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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의 프리미어리그..
매년 우승권에 올라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퇴임 1시즌채 안되어
7위. (12-13 : 1위) 승점 63점.(12-13 : 89점)
63득점 42실점 (12-13 : 86득점 43실점)
불과 작년시즌과 비해 내려와도 너무 내려왔다.
왜?
모르겠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화끈이 그리 긴 편이 아니라....ㅋ
맨유에는 상징적인 번호가 있다.
물론 어느 클럽에서나 상징적인 번호지만
이 클럽에 있어서 더 특별한 번호..
'7'
7번을 단 선수들은 팀이 어려울때마다 주연이 되어 맨유를 정상으로 올려놨다.
북아일랜드에서 온 맨유의 구세주
조지 베스트 [George Best] 1963 ~ 1974
Maradona? Good.
Pele? Better.
George? BEST.
당신이 거명할 수 있는 그 어떤 플레이어와도 최소 동등,혹은 그 이상이다. - 바비 찰튼 -
1958년. 비극이 일어났다.
1958년 2월 6일, 맨유는 유러피언컵 준결승 진출을 확정하고 전세기편으로 맨체스터로 돌아가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베고그라드에서 출발한 전세기는 재급유를 위해 뮌헨에 들러야 했다.
뮌헨에서의 급유를 마치고 출발하기 위해 기장은 이륙 시도를 하였으나,
전세기는 이내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이 사건으로 7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사망하고,
보름 후에 스타 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조니 베리와 재키 블랜치플라워는 사고 이후 선수 생활을 잇지 못하고 은퇴했다.
매트 버스비 감독 역시 심각한 부상을 이유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결국 맨유는 리그 9위라는 초라한 성적과 함께 시즌을 마쳤다.
각지의 언론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해산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위기였다.
참사 이후 팀의 재건을 위해 각국에 파견된 스카우터들 중
북아일랜드 담당의 맨유 스카우터인 밥 비숍은 벨파스트를 전전하던 중
누더기 옷을 입고 열심히 공을 차고 있던 한 소년을 보게 된다.
조지 베스트라고 이름을 밝힌 소년의 재능을 본 그는
치료를 마치고 복귀한 매트 버스비 감독에게 이와 같이 보고했다.
"우리는.. 천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고향을 떠나 맨체스터에 오게 된 베스트는 갑작스럽게 진행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이후 고향, 벨파스트에 대한 향수병이 도져 팀을 무단 이탈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베스트를 본 매트 버스비 감독은
베스트에게 매경기 끝날 때마다 벨파스트로 돌아갈 수있게 티켓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한다.
이런 구단의 호의와 배려로 인해 베스트는 점차 팀에 녹아들기 시작했고,
곧 맨유 유스팀의 중심 선수가 되어 잉글랜드 전역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마침내 그는 17세의 나이에 데뷔를 하고 매트 버스비 감독은 그를 중심으로 팀 재건에 힘을 실었다.
베스트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드리블러였다.
데뷔 시즌부터 그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맨유팬들에게 일약 스타의 취급을 받았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상대 수비진을 찢어버리던 그는 곧 전 세계 주목하는 선수가 되어 그를 연신 집중 조명했다.
F.A Challenge Cup 2회 우승 (현재 프리미어리그)
F.A Challenge Cup 득점왕 (현재 프리미어리그)
유러피언 컵 1회 우승 (현재 챔피언스리그, 이 우승은 맨유 사상 유럽무대 첫 우승)
1968 유럽 최우수 선수 수상 (현재 발롱도르상)
'구세주'였다.
불의의 참사로 인해 급격히 무너져가던 명문팀은 북아일랜드의 한 소년에 의해 다시 부활한 것 이다.
이후 그는 11 시즌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으로써 활약했다.
그리고 매트 버스비 감독의 사퇴 이후, 그는 급격히 무너져갔다. 기어이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이다.
결국 그는 맨유를 떠났고, 이후 정착할 팀을 찾지 못하다가 비교적 떨떠름한 은퇴를 했다.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비록 북아일랜드라는 출신으로 인해 월드컵같은 메이저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국가대표에서도 변함없는 실력을 선보이며 북아일랜드의 발전에 기여했다.
북아일랜드의 다른 동료들은 그러한 베스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조지 베스트의 등장은 맨유의 역사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아니었으면 맨유는 어쩌면 지금쯤 프리미어리그팀이 아닌 하부리그의 팀이 돼있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의 등장은 센세이널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맨유는 다시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죽기 전까지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지만 현재도 축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적인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불의의 부상으로 꺾여버린 붉은 날개
스티브 코펠 [Steve Coppell] 1975 ~ 1983
Park can be next Coppell. (박지성은 제 2의 코펠이 될 수 있다) -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 -
그의 축구 경력은 다소 기묘하게 시작된다.
실력은 좋지만 축구선수가 되기에는 너무 작다고 여겨져 그를 받아주는 클럽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축구에 대해 큰 뜻을 품을 때가 아니었고 그는 또한 리버풀 출신이라 리버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3부 리그팀이었던 트란메어 로버스의 눈에 띄어 구단의 도움으로 학위도 받고 학업과 축구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는 곧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었고, 1시즌도 채 못되어
75년 2월, 2부리그에 소속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적 첫 시즌에는 1골만을 기록하며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이후 75/76 시즌에는 리그 전경기에 출전하며 10골을 성공시켰고, 맨유의 1부리그 승격에 큰 일조를 했다.
또 77년에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데뷔하게 되면서 그의 주가는 갈수록 치솟게 된다.
그렇게 무명에서 맨유를 대표하는 7번으로 화려한 인생 역전을 한 코펠은
82년 헝가리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과 남아있는 시즌 경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며
무릎에 문제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경기에 나섰다.
결국 망가질대로 망가진 무릎은 더 이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코펠은 결국
"만일 나이가 든 후에 앉은뱅이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면, 은퇴를 권하겠다" 라는 의사의 말를 듣고
83년 10월,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 코펠의 플레이스타일은 그 당시 클래식 윙어들이 지배하던 축구계에서는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수비 깊숙히서 공을 잡아 공격으로 재빨리 전환해
상대 수비수를 압박하면서 동료들에게 휴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스트라이커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오프 더 볼 플레이를 통해 고립되어 있는 스트라이커의 마크맨을 따돌려주며 스트라이커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역할을 자주 보였다.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일찍이 은퇴를 한 선수지만, 그의 206경기 연속 출장은 아직까지도 클럽의 역사로 기억 되고 있으며,
맨유 역대 7번들 중에 가장 눈에 띄진 않았지만, 그의 열광적인 질주와 끊임없는 헌신은 팬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Captain !! Oh my Captain..!! 맨유의 영원한 주장
브라이언 롭슨 [Bryan Robson] 1981 ~ 1994
"마이 캡틴. 그는 그의 시대의 스티븐 제라드였다. - 데니스 어윈 -
브라이언 롭슨은 당시 2부리그에 있던 WBA에서 축구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20살 무렵이 되서야 팀에서 자리를 잡게 됐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게임 운영능력,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패스를 넣어주는 플레이스타일로
팬, 구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팀의 7번을 배정받았다.
그가 없으면 WBA는 강등권 수준의 팀이 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WBA에서의 활약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던 어느 날,
WBA의 전 감독 론 앳킨슨 감독이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제의가 온다.
그리고 그는 1981년 영국 최다 이적료였던 150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옛 은사 론 앳킨슨 감독이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81년 토트넘과의 리그컵 경기로 맨유에서 정식 데뷔한 롭슨은 첫 시즌 32경기 5골을 넣으며
성공적인 안착을 하게 되고, 83년, 맨유 주장으로서 처음으로 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된다.
그는 주장이 되어서도 자만하지 않으며 팀이 자만에 빠졌을 땐 자만하지 않도록 팀의 정신을 높였고,
경기에 지게 되어 좌절에 빠졌을 땐 직접 나서서 선수들에게 '위닝 멘털리티' 정신을 강조하며,
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86년이 되어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취임하고 하나 둘 주춧돌을 쌓아 올리던 맨유는
롭슨을 중심으로 매 시즌마다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92-93 시즌 무려 26년만에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던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때 롭슨의 나이 35세였다.
그는 맨유에 있던 내내 정신적인 멘토 역할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수행했고,
실력적인 면에서도 그의 중원 조율 능력은 맨유를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는 데 톡톡히 일조했다.
그런 그를 두고 퍼거슨 감독은 항상 매경기 라인업을 짤때마다 그의 이름을 무조건 1순위로 써놓았다.
하지만 그도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롭슨은 리그 우승을 차지 한후 마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는 듯이
급격한 기량 하락세를 보이며 부진했고, 이내 미들즈브러로 이적했다.
브라이언 롭슨은 82년부터 94년까지 무려 12년간 맨유 주장으로써 역대 최장기간 주장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맨유가 2부리그의 쇠락한 클럽에서 잉글랜드 명문 클럽으로 다시금 발돋움 할수 있게 만든 주인공 중 한명으로 회자되고 있다.
영국인이 유일하게 사랑한 프랑스인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1992 ~ 1997
"에릭 칸토나는 특별했고, 그만의 아우라가 있었고,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었다.
그는 훌륭한 인간이자 선수였다.
칸토나는 내가 함께 플레이 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 데이비드 베컴 -
스티브 코펠과 브라이언 롭슨이 7번을 이어받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언론들은 제 2의 조지 베스트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프랑스 출신의 에릭 칸토나는 17세의 나이로 AJ 오세르에서 데뷔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플레이로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자신을 호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프랑스 감독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뱉어내어 국가대표 1년 출장 정지의 중징계를 받았으며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무단이탈하여 3일간 행방불명 되는 등의
특유의 다혈질 성격으로 인해 정착할 팀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기게 되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쫒겨나듯이 님 올림피크라는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지만
여기서도 심판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판에게 축구공을 날리는 사건으로
그는 프랑스 언론과 축구협회로부터 매장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칸토나는 은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칸토나의 탁월한 재능을 아까워하던 미셸 플라티니는 집에서 쉬고 있던 칸토나에게 전화를 걸어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에 진출할 것을 권유하고,
결국 그는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이후 리즈 유나이티드는 칸토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구성,
잉글랜드 진출 첫 시즌만에 리버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는 등 센세이널을 불러일으켰고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칸토나는 당시의 리즈 감독인 하워드 윌킨슨과의 마찰이 있었고,
고민 하던 윌킨슨 감독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와 껌 씹는 소리가 들리는 전화를 받은
윌킨슨 감독은 리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를 120만 파운드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시키게 된다.
맨유에 입성한 칸토나는 적응기간따위는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리그를 호령했고,
또다시 1년도 채 안되어 이번엔 맨유 소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가끔 그의 성격이 나오긴 했지만 퍼거슨 감독은 항상 그의 편에 서서 언론의 뭇매를 같이 맞아줬다.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그의 실력과 아버지 같은 퍼거슨 감독의 존재로
칸토나는 점차 팀에 녹아들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1995년 1월,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상대선수와의 마찰로 인해 레드카드를 받고 벤치로 향하던 중,
그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자신을 야유하는 상대팀 서포터를 본 칸토나는 그동안 참았던 성질머리를 분출하기라도 하듯
상대편 서포터를 향해 "쿵푸 킥"을 날렸고 모든 경기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했다.
이번에야 말로 은퇴를 하겠다고 결심한 칸토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은퇴를 준비한다.
하지만 팀에 도움이 안되고 멘탈이 글러먹은 선수에게는 가차없이 내치기로 유명한 퍼거슨 감독이 직접 나서 칸토나를 옹호했다.
이에 무언가를 느낀 칸토나는 다시 한번 은퇴를 번복하고 팀에 복귀해 한마디를 남겼다.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
그 와중에, 9개월 동안 칸토나가 결장하게 되자 맨유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리그 우승은 블랙번에게, FA컵은 에버튼에게, 차례로 빼앗기며 주춤하게 되었지만
9개월 뒤,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 두 타이틀을 탈환하며 더블을 달성한다.
이후 96 - 97시즌 칸토나는 맨유의 주장이 되었으며,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 되었다.
그러나 승승장구 하던 맨유의 중심이었던 에릭 칸토나는 97년 5월 11일,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떠나고 싶다' 라는 게 이유였다.
퍼거슨 감독은 그의 갑작스런 결정에 당황하며 극구 말렸지만, 그의 강력한 의견에 결국 놓아주게 된다.
이로써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맨유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퇴장을 했다.
그는 맨유 유니폼을 입고 통산 182경기 80골 66 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남겼다.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1993 ~ 2003
"나의 프리킥 비밀은
어렸을 때부터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 과정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 데이비드 베컴 -
조지 베스트 이후 7번 선수들 중 유일하게 맨유 유스 출신 선수로 데뷔했다.
88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토트넘 핫스퍼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제의를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선택, 입단했다.
이후 맨유 유스팀의 일원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92년 5월 잉글랜드 FA 유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마침 경기장을 방문한 퍼거슨 감독의 눈에 들어온다.
이후 베컴은 93년 5월이 되어서 맨유 퍼스트 팀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당시 맨유는 매 시즌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아무리 유스팀에서 날고 기었던 베컴이었다해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있다는 맨유에서
그가 주전을 차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퍼스트 팀 승격 이후, 경기에 결장하는 것이 잦아졌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베컴을 본 퍼거슨 감독도 베컴의 재능이 썩는 데에 아쉬워했다.
결국 94-95 시즌에 베컴은 당시 리그 2 소속이었던 프레스턴이라는 팀으로 임대되었다.
프레스턴은 베컴을 주전 선수로 출전시켜줬고, 이는 그가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프레스턴에서의 경험으로 5경기 2골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임대 2달차가 되던 때에 맨유의 갑작스러운 복귀 요청으로 다시 맨유로 복귀했다.
주전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급히 프레스턴으로 임대가있던 베컴을 불러들였고,
급한대로 그를 오른쪽 윙 플레이어로써 출전시킨다.
베컴은 어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킥력을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잉글랜드 전역에 각인시켰다.
그런 베컴의 활약에 힘입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에 일조했다.
그 이후, 시즌이 끝나자 몇몇 스타 선수들이 이적해버리고, 퍼거슨 감독은 영입 대신 유스 출신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결정,
이에 대해 영국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구단의 유스시스템에 확신에 차 있었다.
베컴 역시 그런 퍼거슨 감독의 신뢰에 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이적시장을 보내고,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베컴을 필두로 맨유는 예상을 뒤엎고 6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베컴을 비롯한 맨유의 유스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자 언론들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거라며 조롱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매 경기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맨유의 아이들, 이른 바 '퍼거슨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맨유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어느 때, 칸토나의 갑작스런 은퇴 결정으로 인해 많은 맨유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베컴에게 7번을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베컴 역시 7번 유니폼을 입고 이곳저곳 누비며 그 신뢰에 보답하며 결국
98-99 시즌 맨유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FA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발탁되어 세트피스, 프리킥, 페널티킥 등으로 수많은 골들을 양산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마데이라 섬의 가난한 울보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사나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Cristiano Ronaldo] 2003 ~ 2009
"데이비드 베컴은 인기만 쫒다 선수생활의 황금기를 놓쳤다.
웨인 루니는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 엄하게 다뤘다.
로이 킨은 야만적이다.
다만 호날두는 내 인생 최고의 선수다.
맨유의 위대한 선수인 긱스와 스콜스도 호날두에 못 미친다.
스포르팅전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큰 희열을 느꼈다.
저 소년과 계약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다. " - 알렉스 퍼거슨 -
현재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 되어 화려한 스타가 된 호날두의 유년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포르투갈 본토에서 조금 떨어진 마데이라 섬 빈민가촌의 막내로 태어난 호날두는
아버지가 알코온 중독, 형은 마약 중독으로 평범한 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호날두의 형,누나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식당일을 했다.
하지만 막내인 호날두만은 학교를 보내고 싶다는 부모님의 뜻으로 학교에 가게 되었고,
학교를 다니며 축구를 처음 접하게 된다.
축구를 할 때만 되면 항상 일찍나와 연습했고, 수업이 끝나면 양말 뭉치와 빈 깡통을 차면서 오로지 축구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축구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며 보낸 결과,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학교 관계자들은 호날두의 부모님에게
더 큰 축구를 배우기 위해 마데이라 섬을 떠나 포르투갈 본토로 갈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부모님은 반대했다.
비록 자식들을 형편이 어려워 훌륭히 키워내진 못했지만, 호날두만큼은 남 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부모님의 마음에서였다.
축구보다는 다른 쪽의 진로를 택하는 게 아들의 성공과 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호날두의 강력한 의지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렸다.
비록 월 70밖에 벌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결국 부모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리스본으로 보냈다.
이제 호날두에게 희망은 축구뿐이었다.
호날두는 반드시 성공해서 지금까지 겪은 모든 아픔들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입단 테스트를 본 팀은 SL 벤피카였다.
하지만 벤피카는 호날두의 키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그를 탈락시켜 버린다.
이어 테스트를 본 팀은 스포르팅 리스본이었고, 재능을 알아본 리스본과 계약. 유스팀에 입단한다.
가족도 없고, 동료도 없는 외로운 타지생활은 힘들었다.
팀 동료들은 호날두가 이상한 사투리를 쓴다며 따돌림을 시켰다.
경기에 출전 해도 따돌림은 계속됐다.
좋은 위치에 있어도 패스를 주지 않았고, 간간히 나오는 기회에선 골을 넣지 못했다.
그때마다 호날두는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잘못을 하여 시설 내의 쓰레기통을 비우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여전히 놀리기 일쑤였고, 쓰레기통을 실은 수레에 '페라리'라고 적고 "부릉부릉"이라며 조롱했다.
"부릉부릉, 야 페라리 지나간다!!"
순간 욱하는 심정으로 받아쳤다.
"계속 짖어라. 나는 언젠간 진짜 페라리 탄다!!"
이후 호날두는 이를 악물고 축구에만 열중했다.
하루 하루 지날때마다 발전하는 그의 플레이에, 무시하던 동료들도 그에게 다가왔고,
어느덧 그는 리스본이 자랑하는 유망주로 성장했다.
1군 승격을 목표로 늘 새벽까지 홀로 남아 양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연습하던 호날두는
15세가 됐을 즈음 축구인생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온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뛴다며 수술을 권하는 한편, 수술을 하지 못하면 축구를 그만 둬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가뜩이나 유년시절에 겪은 가난이 눈에 밟힌 호날두는 고민하지만
스포르팅 구단의 도움과 어머니의 헌신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곧 레이저 수술을 받아 치료하게 된다.
호날두는 주변 사람의 도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U-16, U-17, U-18, 2군을 차례로 거쳐 1군 명단에 포함되었고
이는 불과 1시즌 안에 스포르팅 리스본의 모든 라인업에 등록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활약에 해외 유수의 클럽은 리스본을 방문해 호날두를 체크했고, 관찰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 세계적인 명문 구단 리버풀에서 주목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리버풀의 감독 제라르 울리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호날두를 영입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아직 어리고 1군으로 뛰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후 호날두는 2001년이 되서는 포르투갈 청소년 대표로까지 뽑히며 승승장구 했고,
매 경기마다 발군의 활약으로 일약 세계에서 주목하는 유망주가 된다.
그러던 날, 2003년 맨유와의 친선 경기에 출장하여 맹활약하여 3-1로 승리했다.
경기 이후 맨유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경기에 패배한 것보다 스포르팅의 28번에 대해 계속해서 구단에 문의했고,
결국 맨유는 불과 18세의 스포르팅 28번에게 120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 영입에 성공한다.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 호날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맨유로 오며 스포르팅에서 받는 돈과는 비교도 안될 많은 돈을 벌게 됐고,
그가 맨유 입단서에 사인하고 난 뒤 처음 한 일은 부모님께 통화하는 것 이었다.
"엄마, 이제 더 이상 일 안하셔도 돼요..."
어렸을 적 가난한 형편으로 고작 몇 푼 돈이 없어서 초콜릿 하나 사먹지 못하던 그 울보가,
사실 그렇게 코치들도 고개를 휘저을만큼 연습했던 이유도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그만보고 싶어서 라던.
외로운 타지땅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핍박 받으면서도 묵묵히 길을 가던 그 소년이,
드디어 지금 모든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맨체스터에 도착하자 퍼거슨 감독은 호날두에게 두팔 벌려 환영해주었다.
퍼거슨 감독은 베컴 이적 후 주인 없는 등번호 '7번'을 호날두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호날두는 7번을 달고 잘 뛰어야한다는 압박이 싫어 처음에는 28번을 원했으나,
퍼거슨 감독의 강력한 설득에 의해 역대 맨유의 전설들이 배정받은 '7번'을 배정받게 된다.
볼튼 원더러스전, 후반 60분이 되서 맨유에서의 데뷔전을 가진 호날두는,
이적 첫해부터 퍼거슨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40경기에 나서 6골, 8도움이라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그의 지나치게 개인플레이에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게 비난하는 언론들과 팬들의 압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퍼거슨 감독은 그런 호날두를 위로해주고 감싸줬다.
호날두는 퍼거슨 감독과 가족들의 응원 끝에 매 시즌 무수한 공격포인트를 양산하며,
포르투갈 대표팀에 입성한다.
한편으로는 축구를 하면서 버는 돈을 모두 가족들에게 송금하였고,
형은 마약 중독에서 치료해 페인트공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누나들에게는 명품 부티끄,가수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해주었으며,
어머니도 월 70밖에 못벌던 청소부 일을 그만두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라고 보낸 돈까지도 술에 탕진했다.
호날두가 맨유로 이적해 성공한 후
그제서야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려 아들을 찾아왔지만,
바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매번 문전박대를 했다.
그러던 중 유로 2004 예선을 두고 연습이 한창이던 호날두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한 호날두는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며 아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빨간 모자'였다.
"너를 만나러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산거다.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이제야 주는 구나. 미안하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었고, 호날두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했지만, 경기 일정과 장례식이 겹쳐 어쩔수 없이 대표팀으로 복귀한 호날두에게
동료들은 위로를 건냈다.
이때부터 호날두는 빨간 모자를 자주 쓰게 되었고,
호날두는 유로 2004에서 우승해 꼭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조국 리스본에서 열린 유로 2004 결승전에서
후반 12분, 그리스의 앙겔로스 하리스테아스의 통한의 헤딩골로 1:0으로 지고 만다.
결국 우승컵을 바치고 싶다던 약속은 지킬수 없었다.
조국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조국 패하는 모습에 호날두는 그만 울음이 터졌다.
동료들과 팬들은 그를 위로해주고 같이 아파해주며, 추모했다.
그 후 호날두는 가히 폭발적인 활약을 보인다.
06-07 시즌 53경기 23골 19 어시스트
07-08 시즌 49경기 42골 8 어시스트
08-09 시즌 53경기 26골 9 어시스트
호날두는 도저히 윙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괴물같은 활약으로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결국 1968년 조지 베스트 이후 처음으로 40년 만에 맨유 선수로써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호날두는 2009년 여름 이적시장이 되어서,
맨유에게 9400만 유로라는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안겨주며
새로운 도전을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마데이라섬의 가난한 울보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난 호날두는 그럼에도 항상 겸손했다.
고향 마데이라섬이 홍수로 인해 피해를 겪게되자 고향 사람들에게 애도 세레모니를 하고,
이 후 마데이라 도청에 150억을 기부.
소아암 진단을 받은 9살 소년이 치료비가 부족해 더 이상 진료를 못받게 될 상황에 처하자
시설이 좋은 고급병원으로 옮기고 모든 치료비는 자신이 전액 부담.
경기 도중 수비를 하다가 실수로 공을 잘못 걷어내 관중의 얼굴을 맞추자
경기 종료 후 바로 관중에게 찾아가 사과 후에 자신의 유니폼을 선물 하는 등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사를 또다른 누군가가 되풀이 하지 않토록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 비시즌마다 어린이 병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자기가 가져온 선물을 나눠주고,
이외에도 소말리아, 인도, 암센터, 가자지구 등에 수십억씩 기부하며
기부 활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경기를 잘했다 라고 느끼는 것이 좋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코치와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향상하고, 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배움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나이가 어떻든 배움을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끝내 주인공이 되지 못한 비운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웬 [Michael Owen] 2009 ~ 2013
내가 점수를 따려는 순간 공을 가지게 되면 항상 무언가를 느낀다.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 (이길수 없다면 합류 해라) - 마이클 오웬 -
그는 1979년 12월 14일 에버튼 선수였던 테리 오언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에버튼의 선수였기에 자연스레 에버튼의 팬이 되었고,
7살이 되어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웬의 재능을 알아본 건 리버풀이었고 유스팀에 입단해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유스팀을 이끈다.
입단한 지 얼마 채 되지 않아 가히 초인적인 활약을 보이며 U-17, U-19을 차례로 밟아갔고,
같이 팀을 이끌던 스티븐 제라드보다 이른 나이에 퍼스트 팀에 들어갔으며
퍼스트 팀에서도 연신 맹활약, 18살이라는 나이에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합류한다.
조별예선에서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오웬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 교체 출전,
수많은 구름관중이 보는 앞에서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원더보이가 나타났다 !!"
전국의 영국 언론은 불과 18살의 어린 선수에게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보냈다.
이때부터 그는 '원더보이' 마이클 오웬이라 불렸고, 세계의 수많은 축구팬들은 그의 행보에 집중했다.
이런 엄청난 관심에 그는 어린나이임에도 굉장히 침착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퍼스트 팀 2년차가 되어서야 풀타임 플레이어가 되었고
97-98 시즌에 36경기 18골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남기며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이 기록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연소 득점왕 기록이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음시즌이었던 98-99 시즌에도 40경기 23골을 퍼부으며
데뷔 3년만에 2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며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밀리지 않는 몸싸움,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박스 침투, 탁월한 골결정력을 통해
00-01 시즌, 46경기 24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의 미니트레블(UEFA컵+FA컵+칼링컵)에 크나큰 일조를 하였고
결국 21살의 나이로 UEFA 발롱도르상을 수상한다.
그 후 03-04시즌까지 리버풀에서 뛰면서 매 시즌 2경기당 1골 이상의 초인적인 득점력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메이저급 우승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갈망했던 오웬이 비해 리버풀은 항상 문턱에서 좌절하기 일쑤였고
결국 그는 04-05 시즌 8m 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액수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오웬이 이적한 바로 그 시즌에
리버풀은 결승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오웬의 타지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오웬의 경쟁상대들은 호나우두, 라울과 같은 '갈락티코의 멤버'들 이었고,
결국 오웬은 간간히 후반 교체 출전으로만 그치며 결국 코파델레이에서는 '로스터 명단 제외'라는 굴욕적인 일을 당하며
호기롭게 입성한 마드리드 생활은 불과 1년만에 36경기 13골이라는 성적을 남긴 채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한다.
그가 새로이 입단한 팀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그의 이적료 18m은 뉴캐슬이 가지고 있던 앨런 시어러(16m)의 최다 이적료를 뛰어넘었고,
주급 역시 그 당시 전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1억 9천을 수령하게 되었다.
다시금 부활을 꿈꾸던 오웬이었지만 무릎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화려했으나, 무릎에 너무 많은 무리를 주는 것이 원인이었다.
한번 망가진 무릎은 계속해서 망가져갔고, 결국 뉴캐슬에 있던 4시즌동안 79경기 30골이라는 초라한 성적과 함께
'먹튀'라는 소리를 들으며 팀에서 방출되었다.
팀에서 방출되어 새로운 팀을 물색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화려한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그의 가치를 주목하는 팀은 없었고
기어이 오웬은 본인을 홍보하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개인훈련 영상을 유투브에 올리는 등 과거에 '원더보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를 열광케하던 그 선수 맞는지 의문일 정도로 굴욕적인 일들을 하면서까지 이적할 팀을 찾았다.
.....
그러던 중, 계약 제의가 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알렉스 퍼거슨은 같이 점심이나 한끼 먹자며 그를 불렀고, 화려했던 리버풀 시절을 떠올리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오웬이 최대의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은 리버풀은 분노했고
영국 언론은 오웬은 희대의 배신자, '유다' 라는 격한 표현을 쓰면서까지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오웬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로지 떨어질대로 떨어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입증하고 싶어했고,
세계 최고의 명문팀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퍼거슨 감독 역시 오웬에게 7번을 배정해주며 그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는 예전의 플레이로는 자신의 무릎이 버텨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제 엄청난 순간 스피드, 호쾌한 드리블링은 없지만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이용한 공간 침투와 문전에서의 정확한 골 결정력을 이용해 플레이스타일을 바꿔나갔다.
비록 이번에도 주전은 아니었지만 다시금 자신이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나갔다.
그는 주로 루니, 베르바토프에 이어 써드 스트라이커로써 팀의 조커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2009년 맨체스터 시티와의 리그 6라운드가 있던 날,
맨유가 1골 넣으면 맨시티가 곧장 1골을 넣었다.
후반 85분, 맨유가 3-2로 리드하고 있었지만 맨시티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퍼거슨 감독은 마이클 오웬을 투입했다.
하지만 경기 막판에 투입되어 그런지 별다른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그러던 중 90분 맨시티의 크레이그 벨라미의 통한의 동점골이 터지며
올드 트래포드의 관중들은 실의에 빠졌고, 스코어는 3-3이 되며 모두는 비기는 경기라며 관중들은 하나 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후반 95분,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환상적인 버저비터 결승골을 넣은 오웬은 다시금 부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09-10 칼링컵 결승전에서 무릎 부상이 재발했다.
이로 인해 그의 월드컵 복귀는 무산되었고
그 와중에 치바스 과달라하라에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영입되었다.
긴 재활을 마치고 다시 팀에 복귀했지만 더이상 그는 써드 스트라이커도 아니었다.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자신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빠른발과 위치선정, 골 결정력을 보여주며
유나이티드의 세번째 옵션이 되었고
결국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오웬은 맨유에서 49경기 19골의 기록을 남기며 조용히 퇴장했다.
7번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에콰도르 흑표범
안토니오 발렌시아 [Antonio Valencia] 2009 ~ [ing]
"발렌시아는 굉장히 저평가 된 선수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묵묵히 절정의 컨디션을 보여주며,
우리가 그에게 볼을 전달해주면 그는 그라운드를 누비며 기회를 만들어준다.
발렌시아의 활약은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상대에게는 악몽과 같을 것이다" - 마이클 캐릭 -
2003년 에콰도르 CD 엘 나시오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발렌시아는
발군의 활약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스페인 비야레알의 눈에 띄었고, 곧 영입된다.
하지만 2경기 채 경기에 나선 후 갑작스럽게 레크레아티보로 임대를 가게 되었고,
레크레아티보 역시 발렌시아를 주전이 아닌 후반 교체 출전용으로 쓰면서
조용히 임대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시 돌아왔지만 비야레알은 발렌시아를 '잘못된 영입'으로 치부했고
결국 그는 위건 애슬래틱으로 2년간 임대로 떠나게 된다.
프리미어리그로 오자 발렌시아의 기량은 서서히 발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위건은 그런 발렌시아에게 주전을 보장해주며 신뢰를 보였고,
발렌시아 역시 그런 신뢰에 보답하듯 팀의 오른쪽을 책임지며 적응해 나갔다.
2008년이 되서 위건은 발렌시아를 비야레알에게서 완전 영입 했고,
영입된 발렌시아는 임대생 시절보다 더 성숙된 기량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결국 영입 된지 1시즌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발렌시아에 접근했고,
2009년 7월 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25번 유니폼을 배정받은 발렌시아는 맨유 입성 첫해부터 7골 12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맨유에서의 안착에 성공한다.
토탈 풋볼을 외치는 현 축구계에서는 보기 드문 클래식 윙어의 플레이스타일이면서
공을 잡은 뒤 측면을 따라서 광속 드리블 이후 수비수를 제치고 날리는 날카로운 크로스
이른바 '툭-툭-탁' 을 창조하는 등 연일 맹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세간에서는 단순하게 보일 정도로 너무 뻔히 패턴이 보인다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이야말로 자신이 제일 자랑하는 강력한 무기였고,
상대 팀 수비수들은 그런 그의 단순한 패턴을 알고 있음에도 막지 못한다.
또한 그는 공격에서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멀티 플레이어로써의 가치도 보였다.
묵묵히 맨유의 플레이어로써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던 2010-11 시즌
첼시와의 커뮤니티 실드전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한 것과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던 애슐리 콜과의 대결에서도
기죽지 않는 플레이를 선보인 발렌시아를 본 팬들은 이번 시즌이 발렌시아의 전성기 시즌이 될 것이다 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몇달 후, 레인저스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끔찍한 발목 골절 부상을 당하게 된다.
시즌 막판이 되어서야 다시 복귀한 발렌시아는 한참 좋은 폼을 보여주다 당한 부상이라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됐지만 복귀하자마자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은 주전 선수였던 나니를 밀어내고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선발 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1-12이 되서는 수비진들이 줄부상을 당하자 오른쪽 풀백으로 기용되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수비진이 복귀하자 다시 윙어로 복귀, 매 경기 출전할때마다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며
명실상부 맨유의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였다.
시즌 중반이 되서는 맨유에 전념하겠다며 자신의 에이전트를 해고했다.
하지만 유로파리그 32강 아약스와의 경기에서 역습 도중 햄스트링에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맨유는 16강 아틀레틱 빌바오전에서 그의 부재를 절감하며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시즌 후반기에 다시금 복귀한 발렌시아는 사실상 적수가 없는 파괴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오른쪽 + 발렌시아를 합친 '발른쪽'이라는 신조어를 탄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12-13시즌이 되어 퍼거슨 감독은 발렌시아를 불러 등번호 교체를 권유했다.
7번이었다.
발렌시아는 극구 사양했지만 퍼거슨 감독의 기나긴 설득으로 결국 7번을 배정받는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7번을 단 이후로 눈에 띄게 경기력이 급하락했다.
이유는 허리 부상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발렌시아가 지금까지 허리에 통증이 있었지만
팀 성적을 위해 그 동안 참고 뛰고 있었으며, 결국 이제와서야 곪았던 것이 터진거라 설명했다.
발렌시아 본인 역시 허리 부상을 언급하며 동시에 7번에 대한 부담감을 설명했다.
결국 시즌이 끝날때까지 예전의 폭발적인 질주와 호쾌한 드리블은 볼 수 없었고
그 다음 시즌인 13-14이 시작하기 전, 7번에서 25번으로 다시 등번호를 바꿨다.
이후 그는 눈에 띄게 기량이 쇠퇴해졌고, 그의 부진이 시작됨과 동시에 맨유는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2014년 5월 12일, 13-14 시즌도 종료됐다.
결과는 참담했다.
리그 7위. 19승 7무 12패 64득점 43실점. 승점 64
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작년과 비교해서 너무도 초라한 성적표였다.
불과 전 시즌까지만 해도 우승을 차지했던 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지금 맨유는 위기에 빠져있다
맨유에 '7'이 가지는 영향은 정말 지대하다
언제나 팀이 위기에 빠졌을때 나타나던 7번...
맨유는 '7'을 기다리고 있다
부족하기만 한 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출처 - 엔하위키 검색함/위키백과 검색함/구글링 하면서 이곳저곳 블로그.. ㄳㄳ..
첫댓글 정말 잘읽었습니다^^ 맨유팬으로서 공석인 7번과 또 9번이 이번 여름이적시장을 통해 채워지길 응원하고 희망합니다
호날두 진짜 내생에 최고의 선수,,,
와 정독했어요 너무 좋은글 감사합니다ㅠ
읽으면서 몇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ㄷㄷㄷ
잘읽엇어요 ^^
최고! 정독했어요~ 이런글 감사해요!
잘 읽었어용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적시장에서 과연 7번의계보를 누가 이어갈지 궁금하네요 ㅋㅋ
이런 글 좋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맨유 7번
좋은글이네요 호날두보고 감동먹음
잘 보고 갑니다 ^^
정말 좋은글잘읽았습니다
최근에 가장 7번에 어울릴만한 선수 누가있을까요?..현실적인 영입대상리스트중에
@제대가안보여 크로스나 뮐러도 7번
날두 빨간 모자 쓴 거 보고 패션테러라며 욕했던 저를 반성해 봅니다 흑
베컴, 호날두 플레이를 봐왔던것이 너무 좋다.
저도 이 생각 7번이 없는게..
빨간모자가 패션에 안어울려서 이상하다고 했던걸 반성해야것네요.. 단연 호날두가 최고인듯
좋은글이네요 ㅎ
7번의 압박이 장난 아닐 듯 한데 과연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지...
7.....
7번 꼭 나타나라!!
최고의 글이였습니다...
호날두 7번 뭉클하네요.. 저같아도 매일 쓰고 다닐듯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야누자이가 번쩍였지만..
잘봤습니다:')
호사모님 게시글 정말 잘봤는데 이브금말고 수정전에 브금 제목좀 알수있을까요 ?
Reunion 이라는 곡이구요.. 정식노래는 아니고...
오투매니아 BMS 중의 한 곡입니다...ㅋ
글에다가 노래파일 첨부해놨으니 다운받으셔도됩니다~
@호사모 얍 !! 감사합니다
기가 막힌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호날두 ㅠㅠ
정말 잘봤습니다.
맨유팬이아닌데도 집중할만큼 재밌고 흥미롭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정성 있고 정말 알찬 글이네요ㅠㅠㅠㅠ 잘 봤어요!!
ㅇ 맨유의 7번
와 ㅠㅠ 잘 봤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