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포커스뉴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새벽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경찰이 그를 연행한 이유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박군의 고교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오전 10시 40분경부터 9호 조사실로 장소를 옮겨 박종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조사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묶은 채 그의 머리를 욕조 안에 집어넣으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다. 수차례 물고문 끝에 박종철은 오전 11시 20분경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대외적으로 사건을 비밀에 붙인 채 가족들에게만 통보하고 사건을 가급적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추적 끝에 15일 오후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짤막한 2단기사가 사회면에 실렸다.
그날 오후 6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군의 사망사실을 시인하고 이를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박군이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으며, 수사관들은 일체의 가혹행위를 한 바 없다고 하였다.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치안본부 대공담당 5차장 박처원 치안감은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박종철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후 1월 15일 저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의 집도로 박종철의 사체부검이 있었다. 그리고 16일 오전 박종철의 시신은 부산시 수도국 말단 공무원으로 그를 키웠던 아버지 박정기에 인도되어 경찰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 벽제에서 화장되었다.
경찰의 은폐기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군 사망 직후 대공분실 조사실에 처음 불려간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은 자신이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박군은 이미 사망해 있었으며, 몸에 멍든 자국이 있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한편, 박군을 부검한 황적준 박사가 박종철의 사인을 ‘쇼크사’가 아닌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발표하여 물고문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부검소견서를 사실대로 작성하였다. 이에 언론들은 일제히 물고문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88년에 있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현장 검증
첫댓글 더럽고더럽다
ㅁㅈ 이때 고문당하는 사람분들.,, 독재 비판하는 전단지 뿌렸다고 잡혀가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22
나라 꼴이 ....
어휴 좆같은 세상아 아니 대한민국아 ㅅㅂ 어디서부터 잘못된거냐
왜저러냐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