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4대 대통령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여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이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군인들의 등쌀에 밀려났기에 부인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의 일생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던 영부인의 하나로 기억하기에는 결코 녹록지 않은 역사를 휘감고 있다.
우선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자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눈에 거슬려 투옥당하고 고문을 받은 적도 있는 당찬 여성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유학을 갈 꿈에 부푼 학구파였다.
즉 결혼 따위는 애시당초 그녀의 뜻 밖에 있었다.
그런데 애를 둘 씩이나 둔, 열 네 살 씩이나 연상의 홀아비가 그 앞길을 막는다. 초대 서울시장 윤보선이었다.
공덕귀는 애초에 마음이 없었던지라 윤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매파를 매번 물리쳤는데 그녀의 후원자 노릇을 하던 목사가 유학 자금을 들고 잠적하는 사태를 만난다.
목사는 공덕귀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것보다 윤보선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금도 안국동 정독도서관을 가는 길목에 좌정하고 있는 윤보선 가의 아흔아홉간 기와집은 그녀에게 일종의 귀양처와 같았다.
활달하게 걷던 걸음걸이마저 조신조신하게 교정을 당했다고 하니 알쪼다.
그래도 남편 사랑 받으며 아들 둘 낳고 삶을 채워가던 그녀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별안간 '영부인'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정치인이었지만 유세현장 한 번 나가 본 일이 없었고,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안국동 집에서 살면 안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 내내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스스로 "조롱 안의 새"라고 표현한 시절.
하지만 '공덕귀 여사'의 이름이 빛을 발한 것은 남편이 대통령의 직을 잃은 뒤였다.
남편이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 공덕귀 여사는 그야말로 독수리처럼 날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얼어붙은 유신 이후 1974년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 자리를 맡으면서부터 공 여사는 영부인 출신의 민주투사로 자리잡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자 이를 계기로 여사는 ‘구속자 가족 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공덕귀 여사는 가장 위험한 시위 현장을 골라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래도 '대통령 영부인'을 함부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맨 앞에 서서 경찰의 방패를 가로막았고 휘두르는 몽둥이 앞에 머리를 디밀었다.
그녀가 생전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사건은 인혁당 사건이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8명의 목을 매달아 버리고 시신조차 내주지 않은 콜로세움같은 야만의 현장에 분노한 그녀는 동토의 공화국 곳곳을 뛰어다니고 호소하고 울부짖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급기야 대통령 영부인이라고 피해 가지 않는 험악한 욕설과 발길질 앞에서도 공덕귀 여사는 한결같이 거리에 나왔다.
하루는 단 8명의 여자만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데 갑자기 후배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공덕귀 여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나는) 버스 탄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 그럴까."
아마 여사도 자신의 일생을 종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망한 나라의 군인의 딸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의 고통을 눈으로 보고 자랐고,
가난한 전도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궁핍 속에 죽어간 언니를 앞서 보내야 했고,
오랫 동안 키워온 신학자의 꿈에 부풀던 중 갑자기 아흔아홉간 대갓집의 맏며느리가 되어 대통령 영부인까지 올랐던 사람,
그리고 늘그막에야 자신이 함께 하리라 맹세했던 낮은 자들,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서 거리에 선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뭐라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마지막 혼돈은 남편으로부터 왔다.
광주 항쟁을 거친 후 집권한 전두환은 온갖 감언이설로 윤보선을 꼬드겼고,
노욕이 들었던지 치매가 왔던지 윤보선은 덥석 그 말에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합동으로 "제발 가만히 계시라."고 말렸지만 여든 노인 윤보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강원룡 목사가 자서전에서 자조적으로 언급한 바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 유신 시절 그렇게 용감하다가 5공 이후 기묘하게 변했던 이들)"의 선봉이 된 남편 때문에 그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민주화운동의 동료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안국동 집을 멀리 하고 발을 끊게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그즈음에도 “대체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할까.”라고 독백하지 않았을까.
199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탄식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사람이 꼭 무엇을 이루어야만 잘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어울리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첫댓글 멋있으시다ᆢᆢ
남자가문제 시발 후앞길막는거 오진다 시대상이라지만 빡치는것.. 여사님은 존경받아마땅한분이세요ㅠㅜ
이런분들 보면 감사하다ㅠㅠ근데 말년에 남편이..
와 ㅅㅂ ㅠㅠ 너무 안타깝지만 재조명 받아서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ㅠㅠ 감사합니다 여사님
저분은 자기가 할 수있는 선에서 최선의노력을한거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