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朴正熙 대통령각하!
[ 세월이 흐른 다음에 훌륭함을 알았습니다 ]
유행을 무시한 대통령
월간조선
1974년 9월 30일은 추석이자
朴대통령의 57세 생일로 알려진 날이었다.
朴대통령은 1917년 음력 9월 30일에
태어났는데 양력 9월 30일로 잘못 알려져
이 날이 생일로 치러져왔었다.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결벽증을 보일 정도로 무심했던 朴대통령은
1976년에 들어와서 생일을 11월 14일로 고쳐 지냈다.
한 장관이
"각하의 9월 30일 日辰과 사주가 매우 좋습니다"라면서
장황하게 풀이를 해도 그냥 들어주는 것이었다.
이즘 朴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골프를 즐기는 것만 빼고는 거의 서민생활 수준이었다.
그는 유행에 둔감했다기보다는 아예 무시했다.
양복을 새로 지어 입기를 싫어해
바지의 허리를 늘리는 수선을 자주했다.
넥타이도 헌 것을 좋아했다.
20여년 전 결혼 선물로 받았던 시계를
그냥 차고 다니는가 하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성냥은
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성냥알이 없어지면 큰 통에서
새로 담아 계속 쓴 결과였다.
수영복도 몇 년째 바꾸지 않았다.
복장과 예의범절에 있어서의 보수성은
서민성의 한 표현이었다.
민족사상 가장 큰 근대화 개혁을 한 사람이
복장과 예절에선 보수적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朴대통령이 어린 시절 존경했던
나폴레옹도 그랬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담백한 한식을 좋아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칼국수나 물김치 냉면,
갈비탕, 곰탕을 즐겼다.
갈비탕이 나오면 고기는 물론이고 갈비뼈까지
손으로 쥐고 뼛속 진액까지 빨아먹었다.
陸여사가 곁에서 사라진 뒤 朴대통령은
피아노 대신 단소를 자주 불었다.
1층 집무실에서 2층 내실로 퇴근한 朴대통령은
일부러 전등을 끈 뒤에 哀調(애조) 띤 가락을
단소로 뱉어내었다.
당직자들이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슬픈 가락이었다고 한다.
1974년 10월 1일 朴대통령은 제26회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딸 槿惠씨를 데리고 갔다.
아내가 앉던 자리에 딸이 앉게 되었다.
이는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일이 된다.
다음날은 陸英修 여사 사망 49齊 날이었다.
12시 30분부터 1시간 8분간 朴대통령은
22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이 자리에도 槿惠씨가 참석했다.
朴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오는 위로편지의 대부분이
서민층이고 그 가운데 7할이 부녀자들의 편지이다.
편지를 읽노라면 생전에 이 사람이 이런 일도 했나 하고
느낄 때도 있다"고 말했다.
10월 9일 朴대통령은 申稙秀 정보부장과
車智澈 경호실장을 데리고 뉴코리아 골프장에 나갔다.
아내를 잃은 뒤 처음 치는 골프였다.
춘삼월 묘소 - 1951년 4월 25일 ―
벚꽂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수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복숭아꽂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리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날에 때가는 줄 모르도다.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우리도 노를저어 누벼 볼까나....
☆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 1952년 7월 2일 밤 ―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와라.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 1976년 8월 5일 ―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멀리 수평선에 휜구름이 뭉개 떠
불현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속에서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건너 섬쪽으로 날아간다.
비몽(非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 비오는 저도의 오후
― 1976년 8월 6일 ―
비가 내린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단비가
바람도 거칠어졌다.
매미소리도 멎어지고 청개구리소리 요란하다.
검푸른 저 바다에는 고깃배들이 귀로를 재촉하고
갈매기들도 제집을 찾아 날아간다.
객사 창가에 홀로 앉아 저멀리 섬들을 바라보며
음반을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명상속에
지난날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이 정처없이 비오는
저바다 저하늘을
언제까지나 헤매어 보았도다.
☆ 한송이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 1974년 8월 20일 ―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아래
붉게 핀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 1974년 9월 4일(수) ―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 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수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 당신이 그리우면
―19 74년 9월 30일 ―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는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애.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왔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 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
☆ 추억의 흰 목련 ― 遺芳千秋 ―
― 1974년 8월 31일 밤 ―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구하리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하는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 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가면
다시 못 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단란한 가족 >
☆ 故 朴正熙 대통령 지나고 보니 존경합니다.
그 당시 어려웠던시절 강한의지가 아니었드라면
오늘의 발전이...
또 역대 대통령으로서 사심없이
오직 우리나라를 위했다는 것에 존경합니다.☆
| | | | |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 |
故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인간 면모
국립현충원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
1.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제작하던
주식회사 태흥 사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이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 코트 제작을
의뢰받은 주식회사 태흥의 權泰興(권태흥) 사장은 방한 바지를 함께 제작, 무료로 납품 했다.
이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감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朴(박)대통령은 버스
안내양들을 어린 나이에 가정형편이 불행하여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라고 썼다.
버스 안내양들의 입장을 이보다 더 가슴깊이 사무치게 대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급 노동자의 삶을 대통령이 챙기는 이런 모습이 當代(당대)엔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 지지 않았다.
홀아비가 된 朴(박)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권력의 장막이 이를 막고 있었고 밖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는 야당과 재야 인사 들의 외침에 가려져 있었다.
朴대통령이 權泰興 사장에게 버스 안내양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시하는 문장들마다 마치 대통령이
안내양을 친딸처럼 여기는 마음씨가 곳곳에 배어있다.
(편지 원문)
時下酷寒之節(시하혹한지절)
貴體健安(귀체건안)하심을 仰賀且祝(앙하차축)하나이다.
昨年(작년) 年末(년말)과 今般(금반) 舊正(구정)에 際(제)하여 서울과 全國(전국) 에서
勤務(근무) 하는 뻐쓰 案內孃(안내양)들을 위하여 따뜻하고 品位(품위)있는 防寒(방한)코드와
바지를 製造(제조)하여주시고 特(특)히 바지는 貴社(귀사)에서 無料(무료)로 膳賜(선사)까지
하여 주셔서 感謝不已(감사불이)하는 바입니다.
어린 나이에 家庭形便(가정형편)이 不許(불허)하여 上級學校(상급학교)에 進學(진학)도 못하고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國民(국민)들에게 奉仕(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들에게 조고마한 선물 하나씩을 보내어 그들의 勞苦(로고)를 慰勞(위로)하고 激勵(격려)
할까 하는 뜻에서 貴社(귀사)에게 付託(부탁)을 하였든 것인데 貴下(귀하)께서 그 趣旨(취지)를
忖度(촌탁)하시고 誠心(성심)껏 協調(협조)하여 주신 데 대하여 眞心 (진심)으로 感謝(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 物品(물품)을 받는 案內孃(안내양)들도 이것을 알게 되면 眞心(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보다
더 誠實(성실)한 마음가짐으로 自己(자기)들이 맡은 일에 誠心誠意(성심성의) 熱心(열심)히 일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感謝(감사)를 드리며 貴社(귀사)의 더욱 隆昌(융창)과 發展(발전)이
있기를 祈願(기원)합 니다.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敬具(경구)
글쓴이 신은숙(sys6602) [퍼온글임]
2. 아랫사람에게 담뱃불 켜 줘, 침실에는 효자손 두고 등긁어
박대통령은 가끔 청와대 식구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를 마실 때 옆자리 사람이 잔을 오래 놓아 두면 손수 젓가락을 저어 주면서 마시라고
권유했다. 박대통령은 담배를 권하고 손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준 대통령으로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박대통령의 침실에는 검도용 목도, 헬스용 자전거, 철봉, 칼빈총 등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등을
긁을 수 있는 '효자손'이 있었다.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의 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할을 할 육영수 여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근혜씨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했지만 잠자리에서 등을 긁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나무로 된 효자 손이 침대를 지켰던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가 있었다.
만년의 벗 “방울이”
박대통령의 말년, 특히 부인 육영수 여사의 돌연한 죽음 이후는 쓸쓸함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대통령은 늦은 밤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의 곁에서 쓸쓸함을 지켜 준 것은 '방울이'라는 강아지였다.
이런 쓸쓸함을 떨치기 위해 배드민턴, 줄넘기, 턱걸이, 철봉, 물구나무서기 등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도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측근들의 눈에 비친 박대통령은 소탈하고, 정감이 넘치는 할아버지였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영도자였다. 혁명 이후 20년간 자신의 혁명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제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고, 독재자로 불리면서
지켜온 권좌에서 물러설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역사는 10월 26일에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 집무실을 정리하러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달력은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 장씩 뜯겨지던 달력이
그렇게 멈춰 있는 것을 보고, 청와대 식구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달력을 아주 소중한 유품중에 하나로 보관하고 있다. 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는
그 날 그렇게 멈추었지만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까닭에서다.
3. 박정희와 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술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朴(박)대통령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85년 4월호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기사에서 朴(박)대통령의 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 수록해본다.
...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 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박대통령 주량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74년 이후부터는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
4. 박정희의 헤진 혁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
1979년10월26일 저녁 경복궁 앞 국군병원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지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에서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헤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5. 박정희와 정조(正祖)
개인의 응어리 민족차원서 푼 초인(超人)
"책을 놓지 않았던 유교적 교양인.." 추진력은 골돌한 사색에서...
1979년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칠 때 국립 교향악단이 연주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낮은 음에서 시작되어 고음으로 치다른 뒤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사라지는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곡처럼 박정희는 토종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초인(짜라투스트라)처럼 살다가 영웅에 어울리는 최후를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이 니체의 책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영웅이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새로운 시대를 빚어내는 용광로이다.
그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살 순간에도 "난 괜찮아".
니체가 말한대로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청탁을 함께 쓸어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부패했으나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도 끝까지 맑은 혼을 유지하였다.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그가 인용하여 실은 시의 한
구절은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였다.
그는 이 시를 인용한 뒤에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고 덧붙였다. 이 책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고 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는 곁에 있었던 두여인의 일치된 증언이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 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육영수는 선을 볼 때 박정희가 구두 끈을 푸는 뒷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은 앞 모습은 꾸밀 수가 있지만 뒷모습은 꾸밀 수가 없다. 뒷모습이야말로 그 인간의
참 얼굴일 것이다. 총알이 허파를 꿰뚫고 지나간 뒤에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 그의 뒷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 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 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 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 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 될 생명'이 태어났고 이 인물에 의하여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으니 운명적이란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까지, 그리고 인생의 골짜기까지 떨어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탄로가 나서 전기고문을 받는 가혹한 수사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아낀 많은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생환했다. 그때 동거하던 이 모 여인은
가출하여 그를 버렸고 피난 중 부산의 어느 술집에서 이상한 관계로 재회했다.
마음은 여리지만 간은 컸던 사람.
박정희는 실연과 가난과 그에 따른 인간적 수모, 식민지 생활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이 응어리로 해서 그는 미국에 도전하는 엄청난 오기를 부릴 수 있었다.
타고난 반골인 그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한 다음,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소심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타며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와 선을 보러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총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그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렸다. 그는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유교적 교양인이기도 했다.
정확한 용어 선택과 늘 핵심을 찌르는 그의 말은 박정희가 1급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추진력은 골똘한 사색에서 나왔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인 성취의 바탕이 되었던 이 정신력을 간과하고는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 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영웅으로 죽게 만든 김재규는 저승에서 박정희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지 누가 아는가.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김태환 "구미가 뭉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 논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89회째 생일을 맞아 박정희 전 대통령을 회상하는 행사를 잇따라 갖고 지지자 결집에 나섰다. 박 전 대표는 14일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해 3천여명의 참석자가 모인 가운데 "국민의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자신감을 되찾아 선진강국의 불꽃을 다시 살려야 한다"며 "저 역시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89회째 생일(1917년 11월 14일)이고 오는 29일은 육영수 여사의 생일. 박 전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생일 행사에 해마다 참석했으나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 두 차례 참석하지 못했다가 3년 만에 다시 참석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숭모제 유족대표 인사말에서 "아버지를 잊지 않고 찾아온 분들을 뵈며 아버지가 사심없이 일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많은 것을 남겨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아버지는 나라가 가난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하고 가난을 몰아내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는데 후손에겐 가난의 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이 이곳에 있다"고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강조했다. 박 전대표는 "요즘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이 많을 것"이라며 "국민들이 희망,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데 지금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아버지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각해 본다. 확고한 국가관으로 나라를 되살릴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남유진 구미시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님'이라고 지칭하며 "저는 님을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생각했다"며 "은혜의 10분의 1이라도 보답하겠다. 님의 거룩한 생애와 위대한 뜻을 가슴에 새기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 역시 "5천년 가난의 한을 끊고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해 준 박정희 각하의 영전을 함께 한 여러분들이 소망이고, 이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으리란 것을 확인했다"며 "각하께서 애지중지하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숭모제에서 잔을 올렸고, (박 전대표는) 우리 간절한 소망의 한 단편"이라고 우회적으로 박 전대표 지지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김태환 한나라당 의원은 "현재 박근혜 전 대표가 큰 일을 도모하고 있다"며 "박 전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위업을 잘 받들고 나라를 구할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여론을 보면 북핵문제와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 등으로 나라가 어렵다 하니 '여성이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고 우회적으로 박 전대표 지지율 하락을 지적한 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것을 막았고, 사학법도 장외투쟁을 하면서 막고 있듯 박 전대표는 원칙과 신념, 고집을 갖고 투쟁하신 분이다.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격려박수 부탁드린다. 구미가 뭉치지 않고야 누가 하겠나"라고 지역주의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태환, 이인기,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 등 현역의원들과 대한민국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임), 정수회 회원, 구미 시민 등 3천여명의 참석자들이 모여 행사장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편 박 전 대표는 숭모제가 끝나자마자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구미시 박정희 체육관으로 이동, 대한민국 정수미술-서예, 문인화-사진대전 행사장에 참석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화두로 한 행사를 이어갔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도 "대한민국 정수대전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과거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을 화폭에 담고, 달리는 차에서도 스케치를 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서예에 심취하신 아버지와 자수를 하셨던 어머니가 문화를 즐기면서 사랑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 |
첫댓글 우리들의 마음에는 영원한 국부와 영원한 국모로 남아 있습니다. 영원히 우째 저격을 당하시어 마음이 애처롭습니다.
그럽고 아름다운 지나간 추억 가슴이 찡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료 많이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진짜 찡...........하네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