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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을 말하기 위해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1986년 6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인천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한 서울대생 권인숙씨가 부천경찰서에 체포돼 당시 담당형사 문귀동에 의해 성고문을 당한 이 사건은 성고문·폭력정권에 대한 전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나아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기독교회관 2층에서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를 구성했고, 시민단체, 종교단체와 함께 ‘부천서성고문사건공동대책위’를 꾸려 격렬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매일같이 성고문·용공조작·폭력정권 규탄대회가 열렸으며, 많은 여성들이 권인숙씨의 재판정에 몰려들어 권씨를 격려하고 지원했다.
1983년 여성평우회 창립 멤버였던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은 “권인숙씨의 성고문 폭로는 군사독재정권의 반인륜성과 야만성을 폭로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독재타도 민주화운동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여성단체와 여성들이 정치변혁의 주체로 참여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듬해인 1987년 1월 16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한 청년의 죽음 앞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바로 어머니, 단지 독재에 맞섰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구속된 남편과 자식들을 둔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이하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남영동 대공분실로 몰려가 삼베를 뒤집어쓰고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통곡하며 시위를 했다. 우리 자식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이 일만큼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절실함이 컸다”고 당시 민가협 초대 총무로 시위를 이끌었던 인재근씨는 술회했다. 그 역시 남편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당시 민청련 의장)이 민주화운동으로 구속 수감된 상태였다.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당시에는 전화까지 도청당하며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았기 때문에 좀처럼 집단시위를 모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수배 중이던 한 여성 활동가가 새벽 2시에 우리 집으로 찾아와 대공분실 앞에서 모이자는 말을 전했다”며 “바로 민가협 등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했고, 몇 시간 만에 200~300명의 여성들이 대공분실 길거리를 메웠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윤문자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전 총무는 “박군 사건 때 안상림, 조화순 목사 등 각 교단 대표들과 함께 삼베수건을 쓰고 아현고가도로를 걸어 시청 앞까지 행진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와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폐·축소 조작 발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최루탄 사망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는 야당과 재야민주세력이 총결집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이하 국본)’ 결성으로 이어졌고, 국본은 명동성당농성투쟁, 최루탄추방대회, 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가 됐다.
당시 국본 지도부 30%는 여성이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계한 여성운동가 이우정 선생이 고문으로, 이미경, 김희선, 유시춘 등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본 집행위원이었던 한명희 구로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은 당시 국본 내 분위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국본 내부에서 간판스타는 남성이었다. 여성은 논의구조에서는 지도적 위치에 있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계속 싸우자는 주장을 해서 남성들이 피곤해했던 기억이 있다.”
박순희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연합 상임대표는 “내부에선 정권과 타협을 하자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여성들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간절하게 민주화를 염원했기에 훨씬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죽은 자들 앞에서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웠던 거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한열군의 죽음으로 촉발된 최루탄추방운동, 즉 비폭력 시위는 민가협,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신학자협의회, 여성민우회 등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여성단체들에 의해 국민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으로 화해를 청하는 한 어머니의 사진이 국민들의 감성을 뒤흔든 것이다.
‘카네이션 달아주기’ 최루탄추방운동에 참여했던 윤문자 목사(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교회여성회 총회를 하는데 교련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전경을 피해 총회장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총회를 하다 말고 신촌으로 나가 꽃집마다 카네이션을 모두 사들였죠. 그리곤 줄지어선 전경들 앞으로 다가가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라면서 카네이션을 전했어요. 시위하는 아이들도 보호해야 하지만, 전경들도 우리 아이들이니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윤 목사는 당시 의료계에 최루탄이 얼마나 몸에 나쁜지를 설명하는 공문을 보내고, 최루탄피해고발센터를 운영했다. 최루탄 제조회사엔 만들지도 팔지도 말라는 호소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비폭력 운동을 이끈 배경은 여성성이었다. 상처를 입은 가족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민주항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이끌어냈던 여성들의 목적이었다. 이 같은 비폭력 평화시위는 여성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대중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운동가들은 6월항쟁을 계기로 여성운동이 지향하는 여성 의제가 달라졌으며 운동 방식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6월항쟁이 여성운동에 끼친 영향만큼 여성들의 활동 기록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이 같은 이유에 대해 윤순녀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대표의 발언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6월항쟁 당시 여성의 역할은 컸지만, 당시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따지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운동의 열매를 쟁취하는 건 남성들이었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여성운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조명하고, 6월항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활약상을 기록하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어쩌면 앞으로의 여성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풀어야 할 과제도 그것을 통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첫댓글 여자는국가가없어여
좋은 글이다 정독했음
난애국심없어여자한테나라가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