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현 경기도 광주 초월읍 대쌍령일대)전투
쌍령전투(雙嶺戰鬪)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3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 역사 3대 패전 (임진왜란 - 칠천량해전, 병자호란 - 쌍령전투, 한국 전쟁 - 현리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순식간에 남하한 청군에 겁을 먹은 조정은 팔도에 근왕군 소집을 명한다.
제일 먼저 소집된 강원도 근왕군은 7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출했으나 선발대 1천명이 청군에 전멸당하고 사기가 떨어져 더이상 진출하지 않았다.
당시 진격한 전국의 근왕군들
유일하게 전라도 근왕군이 전투에서 이겼는데 이는 병자호란때 발발한 전투중 조선군이 승리한 유일한 1승이다
전라도 근왕군 8천은 충청도 근왕군을 무너뜨린 양굴리(청태종 홍타이시의 매부, 청태종이 가장 아낀 장수 중 하나)는 광교산에서 맞딱뜨리고 전투를 시작했다.
전라도 근왕군은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포수 궁병 창병을 3선으로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적을 막고 전투중 적장인 양굴리를 사살한다,
장수를 잃은 청군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결국 퇴각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흐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이유는 탄약과 군량등 보급물자가 떨어져 결국 수원으로 철수하게 된다.
쌍령전투는 충청도근왕군이 패배한 1월2일과 유일하게 조선군이 이긴 전라도근왕군의 전투 1월5일 사이에 벌어진 1월 3일의 전투이다.
↑ 정면에 보이는 곳이 쌍령고개이다.
경상도 근왕군은 쌍령에 도착하여 쌍령고개길을 마주보고 좌우로 배치하였다
당시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는데 안동영장 신세강은 진영을 높은 산위로 옮기자고 하였으나 경상도병마사 허완은 거부하였다.
1월 3일 결전의 날이 밝자 청군이 조선군이 낮은 지대에 진을 친것을 확인하고 산봉우리를 기습 점령해 버렸다.
「연려실기술에선 “청군 선봉 33명이 목 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고 묘사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던 청군이 낮은 곳에 있던 조선군을 내리 덮쳤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며 돌격하던 청군의 기마병 300명은 조선군 4만명을 들이쳤다. 이때 조선군은 대부분 임란이후 조직된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치명적 단점은 탄약이 부족했다.
상황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아직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에게 많은 양의 화약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투 초반 조총으로 몇몇의 청군 기마병이 죽자 당황했으나 이내 탄약이 떨어졌음을 안 청군은 곧바로 진격하여 조선군에게 들이닥쳤고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4만 병사 중 절반이 넘는 병사가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먼저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
고 묘사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압사사건(壓死事件)이다. 지휘관 허완조차 도망치다가 말에서 떨어져 밟혀 압사당했다.
좌병사 허완군이 전멸당하자 우병사 민영군또한 소식을 듣고 조령까지 도망가 버린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기병 300 대 조선군 4만, 즉 청나라 기병 한 명이 133명의 조선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선군의 패인은 단지 화약이 떨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쌍령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밀접 대형으로 배치하는 등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닉(panic), 즉 공황(恐惶)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총체적 리더십 부재의 결과다.
허완이나 민영은 그동안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이른바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무능한 인물이 중책에 임명되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쌍령전투다.
패배의 이유
1. 척후를 이용하지 않았다.
척후와 정찰을 하지않아 청군이 유리한 고지에 오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2. 높은산에 쳐야할 진지를 낮은고지에 침으로써 구릉지대에서 밀고 내려오는 청군기마대를 막지 못했다.
3. 조총병 위주의 편제
전라도근왕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조총, 창병, 검병이 효율적으로 목책을 쌓고 대응하여 기마병 위주의 청군에게 큰 압박을 주어 이겼으나 조총병뿐이던 경상도 근왕군은 근접전이 벌어지자 전부 전멸했다.
인조는 결국 항복한다.
삼전도는 지금의 잠실 부근이다.
당시 조선군 조총병
조선의 대표적인 화약 무기는 조총과 화포다. 특히 조총은 인조 때에 이르러 주력 병기로 활용된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조선은 조총수를 앞세워 기마병을 선봉으로 한 청나라 군대와 맞섰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총 도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바 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뻔한 조선이었다.
조총 개발에 조선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이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을 때였다. 누르하치의 침략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조총을 비롯해 각종 화포 제작에 돌입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를 확보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이후 인조 때에 이르러 조선이 보유한 조총 제작기술은 일본을 넘어섰다고 한다.
청나라의 팔기군
청나라의 군대는 팔기군 체제였다. 서로 다른 8개의 깃발아래 병력을 편제했다. 몽고족과 한족도 팔기군에 포함돼 있었다. 중국 전쟁사 전문가인 크리스 피어스가 펴낸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를 보면, 청군은 일반적으로 창병, 검병, 궁수로 구성된 3열의 보병과 그 뒤에 기병이 배치되는 식이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 전인 1620년대부터 화승총과 화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병은 당시에도 칼, 창, 활 등을 주로 사용했다. 기병은 대부분 철갑을 착용했는데, 징이 박힌 면갑(바깥쪽은 천, 안쪽은 금속조각을 입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은 홍이포(紅夷砲)에 의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군은 홍이포를 앞세워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의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마저 함락시켰다.
홍이포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청나라는 남한산성 밖에 진을 치고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댔다.
'속잡록'(1637년 1월 24일)은 홍이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적이 홍이포를 터뜨리니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 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 하다. 빠르기는 회오리 바람과 같고, 소리는 벼락과 같아 그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강화도 수비군에게도 홍이포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계집' 1637년 1월 27일 기록을 보면, 포성이 산과 바다를 흔들고, 포탄을 맞은 물건은 곧바로 꺾이거나 무너졌다고 돼 있다.
조선이 홍이포를 쓰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조는 "병자년(1636,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이 방법을 배우지 않아 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했다.
남한산성 전투도
첫댓글 한국사 3대 승전은 무려 1400년전의 살수대첩이요, 1100년전의 귀주대첩이요, 500년전의 한산도대첩이건만
한국사 3대 패전은 겨우 500년도 안되는 역사속에서 들어잇구나
혹시라도 우리 근대사가 이토록 휘청거렷던 이유일런지는 모르겟다만..
용기와 담이 없는 힘은
그저 쓸모 없는 허황된 힘일뿐
힘이라 말하려면 그 용기와 담을 세우고
그것으로 적의 빈틈을 노려야 힘이라 부를수 있지요
그때도 지금의 자한당 깥은 무리가 집권하고 있었던 터라 나라꼴이 엉망이었죠.
전쟁을 주둥이로만 하는것들이라 막상 전쟁나면 우루루 도망가버리니 나라꼴이 어찌 되겠습니까?
3대패전의 하나인 6.25때의 현리전투도 친일파 출신 군단장 유재홍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밀려오자 겁을먹고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하고 저만 살자고 헬기로 튀어서 벌어진 일이었죠.
군단장이 이모양이니 사단장 및 지휘관도 계급장 떼고 도망을 가버리니 전쟁이
제대로 될리가 없었죠.
결국 2만에 가까운 사상자와 지급된 무기를 모두 배앗기는 패전을 겪었죠.
이일로 미8군 사령관은 우리군의 작전 지휘권을 빼았고 미군에게만 지휘권을 부여하게 됐었죠.
그후로도 유재홍은 오래 살아남아 잘 먹고 잘 살았죠.
노무현정권때 전작권을 회수한다고 하니 군바리들을 이끌고 몰려가
전작권 환수 반대시위를 하기도 했었죠.
지금도 자한당 무리들은 전작권도 없는 주제에 전술핵을 들여와 어떡해 쓰자는건지
대책도 없이 말로만 씨부려대고 있지요.
지난 이명박근혜정권때는 국방력 증가는 힘쓰지 않고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거라는
헛소리나 해대는 쓰레기짓을 해댔었죠.
그런 무리들에게 표를줘서 나라를 망치는 어리석은 짓은 더이상 없어야 겠습니다.
왕이 무능하고 탐욕스러운데 무슨 백성이 충성하것나 인물도 뻔한 인물 장수들도 마찬가지
꼭 무능함이 503과 그 조무래기들 같군요. 503시절에 국난이 있었다면 저것보다 더 우와좌왕 하다 서로 깔려 죽었을것 같은데요.
그 조무래기들 자한당이 아직도 남아서 나라를 와해시킬려고 지금도 지럴을 떨고 있죠.
할 말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