐온 축구 관련 게시물 중 최고의 글인것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2,3편에서는 현역시절 본 선수들도 나오길 기대~
ㅎㄷㄷ
이 주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한국 축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패싱력보다는 많이 뛰고 움직이고 몸으로 부딪히는 유형을 더 선호하다 보니 저런 플레이메이커들이 많이 빛을 못 본 것 같아 안타깝네요.만약 홍명보 감독이 올림픽 이후에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면 윤빛가람도 그렇게 될 것 같고;
보관합니다 ㄷ ㄷ
중간에 수정해야할 부분이 있어요. 김경일은 기영옥 선생이 금호고에서 조련한게 아니라 광양제철고 초대 감독 시절 조련한거고.. 고창현은 금호고 나온것은 맞는데, 기영옥 선생이 직접 조련한게 아님. 급하게 묶어서 쓰다보니 잘못 기재한 부분.
아^^ 친절히^^ㅎ 감사합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