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명 유래
□ 1호선
청량리 청량리는 청량1동 61번지에 있는 사찰 청량사와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찍부터 도성사람들의 성외 피서 및 교외로 나가던곳이며 이때부터 청량동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제기동 제기동은 조선6대 왕인 성종이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이마을에 친경대를 만들고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 라는 데에서 동명의 기원을 두고 있다.
신설동 신설동은조선중기 동부 숭신방(성외)에 새로 설치된 마을이므로 신설계좌 한테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즉 영조 27년(1751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신설계가 나타나고 있다.
동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의 하나이다. 보물 제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에 세워졌지만조선말 고종때에완전히 해체하여바닥을 높인 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문을 특별히옹성으로 쌓은 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종로5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로3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각 종각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었는데 보신각이라는 편액을달면서 보신각으로 유래하였고, 현재는 종각이라고시민들에게 널리알려져 있다. 3.1절, 광복절, 새해를 알리는제야에 종을 쳐 우리에게희망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시청 시청역에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맞던태평관의 이름을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역 광무4년(1900년)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철도의 대표적인역으로 주요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 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 2호선
시청 시청역에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따서 붙인 것이다. 명(明)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을지로입구 을지로입구역은 우리나라의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우던 이길은 1941년부터 황금정으로 고친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을지로입구로 명명되었다
을지로3가 을지로3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적도 있다. 옛날 이길은 종로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을지로4가 을지로4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고친적 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인4가에 위치하기에 을지로 4가역으로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역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 졌다. 원래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장병들의 선발과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다.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방후에는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신당 신당동은 조선시대 신당리계(新堂里契)에서 비롯된 동명으로신당(新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가지고 있다. 신당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집을 말한다. 이일대에는 신당을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
상왕십리 상왕십리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 전해오고 있다. 왕십리 윗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왕십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송도의 고려 도읍지를 옮기고자 당시 무학대사에게 도읍지 를 찾아보라고 명하여 무학대사는 도읍지를 찾아 남으로 내려와 왕십리에서 지형을 살피던 중 때마침 도선대사의 변신인 노인이 "십리"를 더가서 도읍지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아 그 노인 의 말대로 현재의 왕십리에서 10리를 더가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는데 그뒤부터 무학 대사가 10리를 더갔다하여 왕십리라 불렀다함.
한양대 행당동의 동명은 갑오개혁(1894년)때부터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의 행당국민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은행나무가 많이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동명이생겼다고 한다. 인근에 한양대학교가 있어 한양대로 명명하였다.
뚝섬 성수동의지명은 한성부(漢城腐)때살꽃이들이라고 고지도(古地圖)에나타났다. 뚝섬이라 불리어오던 이곳은 옛부터 독도, 살꽃이벌이라 불리어졌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흐르고,북쪽은 중량천이서쪽에서 흐르는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중앙으로 형성되어 졌다
성수 전래에 의하면 성수라는 이름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또한마을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가 있었으며 이곳에 성덕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 정자에서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마시며풍류를 읊으며 노닐었다는 성스러운 물 즉聖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대입구 화양동의 동(洞)명은 70년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정자가 세워진 때는 세종14년(1432년)인데 이때부터 전해 내려오며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있어서 건대입구역으로 명명되었다.
구의(광진구청) 구의동의동명은 1914년 4월1일 경기도 양주군의 아홉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구정동이라 불리던 구정동과 산의동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구'자와 '의'자를 따서 구의동이 된것이다.
강변 (동서울터미널) 강변역은한강제방 축조시조성된 공한지 위에 세워진 역사로써 삼환기업(주)이 1978년 3월9일에 착공하여 2년 7개월 22일에걸친 공사끝에 1980년 10월 31일을 기하여 영업개시하게 되었으며 한강변에 위치한다하여 "강변역"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성내 송파구 신천동 1번지에 위치한 성내역은 역사 인근을 흐르는 성내천의 이름을 따서 성내역으로 명명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잠실(송파구청) 잠실은 조선초에 이곳에 잠실을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신천 신천역은 행정구역이 변경되기전에 신천동의 이름을따서 명명되었으며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하고 있다.
종합운동장 종합운동장역은 인근에 주경기장과실내체육관, 야구장, 수영장, 학생체육관등이 있어종합운동장역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송파구 잠실1동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무역센터)
삼성동은 신라성왕 10년(794년)에 창건된 사찰인 봉은사, 삼성동동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남쪽에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와무릉도,당나무를 파는 상점이 많은 닥점의 세마을이 합하여져 지어진 명칭이다.
선릉 선정릉은 삼성동 135-4번지 65만평 부지에 조선제9대 성종과 계비정현왕후 윤씨의능인 선릉과 제11대 중종을모신 정릉이 있어 흔히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능의 봉분이 세곳에 따로떨어져 있다하여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역삼 역촌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상방하교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역삼리라 하였고, 도시개발및 인구증가로 역삼동이 되었다.
강남 역삼동은역촌(驛村)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 상방하교를 병합하여 역삼리 (驛三里)라 하였고 그 뜻을 따서 동리명칭으로 삼았다. 강남역은 강남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 으로 명명되었다.
교대 (법원·검찰청) 교대역은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이 역이 위치한 瑞草洞은 예전에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또한 법원, 검찰청이 있어 병기하여 부르고 있다.
서초 서초역이위치한 정곡(鄭谷)과 왕촌(王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방배 방배동 동명의 유래는 관악구와 서초구와의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라 한데서 유래한다. 또 일설에는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방배동으로불리어 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사당 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곳 관악산기슭에는 사적 제247호로 지정된 백제 요지가 있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한강변의 백제 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낙성대 고려시대의 공신 강감찬장군의 출생지로 큰별이 떨어지던날 밤 태어났다는 전설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낙성대라 칭하였다.
서울대입구(관악구청) 봉천동(奉天洞)은이 지역이 관악산 근처의마을로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것이다. 경기도 시흥군동면 봉천리였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불리웠다. 인근에 서울대학교와 관악구청이 있어 서울대입구(관악구청)역으로 명명되었다.
봉천 봉천동(奉天洞)은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 이름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였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하였다
신림 지금의 신림4거리 일대는 옛날 '서원말'이 있던 마을로 서원말의 유래는 이곳에 서원정이라 는 정자가 있어 강감찬장군이 송도9개성을 왕래할때 자주 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 하였다. 지금의 신림동은 본시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 있다가 1911년 4월 27일 경기도의 관내 동,리 통폐합의 신림리로 통합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신림동이 되었다.
신대방 신대방동은 360년전에 '높은절'과 번뎅이(번당리라고하는데 낙천군과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 연못이 있던곳)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로 편입되 면서 당시의 신갈리와 번대방리를 합하여 신대방으로 하였다.
구로공단 구로동은 옛부터 불리어오던 동명으로 나이많은 노인9명이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인접하고 있어 구로공단역으로 명명되었다.
대림(구로구청) 1949. 8. 13 대통령령 159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편입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구로 리, 도림리, 전대방리를 편입, 구로동, 신대방동, 신도림동등으로 명칭변경 신대방동의 '대' 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하였고 1984. 5. 22 2호선 서측간 개통에 따라 대림역으로 명하였다.
신도림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래 문래동은 광복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하였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등이 들어서 자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영등포구청 당산동은 이마을 언덕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마을 한가운데 에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영등포구청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영등포구청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당산 당산동은 이마을언덕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합정 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보통 양화도로 호칭한다. 조개우물로 불리워지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홍대입구 동교동이란 동명은 세교라는 이름이 '잔다리'라고 하는데서 생겼으며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윗잔다리'라고 불렸던 것인데 인근에 홍익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홍익대학교로 명명되었다.
신촌(지하) 신촌동의 명칭은처음 '새터말'이라고 부르던 곳인데 육전소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 신촌리 계가 나타났다. 이곳은 조선초기에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을 때 모악을 주산으로 해서 이곳을 서울로 삼자는 주장과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몸소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고 한다.
이대 대흥동은 독은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리워 지던지방이었다. 1936년 4월 경성부의 지역을 확대하면서 대흥정으로 되니 이것이 대흥 이라는동명의 시초가 되었다. 인근에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이대역으로 명명되었다.
아현 아현동은 조선 고종 31년 갑오경장때부터 기록으로 전해오며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을 잇는 이 고개가 작기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兒)가 아(阿)로 변하여 아현(阿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충정로(경기대입구) 충정로란 지명은순국열사 중 최초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이름을 영원히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충정로는 1946년 10월 11일부터부르게 된 동명이다.
용답 용답동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동 지역 일부가1975년 10월1일에 통합되어 이루어졌기때문에 머리글자인 용·답을 따서용답동이 되었다.
신답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림천 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設)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천구청 양천 옛지명은 제차파의(구멍바위)로 서부한강변 가양동에 있는 암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충선왕2년에 비로서 양천(陽川)이라는 지명이 명명되어 작은 암초의 땅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신정네거리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機:신트리)의 '신'(新)자와 은행정의 '정'(亭)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오금리, 단산, 충청촌, 신기리, 은행정리등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 면 은행리와 신시리로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