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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대중소악개, 나무위키
짤은 내용과 관계없어요!! (장옥정 아님ㅋㅋㅋㅋ)
이 여인은 바로
정조의 후궁이었던 의빈 성씨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이 연기했던 성송연이란 인물의 모티브기도 해
정조는 정비인 효의왕후를 제외한 4명의 후궁을 두었어
3명의 후궁은 명문가에서 들인 간택 후궁인 것에 반해, 의빈은 유일하게 정조가 자의로 택한 궁녀 출신 승은후궁이야
가계도가 약간 잘못 나왔는데 정조의 자녀는 2남 2녀지만 실제로 의빈이 사망당시 복중회임중이었기 때문에 5명의 자녀가 있었어. 화빈 윤씨는 아예 후사가 없었고.
정조시대 학자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의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의빈 성씨의 본명은 덕임으로 1753년에 태어났어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던 해, 10살의 나이에 혜경궁 홍씨의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덕임의 아버지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 댁의 청지기였거든
그래서 그 연줄로 입궁해서 그런지
혜경궁 홍씨가 덕임을 딸처럼 양육하고 가까이 두었다고해
거기다 1773년, 덕임이 정조의 여동생들인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곽장양문록'이란 소설을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단걸 보면
정조와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로 추측되지. 소꿉친구라고 해야할까?
어머니의 처소 나인이었던 덕임을 마음에 품었던 정조는 세손시절이던 1766년 15살때, 14살이었던(...) 덕임을 후궁으로 삼고자 덕임에게 고백했어
그런데...?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
처음 승은을 내리려 할때 울면서 아직 내전(효의왕후)이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냐며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이를 느끼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 中-
차임ㅜㅜㅜㅠㅠㅠㅜ
궁녀는 첫 입궁한지 약 15년 후 정식 나인이 될 때 임금과 가상결혼을 하는 관례를 치르게 돼. 결국 궁녀는 왕의 여인인거야.
왕정국가인 조선에서 일개 궁녀인 덕임이 차기 국왕이 될 국본인 세손의 승은을 거절한다는 것은 정말 목숨을 건 행동이었지.
정조도 마음만 먹으면 세손의 지위를 이용해서 덕임을 강제로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겠지만 정조는 덕임의 의사를 존중해줬어
믿기지 않겠지만 정조가 직접 이 흑역사를 기록했어....ㅎㅎ
덕임이 정조를 거절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을 해본다면,
고백 거절 이유도 그렇고 실제로 의빈이 죽기 전날 밤, 정조에게 후사를 효의왕후에게서 보라고 할 정도인걸 보면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와 덕임 사이가 굉장히 돈독했다고 해.
또 다른 이유로는 덕임이 혜경궁 홍씨의 최측근 궁녀로서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를 둘러싼 암투 등 여러 사건을 목격해서 왕실과 엮이는걸 피했던거라고 생각해. 특히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는 붕당정치가 무너져 탕평책으로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기도 힘들때였으니까 후궁이 되서 아이를 낳아도 잘못 얽히게 된다면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궁이니 말이야.
아니면 정조가 남자로서 덕임의 취저가 아니였거나...ㅋㅋㅋ
생각해보면 정조와 덕임 사이가 굉장히 가까웠기 때문에 궁녀지만 세손의 승은을 감히 거절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나 싶어!!
아마 이때 덕임이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정조의 유일한 후궁이 되었을꺼야.
아무튼 고백을 거절당한 이후,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 국왕이 되었지만 25살이 넘도록 정비인 효의왕후에게 후사를 보지 못해서
간택 후궁 둘을 들였어
첫 번째 간택 후궁인 원빈 홍씨는 입궁 1년만에 죽었고, 두 번째 간택 후궁 화빈 윤씨는 회임해서 산실청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결국 상상회임이었고 역시 후사가 없었어.
정조는 첫 번째 고백을 하고 거절당한지 15년 만인 1781년에 의빈 성씨에게 두 번째로 고백하게 되지만 덕임은 또!! 거절해
하지만 더 이상 덕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정조는 어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덕임의 밑에서 일하던 무수리를 벌주게 되는 초강수를 두었고,
결국 덕임은 정조의 구애를 받아들이게 돼.
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
이후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에게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결국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 中-
음 정말로 믿기지 않겠지만 본인 연애사를 정조가 직접 씀ㅋㅋㅋㅋㅋ
참고로 정조가 어떤 사람이냐면
대궐 안에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주상의 본래부터의 성념(聖念)이 미천(微賤)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순왕후의 후궁 간택령 교지(1778)-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뜻이 본디 공검(恭儉)한 때문에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성색(聲色)과 진기한 노리개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이라고 봐 주지 않는다.
- 정약용 '부용정 시연기(1795)'-
나는 음악이나 여색,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은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아 멀리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멀리하게 되므로, 여가 시간에 책이 아니면 즐길 것이 없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양견(良犬), 준마, 음악, 여색(女色)을 즐긴 적이 없었다. 어진 사대부를 친견(親見)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견할 때가 적어야 합니다 했는데, 나는 이 한마디 말에 있어서 거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다. 무(武)를 숭상하던 분위기를 문화적인 것으로 바꾸고 현자(賢者)는 높이고 척신(戚臣)은 낮추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은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하고 있다.
- 정조 '홍재전서(1799)'-
정순왕후 교지나 정약용의 증언, 심지어 정조가 말년에 자서전에 쓴것만 봐도
정조는 여인, 특히 궁인을 가까이 두지 않기로 유명한 왕이었는데 일개 궁녀였던 덕임에게 2차례나 거절당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15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렸다는 점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야. 신분상 자신이 원하는 여인은 강제로라도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지.
심지어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 승은을 내리기 직전인 약 1781년 기점으로 덕임을 20 여년간 맘속으로 후궁의 반열에 두었다고 적어놓은 걸로 봐선...
15살, 첫 고백 전부터 덕임을 쭉 짝사랑 했었다는 건데 덕임 한정 엄청난 집착남이었을지도...;;
아무튼 정조의 승은을 입은 덕임은 회임하여 1782년 음력 9월, 정조의 첫 자식이자 아들인 문효세자를 낳았어
덕임은 원자를 낳은 공으로 이듬해 소용에 봉해지고 아들이 세자가 되자 정 1품 의빈으로 승격돼
금슬도 좋아서 의빈은 세자를 낳은지 2년 뒤 옹주를 낳았고, 정조와 의빈은 딸 하나 아들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되지
정조가 의빈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본인이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상세히 나와있는데
處宮闈二十有餘年未曾與人睢盱或事有難言地偪嫌疑而必委曲宛轉自至妥當予居常不以外言入內而嬪亦習於循默酬酢不出於戶庭予居常不以外言入內而嬪亦習於循默酬酢不出於戶庭
의빈이 궁에서 지낸지 20여년이다 일찍이 다른 사람과 희희덕거리지 않았고, 말하기 어려운 일 또는 미심쩍은 일은 반드시 자제했으며, 스스로를 원만히 다스려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나는 평소 밖의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의빈은 이를 묻지 않았다 내 말을 따라 묵묵히 술을 따라 주고받았다 또한 의빈은 내명부에 대한 일을 꺼내지 않았다
敏女紅善烹餁卽其餘事而筆翰亦自超凡旁通數理之學便能領會 蓋其神識開悟觸處皎如非特才藝之全備而已予御宮掖嚴而近苛 給事承令少可於意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而佩訓飭則尺寸無失 愼應對則規度自有 夙夜匪懈終始如一此其出類之賢固已難矣恪守常分 明乎等級之嚴 痛絶私謁 戒其盈成之懼 此其尤難者也
요리를 잘 하고 바느질, 자수 등 여인이 하는 일에 능했다 또 붓글씨도 범상함을 넘어섰다 또한 수학에도 곧 잘 이해하고 통달했으니 의빈은 부딪히는 일마다 명확했다 의빈은 단지 재주와 기예만 온전히 갖춘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궁의 하인들을 부리는데 엄격하고, 가까운 자에게 가혹하다 그래서 내 명을 받드는 게 나의 뜻에 맞을 때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의빈을 둔 후로, 의빈이 훈칙을 단단히 일러주면 그것을 새기고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법도를 잘 지키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나를 잘 모셨다 이는 뛰어난 현인도 참으로 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의빈은 본분을 지키고, 계급의 엄격함을 명확히 했고, 사사로이 의빈을 알현하여 청탁하는 것을 철저히 끊었다 또한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 했으니 이는 더더욱 이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內殿旣取其子子之若其養育之節必任於其所生母卽國朝故事也 嬪惟罔敢自專而聽於內殿內殿使自養以待稍長則撫視惟謹 夜必明燭達朝未嘗解衣而寢者五年如一日 躬執賤役言語極其尊敬或言其太過則曰儲君也內殿之子也我何敢以己出而自尊乎
내전(효의왕후)이 세자를 양자로 받아 들였지만, 세자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꼭 생모에게 맡겼다 이는 조선의 관례였다 하지만 의빈은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항상 효의왕후에게 자문을 구하고, 분부를 따랐다 그리고 효의왕후는 의빈이 기르게 해서 조금 더 자라기를 기다렸다 의빈은 세자를 어루만져 기르고, 항상 조심히 대했으며, 밤에는 꼭 불을 켰고, 아침까지 되도록 옷을 풀지 않고 잠들기를 5년 동안 이어갔다 또한 의빈은 천한 일을 몸소 맡아하고, 세자에게 지극히 공경스러운 말을 썼다 누군가 그것이 지나치다고 하면 “왕세자이자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어찌 감히 내가 세자를 낳았다고 나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뭐 요약하자면 덕임은 착하고 검소하고 속깊고 겸손하고 중전을 공경하고 요리 바느질 자수도 잘하고 글씨도 잘쓰고 수학마저 잘하고 통솔력도 좋고 아들도 잘 키우고...ㅋㅋㅋ 정조의 의빈 덕질ㅋㅋㅋㅋ
그 깐깐하고 완벽주의자라서 신하들을 여럿 괴롭혔던걸로 유명한 정조가 나쁜소리 하나없이 의빈의 칭찬만 적어놓고
팔불출의 면모를 보이는걸 보면 의빈을 정말 사랑하고 아꼈음을 알 수 있어.
정조에게 있어 덕임은 첫 정인이었고 첫 아이를 안겨준 일생의 사랑이었을테니까. 이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꺼야.
하지만 행복도 잠시
옹주는 태어난지 두 달만에 요절하고 2년 뒤인 1786년에는 문효세자마저 홍역에 걸려서 요절했어
이때 의빈은 셋째 아이를 회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죽음이 충격이었는지
문효세자 사후 반년만에 출산을 한달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돼ㅠㅠㅠㅠ
독살설도 있긴 하지만 정조가 의빈의 탕약에 뭐가 들어가는지 직접 검열할 정도여서 독살설은 신빙성이 없다고 해.
의빈이 세상을 떠난 뒤, 실록에 정조의 참담한 심정이 이례적으로 기록되어있는데
從今國事尤靡托矣
이제부터 국사(=정조 본인)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실록에도 의빈사후 정조가 며칠간 정사를 돌본 기록이 없어.
사랑하는 의빈과 세자를 잃은 정조의 심정은 너무 괴로웠을듯ㅠㅠㅠ
덕임 사후, 정조는 정말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데
원래 후궁은 서열상 자식보다 신분이 낮아서 같은 곳에 묻힐 수 없어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졸하고 묘자리를 정했는데, 그 묘자리는 공주가 묻힌 곳이어서 다시 정했다는 전례가 있을정도야.
더욱이 문효세자는 세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불가한 것이었지만 정조는 이례적으로 이들을 같은 곳에 안장해
세자와 세자의 생모가 한 곳에 묻힌거지 오늘날 효창공원이 바로 의빈성씨 모자의 묘가 있던 곳이야
두번째로 덕임을 위해서 의빈궁이라는 궁호를 내렸어
~~궁이란 호칭은 왕을 낳은 후궁들에게만 주는 것인데
의빈은 왕세자를 낳았지만 문효세자는 일찍 요절해서 왕이 못되었으니 해당이 안돼.
하지만 정조의 의지로 왕을 낳은 후궁들의 신위를 봉안한곳 , 즉 칠궁에 같이있게 되었고 1908년 순종이 의빈의 제사를 제외할 때까지 100여년간 왕을 낳은 후궁들과 같은 제사를 받았어. 만약 순종 대에 의빈을 제외하지 않았다면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인 칠궁은 팔궁이었을꺼야.
심지어 정조 생전인 1797년에는 육상궁선희궁의빈궁명일제삼궁고제[毓祥宮宣禧宮宜嬪宮名日祭三宮告祭]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이야.
정조의 후궁이고 요절한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가 정조의 증조모, 조모와 함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지
세번째로 정조는 덕임을 위해 직접 어제비문을 짓고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표 등을 간행했지
후궁한테 손수 어제비를 써주는 건 정말 이례적인일ㅇㅇ
이것도 모자라서 정조는 몇 차례에 걸쳐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참배하러 출궁을 했고, 이 때문에 오늘날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
왕들은 아무리 총애했던 후궁이라도 묘소에 가지는 않는데
일개 후궁의 묘소에 몇차례나 갔던 왕은 정조가 유일할꺼야 물론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가 함께있기도 했지만ㅎㅎ
다음은 정조가 직접 쓴 의빈의 묘소에 있는 어제비문의 일부 내용이야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으로 함께한 시간은 고작 5년이었어
그리고 정조는 정약용과 폴인럽....ㅋㅋ(농담)
여담으로 의빈은 숙종의 후궁으로 잘 알려진 희빈 장씨와 100년(정확히는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어.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지만 조선시대 빈들 중 이름(장옥정, 성덕임)이 알려진 경우 역시 두 사람 뿐이야.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고,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은 점,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정조)를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 첫 아들(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아.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지. 다른점이라면 희빈과 달리 의빈은 죽어서도 끝까지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일꺼야.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유명한 한글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하지만,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제문에다 올 한문으로 기록 되어있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게 된거 같아. 심지어 정조가 직접 후궁과의 연애사를 쓴건데...ㅎ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를 낳은 유일한 후궁이자 양반가 청지기의 딸에서 왕세자의 어머니가 된 입지전적인 여인.
조선왕조의 비빈들 중 유일하게 임신 중에 졸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
정조를 세손시절인 15살 때부터 무려 15년이나 기다리게 하고, 2번이나 거절했던 여인.
5년 동안 3번이나 회임할 정도로 사랑받았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을 두 번이나 겪고 셋째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죽은 비운의 신데렐라, 의빈 성씨 성덕임.
"너(의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치저제문 中-
그래도 위안이 된다면 의빈은 죽어서도 끝까지 정조에게 절절한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겠지.
역사에 만약이 없다지만
문효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정조 사후 18살에 왕위에 올랐을 테니 세도정치도 없었을테고 힘없이 나라를 잃지는 않았을텐데...ㅠ
언젠가 이 둘로 애절한 멜로 사극 찍어줄수 없나요....ㅠㅠ
문제시 둥글게 지적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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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은 장희빈이랑숙종이넼ㅋㅋㅋ 이산이 그냥 소설이아니여꾸나
이름부터 성덕임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문효세자가 너무 안타깝다 정조랑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세자면 얼마나 영특했을까ㅠㅠㅠㅠㅠㅠ
와...사랑꾼이야 ㅜㅜㅜ
마지막 정조글 너무 짠하다...ㅠㅠ 슬픔이 느껴져
정조 진짜 의빈 너무 아끼고 사랑한다는게
글로서도 확 느껴진다 ㅠㅠㅠㅠ
와...정말 재밌게 읽었어 여시ㅜㅜ 글 너무 재밌어!! 의빈이 대단한 사람인거가타 ..
찡하다.. 사극으로 보고싶어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이 부분 읽는데 진짜 와....절절하다...
소름돋았어..
이산ㅠㅠㅠㅠㅠ다시 보곱다ㅠㅠㅠㅠ
정조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정인이였던거 같아..... 그렇게 깐깐하고 사람 안믿고 여자도 믿지 못하는 사람 불신증이였던 사람이 한여자한테 저정도로 한걸보면...
기록에 정조는 밤에 암살 걱정으로 잠도 못자서 굉장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였다던데 한 여자한테만은 절절한 순애보였네
삭제된 댓글 입니다.
@TI AMO 글쓴인데 이 부분 수정할께 내가 잘 안알아보고 글을 썼어.
@대중소악개 효의왕후를 깎아내리려고 한건 아니었고 물론 정조가 효의왕후를 칭찬하긴 했지만 정조가 조정에서의 효의왕후에 대한 문안을 폐지한 것과 세손시절에 세손빈과 서로데면 데면했고 세손빈을 비판하는듯한 세손의 일화를 홍대용이 기록한걸 봐서였거든 글이 불편했다면 미안해염
@TI AMO 아니에요ㅎㅎ고쳐야 할건 고쳐야지ㅎㅎㅎ 핏백줘서 고마워용!!
마지막 글 진짜 절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흔해져서 절절함 잘 못느끼겠는데 사랑한다. 이게 너무 마음이 가득 담겨있어 ㅠㅠ
안타깝다...
ㅠㅠ사랑한다 이 말이 진짜 무거운말이구나
ㅠ_ㅠ.... 덕임아...
너무 흥미돋이다!!!! 정조 사랑꾼..
애틋해..ㅠㅠ 마지막 글이 너무 절절하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 ㅠㅠ
ㅠㅠㅠㅠ요새 정조에 빠져서 연어하다가 발견했는데 진짜 애틋해
ㅠㅠㅠ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