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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박근혜-이명박’ 공동정권으로만 열린당을 이긴다.
-박성민,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웅진지식하우스, 2006.를 읽고 -
1. 한나라당은 대선 석달 전에 경선 한들, 수 년간 오픈된 후보. 불가피한 경선과열로 유력 대선 주자간에 ‘잔펀치’는 이미 남발된 상태. 어느 대선 후보로든 2002년 대선 막판의 체력 저하는 불가피할 듯.
2002년 대선 처럼 ‘김대업’을 열린당이 기용할 가능성은 적다. 한나라당 대권 경선과정을 잘 기억했다가, 상대 후보가 날린 ‘잔펀치’ 노하우 대로 ‘잔펀치’를 한번 더 날리면 결국 군중심리 공학상 고꾸라 질 수 밖에 없다.(210~211쪽)
즉, 한나라당 자유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박근혜-이명박’지지자간 대전의 ‘잔펀치 기술’이 여당 주도의 매스미디어에서 일제히 터지는 순간, 그것이 한나라당 유력 대권 주자를 붕괴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한나라당 유력 대권 주자는 경선을 대선 1달전에 한다 한들, 신선감이 여당과 같을 리가 없다. 한나라당 자유게시판에는 ‘김대업’ 도움 없이 한나라당 ‘완톱’ 후보시에 한나라당 후보를 무너뜨리는 비법이 매일 수백껀식 오르고 있다. 열린당이 표적 공격수로 ‘잔펀치’(김대업과 설훈 등 헛소문 유발꾼)를 안 날리는 대신, 한나라당 지지자가 한나라당 지지자를 겨냥하여 ‘잔펀치’를 날리는 식으로 바뀌어 간 것이 2007년 대선 국면이다.
2. 反 파시즘(한나라당) 연합전선에 타켓이 될 수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스트라이커(대통령 후보)’, 타켓이 될 수 없는 이명박 전 시장이 ‘처진 스트라이커(국정 2인자 후보)’
이명박 선거운동 비법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작전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엽기적이다. 이명박 지지자는 박근혜는 反 한나라당 연합전선에 타켓이 되기 때문에 안된다!! 며 흘린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이명박 지지자의 착각을 질타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장 중에 반 한나라당 세력이 너무 커서 집권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 (163쪽)면서, 한나라당의 힘은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의 욕구가 좌파정당에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97년 대선은 ‘반김대중’작전으로 지지표를 만회하였으나, 선거의 본질상 자기 중심적인 이슈를 내야 한다고 반대한다. 2002년 대선은 ‘나라 다운 나라’라는 측면으로 구체적 비전을 제시한 노무현에 이회창이 밀렸다(161쪽)고 질책한다.
바다를 건너다는 공공연하게 말한다. 한나라당 유력 대권 주자라면, ‘이종석 통일부 장관’을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공약을 내걸어야 한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는 최장집 교수를 감옥에 넣겠다는 공약도 필수적으로 부가된다. 이는 열린당과 한나라당 지지자의 예측 가능한 범위에 들어간다. ‘나라 다운 나라’라는 소극성으로서는 ‘反 한나라당 연합전선’의 국면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 노무현의 미래 비전에 대결하는 이회창의 ‘나라 다운 나라’ 슬로건보다 결코 많이 앞서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은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선거 방식으로서, 이회창의 몇 백배 이상으로 더 좌익에 소극적이다.
정치컨설턴트 중에 좌익운동가 출신이 많은 이유에 회의적이다. 예전에 여론조사 때 정치컨설턴트라 내노라 하는 자의 95%이상이 좌익(친 노사모 경향)이었다. 박성민 씨도 사실상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나, 책은 저자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바 때문에 의미가 있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가 주장하는 ‘군중의 시대’에 걸맞는 패러다임 정립은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연구해본 이들일 수록, 군중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박성민씨는 한나라당 지지 노인들끼리 주고 받는 대권의 ‘인물 중심론’에 대하여 심각하게 의문을 갖게하는 ‘정당 중심론’을 내세운다. 그리고, 정당 중심론에 이어서 ‘이슈’를 적극적으로 퍼뜨리며 ‘구도중심’으로 상대를 얽어맬 수 있는 ‘위세’의 후보를 주장한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는 ‘구도 중심’으로 한나라당 입장에서 적극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갑제기자께서 걱정하듯이 ‘좌익’이 후원하는 ‘우익 후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열린당에 ‘구도 중심’적으로 각을 세울 수 있는 면모에 대하여, 이명박 전 시장이 부정적인 언사를 한 것만 한 트럭이 될 정도라고 바라본다.
이명박 전 시장은 다수 노빠와 민노당 지지자의 선망 어린 표를 다수 달고 다니는 상황에서의 지지율을 보이기에, 한나라당 대의원들의 ‘대권 표심’에 어떠한 식으로든 통과할 가능성이 없다. 박근혜 전 대표보다 열린당과 민노당 지지자의 질시와 분노를 받고서도,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로 살아 있어야 ‘反한나라당 연합전선’의 타켓이 될 수 있는 것이다.
‘近代化 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란 陳法으로 대결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과연 ‘민족해방(민주화)세력’의 분노의 타켓이 될 수 있을까?
스트라이커는 사실상 정해졌다. 이는 이명박 전 시장이 경선 때까지 ‘열린당지지자’와 ‘민노당 지지자’의 온갖 분노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대권 주자로 살아있을 경우에만 반박 가능하지, 현재로서는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의 타켓이 자동적으로 될 수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스트라이커가 적절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처진 스트라이커’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부동표 공략이 어려울 듯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장점은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의 타켓’이 되어서, 한나라당 지지자를 구도 중심적으로 뭉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이명박 전 시장만큼 부동표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사실상 부족하다.
축구 비유를 썼으니 끝까지 써보자.
플레이메이커는 강재섭이요, 윙백은 보수 색채의 최고위원진 들이다. 정치가 축구 다울 수 있다면 결국은 ‘골’을 넣는 능력이요, 정치에서 ‘골’이란 구도중심적으로 지지자를 몰아넣는 능력이다. 소장파와 좌파경력자의 돌출 발언은 팀웍을 깨는 수비수들의 오버래핑 수준에 가깝다.
박근혜 전 대표는 구시대 패러다임이면서 군중 시대 패러다임 아닌 차원으로, 1달 가까이를 완벽히 휴식했다. ‘구도중심적’으로 지지자들을 몰아넣으려면 지독하게 반복에 반복을 해야 한다. 계속 내비치는 것이 정치인에 중요하며, 이슈도 반복되어야 한다. 이명박 전 시장은 계속 내비치기와 반복 이슈에는 좋으나, ‘구도중심적’으로 지지자를 몰아넣는 능력은 막말하면 ‘선천적 발기불능’(?) 수준이라고 까지 해야 된다.
3. ‘인물 중심’으로 당선되겠다? ‘구도 중심’으로 당선될 공부하시길.
‘인물중심’의 시대가 아니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너무도 완벽한 정치컨텐츠를 갖춘 이회창 진영의 몰락을 분명히 지적했다.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대통령보다 나았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도 중심으로 무너졌다.
‘구도중심’은 이데올로기로 군중을 각인시켜서 그 틀내에서 군중들을 행동시켜서 벌어지는 경우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현재에서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맞다.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으로 자동 타켓이 될 수 밖에 없는 후보가 아닌 한, ‘스트라이커’ 지위는 결코 한나라당 대의원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적극적 지지자’를 제외한 부동표 흡인력에는 취약함이 드러난다.
이명박 전 시장은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선천적으로 될 수 없어도, 한나라당에서 늘 필요한 인재이다. 그러나, 부동표 흡인력엔 강하되 적극적 지지자를 ‘완스트라이커’체제로 만족 시킬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면, ‘구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공동정권론’을 세우며 약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에서, 김영삼 문민정부가 허락한 60년대~70년대 거물 좌익들이 피해가 입혀질 수준의 ‘좌익 역사책’을 파괴하는 주장을 철저하게 반대한다. 한나라당 지지자가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론’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이명박 전 시장 같은 이들이,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전법을 할 뿐 좌익 역사책 기준의 용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구도중심’론에서 한나라당이 수동형 모드, 열린당이 적극형 모드가 되는 이유는, 이명박 전 시장계보가 좌익 역사책에 대한 해체주의적 공격을 허락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구도중심론으로 먹히면 좌익이 뿌려둔 맑스주의적 틀거리에 그대로 먹히게 될 수 밖에 없다. 좌익 맑스주의 프레임에 먹힐 뿐이지, ‘새롭게 창출할 정상국가’에 대한 미래기대치의 적극적 투사로서의 면모가 사라지는 것이다.
2002년 대선에 과거 좌파 운동 했던 이들이 전방위적으로 이회창을 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에 왜 그토록 수동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가가 드러난다. 이러한 측면이 7월 경선에서 ‘이재오’최고위를 대표에 앉게 하지 못하게 한 ‘대의원’의 선택이었다.
이명박 전 시장이 좌파숙청에 적극적 도움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제로 한, 박근혜-이명박 공동정권론이 실제적으로 의미가 있다. 한나라당의 필승지세를 전제로 하여, 독일*중국*미국 등에 유력 대권주자가 분업하여 한나라당을 도와달라고 나아가는 모드여야 하며, ‘서로가 서로에 김대업’이 되는 모드는 벗어나야 한다.
‘구도중심’이란 즉슨 ‘중도파’가 낙동강 오리알 되는 게임임을 말한다. 좌파정당과 연대론을 내세우는 강도가 높은 후보는 ‘낙동강 오리알’되기 특급열차표를 받은 것과 같다.
4. 모두가 까맣게 잊고 있는, 90% 이상의 미디어와 포털이 좌익에 편중된 시대. 군중들이 옳은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좌익에 주입받은 바’를 깨려면, 좌익이 내세우는 후보들의 이미지를 넉넉하게 초과해야 한다. 그래서, 공동정권론이 뜰 수 밖에 없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차기 좌파 정권 후보도 영남표밭의 분열을 위해서, 영남 후보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 한다. [군중의 시대]에서 죽은 것이 살아있는 것을 잡는 특성이 군중의 본성이라 하니, 결국은 김대중 선거운동 공식을 그대로 승계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호남 70% + 충청 일부+영남 일부 의 공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1997년 대선처럼 이명박 진영의 ‘제2이인제’처럼 나아가기도, 2002년 대선처럼 충청표의 한나라당 약올리기 처럼 나아가기도 안된다.
오픈 프라이머리를 동원하여 대선 석달전에 마구 방송 두들기면, 노무현대통령이 경선 직후 지지율 60%를 달성했듯이, 25% 대 지지율 후보는 여당이 어렵지 않게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서, ‘공동정권론’이 아닌 ‘완톱’시스템은 이 순간부터 ‘김대업 타임’으로 들어가서, 갖가지 추문으로서 몰락되어 사글어들 타이밍이 될 것이다. 지지율이 노력 잘 하면 따라잡힌다는 착각을 줄 수도 있고, 다른 지지자의 표를 승계한 한나라당의 지지율 덧셈 공식이 그렇게 단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나라당은 ‘인물 중심주의’에 미련을 가질 수록, 측근들이 군중들의 목소리를 가리게 될 수 밖에 없고, ‘구도중심주의’를 뚫을 군중의 역동성을 저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구도중심주의’에서 한나라당이 강세를 유지하는 바탕을 계속 끝까지 유지하려면, 공동정권론 밖에 없다.
*. 조지 레이커프의 책 못지 않게, 박성민 정치컨설턴트의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책은 도움을 많이 줄 것이라 여겨진다. 이론적 수준은 문예출판사 간행의 [군중의 시대]를 결코 넘지 않는다.
[군더더기] 원희룡이 맑스주의 휴머니즘 운운했다. 철학사적으로 사르트르 직후의 영향이다. 사르트르도 프랑스 공산당원이다. 국내에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에리히프롬이 좌장으로 참여한 [사회주의 휴머니즘론]이 사르트르 논리 영향의 책으로서 주목된다.
원희룡은 맑스주의 휴머니즘 운운하면서 ‘주체사상 민족해방계열’이며, 민중민주계열이 아님을 드러냈다. 동학 논리의 천도교세력들이 6.15 논리에 주체사상에 친숙함은, 보수 언론들은 지겨운 일이다. 도올 김용옥에 의해서 동학연구가 드러났듯이 ‘아랫 사람’을 위로 높인다는 측면으로서의 순진한 휴머니즘적 수사학의 말장난이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 등에는 기본 학습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문제 공부가 깔려 있다. 주체사상파와 경쟁했던 민중민주계열이 ‘이데올로기 문제’를 깊이 팠다. 프랑스 공산당 알튀세르 공부에 이어서, 푸코와 들뢰즈 공부로 나아갔다.
지식을 접근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오늘날에도 주체사상파식으로 접근하면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고, 철학사적으로 사라진 수준의 1950년대 서구 좌익 논리를 말하면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철학사적으로 우익용어이며 좌익들은 부르주아 용어로 경멸하고 있다. 뉴레프트와 연결된 푸코의 유명 저작 [말과 사물]에서 ‘인간’이 소멸될 것이라고 지적 한 유명한 후반부를 생각해보자.
맑스주의를 바라볼 때 ‘수령주의’와 대응되는 ‘민중주의’로 나아가면 그것이 ‘휴머니즘’으로 걸린다. 황장엽씨가 수령주의를 버리고 ‘사회적 생명론’을 내세우고 ‘인간중심주의’라고 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이면서 인간적인 것을 경멸하는 투쟁중심주의가 맞다. 맑스주의를 반 인간주의라고 말하는 바가 자유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우익입장의 출구를 열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원희룡은 맑스주의 휴머니즘 운운이 민족해방계열이며 민중민주계열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결론나며, 철학사적으로는 50년대 논리에 존속되어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회적 생명론’이란 공산주의적 인간론을 부정하지 않는 집단이 우익 내에 현존하고, 그 차원으로서 ‘인간중심주의’란 말이 드러난 한에서,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맑스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일상적 자유를 파괴하려 하는 폭력 혁명을 추구하는 투쟁의 철학이 본질이란 생각 정도는, 공감대가 있어야 적절하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김영삼 대통령은 복잡한 것을 너무나 단순하게 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말하는 특성이 있고 김영삼이 늘 압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군중적 속성으로서 이미 아는 바만 반복하길 좋아하며, 이문세의 “옛사랑” “조조할인” “파랑새”는 원해도 신곡을 원하지 않는 크리스찬들에게서, 주체사상파나 옛날 철학사만 맑스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보며 세계철학 일반은 휴머니즘을 우익의 아젠다로 보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이 ‘알려주고 싶어서 숨막히는 욕망’을 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