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 시대의 혼란상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최초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등장할 때까지 약 330여 년 간 계속되다가 사무엘의 탄생 이후 비로소 오랜 동안의 사사 시대를 청산하고 왕정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를 옮겨가는 교량 역할을 한 사람이며, 사무엘서는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역사의 고리 구실을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무엘서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할 사실은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 등, 본서 전체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위인들의 행적과 사무엘이 활동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다. 본 서론의 과제는 바로 이러한 중요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사무엘서의 보다 폭넓은 이해를 돕고자 함인데 이러한 작업을 위해 먼저 사무엘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고찰한 뒤 사무엘서의 가치와 신학, 그리고 제문제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1부 사무엘상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히브리 맛소라 성경은 사무엘상?하의 이름을 분리하여 각기 다른 이름으로 정하지 않고 두 권을 통합하여 하나의 이름인 < laeWmV] yrep]si; 시프레 쉐무엘> 즉 '사무엘의 책들'이라 불렀으며, 구약성경 각 권의 끝에 기록한 '말주'(末註) 역시 사무엘상 끝과 사무엘하 끝에 따로따로 기록하지 않고 사무엘상?하의 끝에 한꺼번에 기록함으로 사무엘상?하를 구분이 없는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였다. 이렇듯 한 권의 책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사무엘서는 헬라어역인 70인역에 와서 비로소 두 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되어 있던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함으로써 책의 부피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0인역의 역자는 사무엘서를 상?하로 나누어 '왕국 제1서'와 '왕국 제2서'(the Firth and Second Books of Kingdoms)로 불렀고, 열왕기상?하는 '왕국 제 3서'와 '왕국 제 4서'(the Third and Fourth Books of Kingdoms)로 불렀다. '불가타역' 역시 이러한 70인역의 구분을 따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각각 두 권씩 분류하였는데 그 명칭은 70인역의 명칭과 달리 사무엘상?하는 '열왕 제1서'와 '열왕 제2서'(the First and Second Books of Kings)로, 열왕기상?하는 '열왕 제3서'와 '열왕 제4서'(the Third and Fourth Books of Kings)로 칭하였다. 이러한 분류법은 영역 성경과 한글 개역 성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영역 성경은 사무엘서를 '제 1, 3 사무엘'로 칭하였고, 한글 개역 성경은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로 분류하였다. 한편 사무엘서의 명칭이 사무엘의 이름을 따라 불린 것은 사무엘이 본서 첫 부분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두 주인공인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II. 저자
탈무드는(Baba Bathra 146) '사무엘이 자기의 이름을 지닌 책(사무엘서)과 사사기와 룻기를 썼다'고 기록함으로 사무엘서의 저자가 사무엘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탈무드의 주장에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사무엘서에는 탈무드가 본서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사무엘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참조,
삼상 25:1). 이러한 난제의 해결을 위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로 추론하는데 그 첫째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으로서 사무엘서 전체를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문서가 편집된 것으로 보는 편집설이며, 둘째는 탈무드의 견해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무엘 단일 저작설이고, 셋째는 사무엘상 1-24장까지는 사무엘이 기록하였으나 사무엘상 25장부터 사무엘하까지는 어떤 영감 받은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 기록, 완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견해 중에서 첫 번째 견해인 편집설은 오경의 편집설에 근거한 이론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유오설로 나아가는 길을 터놓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두 번째 견해인 사무엘의 단일 저작설은 많은 문제를 파생시킬 여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삼상 25장부터 삼하까지의 기록이 사무엘의 예언적 기록이라는 그들의 추측은 무리한 억지 추측이라는 인상밖에 주지 못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사무엘서의 저자는 대부분의 부수주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대로 사무엘상 1-24장까지는 사무엘 자신이 기록하였으나 사무엘상 25장부터 사무엘하까지는 어떤 영감 받은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고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사무엘서의 후반부를 기록하였다고 생각되는 익명의 저자에 대해 혹자는 '아비아달'로 혹자는 '사무엘이 세운 선지 학교의 학생 중 한 명'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누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III.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사무엘서의 목적은 한마디로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과 왕국 성립의 산파 역할을 했던 사무엘에 관한 기사의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무엘서에는 마지막 사사이자 최초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에 관한 역사와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동안의 첫 번째의 두 왕들(사울과 다윗)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일관된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를 형성하여 흐르고 있다. 사무엘서의 기록 목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역사적인 목적과 교리적인 목적, 그리고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역사적인 목적
사무엘서의 역사적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다윗 왕조의 '신적 기원'(The Divine Origin)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즉 사무엘서는 사사 시대의 혼란상으로부터 이스라엘 최대의 황금기였던 다윗 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다윗 왕조가 인간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왕정 시대의 시작과 함께 비로소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선지자의 출현에 관한 언급'이다. 즉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선지자 직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출현하여 그에게 부여된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함으로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계속될 선지자들의 직분과 임무, 그리고 말씀 선포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 점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또 다른 중요점이기도 하다. 셋째는 사무엘하에 서술된 다윗의 치세에 대한 배경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즉 사무엘로부터 사울을 거쳐 다윗의 피신 생활을 그린 사무엘상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를 기점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림으로써 사무엘하에서부터 펼쳐질 본격적인 다윗의 치세에 대한 배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2) 교리적인 목적
사무엘서의 교리적인 목적 역시 다음가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울의 비참한 최후를 통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참조,
삼상 15:22)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이러한 순종의 강조는 사무엘서에서 최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던 아담으로부터 끊임없이 강조되어 오던 것이었는데 본서에 와서 비로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문구를 통해 순종의 중요성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거하였던 것이다. '순종'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제 2부 '사무엘서의 신학'부분에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둘째는 사울의 등극과 폐위를 통해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이스라엘이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神政 國家)였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후에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내가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호 13:11). 셋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바라보시는 방법에 대한 계시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선택하시면서 하신 말씀인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는 말씀이 인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영구불변의 법칙임을 계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3) 기독론적인 목적
사무엘서에 나타난 기독론적인 목적은 사무엘서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단어에서 잘 드러난다(참조,
삼상 2:10). 즉 인간의 타락 이후 신앙의 족장들로부터 모세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의 혼란기를 겪는 동안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온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메시아를 뜻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단어와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예언', 그리고 '기름 붓는 행위'를 통해 좀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사무엘서를 연구할 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의미와 그 결과가 어떤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기록 연대
사무엘서의 기록 연대는 사무엘서의 저자는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왜냐하면 본서를 사무엘의 단일 저작으로 볼 경우 사무엘서의 저작 연대는 사무엘이 활동한 당시의 B.C. 1025-950년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무엘서를 사무엘의 단일 저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무엘서의 저작 연대가 그보다 훨씬 뒤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사무엘서의 기록 연대는 사무엘이 활동할 당시의 B.C. 1025-950년 사이로 추정하는 견해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인 B.C. 722년경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다윗이 죽기 바로 전으로 보는 견해 등 많은 추측과 학설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견해들 중에서 사무엘이 활동할 당시인 B.C. 1025-950년 사이로 보는 견해는 사무엘이 죽었다는 사무엘서 자체의 기록(참조,
삼상 25:1) 때문에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기 힘들며, 다윗이 죽기 바로 전으로 보는 견해 역시 '아기스가 그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들)에게 속하니라'(
삼상 27:6)라는 말씀에 의해 받아들이기 어렵다(한글 개역 성경에는 '유다 왕'이라는 단수로 표현되었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유다 왕들'이라 번역되는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사무엘서의 기록 연대는 주석가 '패이'(Fay)와 '카일'(Keil), 그리고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이 채택하는 대로 다윗 이후의 분열 왕국 시기로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삼상 27:6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유다 왕(들)'이라는 표현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의 기록임을 증거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IV. 특징과 구조
1. 특징
사무엘서의 특징은 한마디로 '거국적인 대사건의 기록과 개인적인 사소한 일이 동시에 기록된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왕국을 그들의 적들로부터 보호하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사울과 다윗의 위대한 통치와 전쟁을 통하여 성취됨을 보여 주는 '대사건의 기록'이 그들 각각의 '개인적인 일과 사소한 일의 기록'과 함께 묘한 구조와 통일을 이루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무엘서의 특징을 주석가 '데니우스'(Thenius)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정의하였다. '이 작품의 특수한 역할은 다른 것들과 현저하게 다르니, 한편으로는 매우 간단명료하고 거의 역대기 형식으로 쓰여진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정교하면서도 자서전적인 내용으로 꽉 차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무엘서의 특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감찰하시고 관여하시는 당신의 놀라운 섭리를 계시하셨던 것이다.
2. 구조
사무엘상?하가 본래는 나누어지지 않은 한 권의 책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본서의 '명칭'부분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사무엘상?하의 구조 역시 서로 독립시켜 따로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무엘상은 사무엘상대로 사무엘하는 사무엘하대로 각각 구별되는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것은 사무엘상이 다윗의 통치를 준비하고 그에게 왕권이 넘겨지기 전까지의 배경을 중심으로 다윗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중심하여 형성되어 있는 반면 사무엘하는 통치권을 넘겨받은 다윗이 어떻게 승리하다가 범죄하는가를 보여 주는 데 중심을 두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특성을 중심으로 사무엘상의 구조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사무엘상 도표1).
제2부 사무엘상의 특별 주제들
I. 사무엘서의 역사적 배경과 인접 국가와의 관계
사무엘상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왕정(王政)의 실현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러한 이스라엘의 요구가 사무엘상의 배경을 이루는 인접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에 의한 것임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그러한 배경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왕정(王政) 요구의 두 가지 요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블레셋인들의 위협은 B.C. 1050년 '실로'(Shiloh)의 파괴를 기점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렇듯 블레셋인들의 위협이 점차 커짐으로 그들의 생존에 심각한 위험을 느끼게 된 이스라엘은 중앙 집권이 없는 엉성한 지파들의 연합체로서는 더 이상 자체 유지의 희망이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비록 애굽 제국이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애굽 대신에 팔레스틴 주위의 소(小) 강국들이 강하게 조직화되고 점차 호전적으로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강력한 통치자에 의해 연합되고 통일되지 않은 한 위험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위의 나라들처럼 한 왕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견해를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은 외형적 요인일 뿐 실제적 요인은 아니었다. 그들이 스스로 왕을 요구했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고 통치하는 '신정'(神政) 제도를 거부하며 악으로만 치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돌이켜 인간의 길로 향했던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정에 영향을 끼쳤던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에 대해 하나하나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2. 블레셋;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
사사 시대 말에서부터 사무엘 시대까지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족속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블레셋 족속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까지만 해도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그들은 헷족속을 패배시키면서부터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 중의 하나로 부상(浮上)하였다. 그들은 헷족속을 패배시키고 애굽에까지 진출하려 하였으나 라암셋 3세에게 대패한 후 지중해 연안의 '가드'(Gath), '가사'(Gaza), '아스글론'(Ashkelon), '아스돗'(Ashdod), '에글론'(Eglon) 등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들 지역에 거하던 블레셋 족속은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의 제한된 지역에 만족했으나 점차 팔레스틴 동쪽으로의 진출을 꾀하다가 결국 11세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동쪽과 남쪽 지역으로 침공하여 사사 시대에는 단과 유다 지파의 여러 지역들을 차지하였고(참조,
삿 14:4; 15:11), 사사 삼손의 활약으로 인해 한때 위축되기도 했으나 사무엘 당시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실로'(Shiloh)를 파괴하고 법궤를 빼앗아 감으로써(참조, 삼상 4장)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정을 요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3. 앗수르와 그 외의 강국들
이스라엘의 근심거리였던 블레셋보다 실상 더욱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 족속은 앗수르인들(Assyrians)이었다. 이들은 블레셋이 헷족속을 격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B.C. 1200년 경까지 헷 족속을 타도한 후 계속하여 티그리스 강 북쪽 주의의 온 땅을 정복하고 그 위세를 그대로 몰아 바빌로니아로 진군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토 확장은 '티글라트필레세르 I세' (Tiglathpileser I) 하에서의 B.C. 1100년까지 중단되었으며, 그 이후 다시금 시작된 영토 확장 역시 수리아의 아람 국가들이 200년 동안 팔레스틴으로의 진군을 방어함으로 이스라엘은 수백 년 동안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B.C. 1050-930년까지 애굽 및 미타니 왕국과 헷족속, 그리고 아람인과 앗수르인들이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세력 다툼을 계속하였고, 바벨론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미약한 세력이었으므로 팔레스틴은 이들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사무엘상의 역사적 배경은 열강들의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 블레셋이 그들의 세력을 팔레스틴으로 향함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고, 이러한 괴로움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블레셋의 위협은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로 옮겨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블레셋의 위협은 이스라엘이 왕정시대로 들어선 후 그들을 정벌함으로 이스라엘은 열강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몇 백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을 역사적인 사건별로 분류 대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사무엘상 도표2).
II. 사울과 다윗의 전쟁
사무엘서의 특징이 '거국적인 대사건의 기록과 개인적인 사소한 일의 동시적 기록'임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사무엘서의 특징은 사무엘서로 하여금 크고 작은 여러 번의 전쟁 기사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과 그 뒤를 이은 다윗과 연관된 전쟁이었다. 따라서 사무엘서 전체를 고찰하기에 앞서 사울과 다윗에 의해 치러진 전쟁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사무엘서 전체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작업인데 이들과 연관된 전쟁들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사무엘상 도표3).
III. 사울의 왕국
사울은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수도(首都)를 그의 고향인 '사울의 기브아'로 정하고 여기에서 이스라엘 정착지의 전역을 통치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멍에에서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모든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참조,
삼상 14:47, 48). 사울의 왕국은 그의 아들인 '에스바알'(Eshbaal; 이스보셋:
삼하 2:9)의 재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5개의 행정 구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즉 트랜드 욜단의 '길르앗', 갈릴리의 '아셀', '이스르엘 평지'와 '중부 산지의 에브라임', 그리고 '베냐민'의 5구역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밀집 정착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사울은 이외에도 유다까지 그의 통치권을 확대시켰으나 '에스바알 시대'에 이르러서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사울 시대의 이러한 왕국의 변경은 이스라엘의 국경이 되었다(참조,
삼상 13:19). 사울이 이렇듯 이스라엘의 국경을 확정짓기는 했으나 밖으로의 정복 사업에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여서 그의 수도와 매우 근접해 있는 이방의 여부스마저도 사울에게 정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성지 전체를 단일 이스라엘 왕의 휘하에 단합시키는 과업과 밖으로의 정복 사업은 자연히 사울을 계승한 다윗에게로 이양되었다. 사울 왕국에 대한 대략적인 지도는 다음과 같다 (참조,
사무엘상 도표4).
IV. 다윗의 방랑기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었지만 그의 앞길이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울의 악사와 천부장, 그리고 사위로서 처음에는 사울과 좋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던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얻은 높은 명성 때문에 사울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에게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피난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다윗이 최초로 망명 생활을 시작한 곳은 유다 광야였다. 여기에서 그는 사막의 절벽 사이에 있는 굴과 요새에 은거(隱居)하였는데 이때 한 떼의 불평분자들이 나아와 다윗의 부하가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광야 끝의 유다 정착지들을 떨게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다윗이 유다 광야에 거하면서 서서히 활동을 시작하자 사울은 황량한 유다 광야까지 추격을 개시하였고 다윗은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다윗과 사울은 서로 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지만 사울은 이스라엘을 위한 뜨거운 애국심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때문에 서로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포기한다. 즉 사울은 다윗에 대한 극심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블레셋의 침공 소식을 듣자 다윗을 포기하고 블레셋 침략군을 향하여 달려감으로 다윗이 도망할 기회를 얻었었고(참조,
삼상 23:27, 28), 다윗 역시 그 나름대로 두 차례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으나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참조,
삼상 24:6; 26:11, 12). 그러나 결국 사울이 우세하였으므로 다윗은 그의 백성의 원수격인 가드 왕 아기스를 찾아가 그의 보호를 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는데 아기스는 다윗을 환영하여 남방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변경 성읍 중의 하나인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방랑 생활을 지도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사무엘상 도표5).
V. 사무엘서의 난제들
사무엘서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난제들이 있는데 그것은 '중복된 여러 가지 기록들에 대한 이해'와 '골리앗의 죽음에 관한 기사', 그리고 '엔돌의 무당에 관한 해석'과 '사무엘이 소속된 지파에 관한 해석'등의 네 가지이다.
1. 사무엘서의 여러 가지 중복된 기사들
사무엘서가 지난 여러 가지 난제 중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는 바로 사무엘서의 기록된 여러 사건들의 기록이 중복되었거나 서로 상충된 기록이라는 점이다. 고등 비평가들은 이러한 기록들을 예로 들어 사무엘서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 상충된 모순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결코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사울의 대관식에 대한 중복적인 기록
사무엘서에는 사울이 왕으로 들림 받는 장면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참조,
삼상 9:26-10:1; 10:17-24; 11:15). 고등 비평가들은 이렇듯 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본서가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가지 문서를 가지고 편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 당시의 상황적 배경을 정확히 알지 못한 오해에서 기인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사간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
삼상 9:26-10:1절의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사무엘에게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고,
삼상 10:17-24절은 선택받은 사울이 제비뽑기에 의해 이스라엘의 대중 앞에 소개되는 장면이며,
삼상 11:1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의 오해는 그러한 각각의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 사이에서 모순점을 찾으려 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2) 다윗이 사울에게 소개되는 장면의 중복된 기록
다윗이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에게 나아갈 때 사울은 그를 보고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라고 물음으로써 다윗의 신상에 대해 질문한다(참조,
삼상 17:58). 그런데 이러한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이 사울의 악사로 궁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울에게 소개된(참조,
삼상 16:18) 후의 질문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난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삼상 17:25절과 27절의 말씀을 주의해 살펴보면 쉽게 해결된다. 왜냐하면
삼상 17:25절과 27절에는 사울이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베풀 은혜 중의 하나로서 '그 아비 집을 이스라엘에게서 자유하게 되도록 해주리라'는 언약을 하는데 여기서의 '자유'라는 의미는 '세금의 면제' 혹은 '백성들이 왕에게 져야 하는 군복무의 면제'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사울 왕이 다윗의 이름을 물은 것은 다윗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 수행을 위해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을 묻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 역시 서로 상충되는 구절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3) 사무엘의 지파에 대한 해석
삼상 1:1절에 의하면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에브라임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사무엘은 당연히 '에브라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상 6:28절과 33절을 보면 사무엘은 분명히 레위 지파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따라서 위의 두 구절들이 사무엘의 지파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삼상 1:1절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삼상 1:1절의 진술이 엘가나가 소속된 지파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장소에 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상 1:1절은 '글리슨 아처' (Gleason L. Archer)가 주장한 대로 '그곳이 에브라임 지파가 받은 기업이었기 때문에 사무엘의 아버지를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삼상 1:1절은 사무엘의 지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태어난 곳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 6:28절과 33절의 구절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2. 골리앗을 죽인 다윗에 대한 논쟁
골리앗을 죽인 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은
삼하 21:19절과
대상 20:5절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삼상 17장의 기록에는 분명히 골리앗을 죽인 자를 다윗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하 21:19절은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註-BHS 원문에는 '아우 라흐미'가 생략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대상 20:5절 역시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엘하난'을 다윗과 동일 인물, 즉 다윗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고, '야일' 또는 '야레오르김'을 '이새'로 간주하여
삼하 21:19절과
대상 20:5절을 '성소의 휘장을 짜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다윗이 가드 골리앗을 죽였는데'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다른 어느 부분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없는 억지 추측에 불과할 뿐 받아들일 만한 정설은 못 된다. 한편 고등 비평가들은 '엘하난'과 '다윗'이 서로 다른 인물임은 인정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기 보다는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골리앗을 실제로 죽인 자가 엘하난이었지만 후대의 편집자들이 본서를 편집할 때 좀더 잘 알려진 다윗에게 영웅적 역할의 실례로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으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 역시 성경 다른 어디에서도 일치점을 발견할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만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지 않았다면 사울 왕이 그토록 다윗을 미워하고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장에서 돌아온 다윗에게 여인들이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참조,
삼상 18:7)라고 칭송하였을 리가 없고,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갈 때 놉 땅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에게 자신이 맡겨둔 골리앗의 칼을 도로 받을 수 없었을 것(참조,
삼상 12: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골리앗을 죽인 자가 다윗이 아닌 엘하난이라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삼상 17장과
삼하 21:19절, 그리고
대상 20:5절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카일'(Keil), '페인 스미스'(Payne Smith) 등과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삼상 17장의 사건과
삼하 21:9절, 그리고
대상 20:5절의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 아닌 서로 다른 독립된 사건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삼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과
삼하 19:21절에 나오는 '골리앗'이 동일 인물이 아닌 서로 다른 인물로서 삼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은 다윗의 손에 의해,
삼하 19:21절(註-원문에는 '아우인 라흐미'라는 말이 빠져 있다)과
대상 20:5절에 나오는 '골리앗의 아우인 라흐미'는 엘하난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보는 견해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삼상 17장의 골리앗이 다윗의 손에 의해 죽고 난 후 그의 동생과 자손들이 복수를 하고자 이스라엘로 재차 침입하였으나 '엘하난을 비롯한 다윗의 용사 네 사람'이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삼상 17장과
삼하 21:19절, 그리고
대상 20:5절은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건의 기록으로 생각해야 한다.
3. 엔돌의 무당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통해 불러올린 사무엘에 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로 압축될 수 있다. ① 일종의 심리적 현상이라는 학설. 이 학설은 사무엘이 직접 어떤 현상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 그의 혼란한 심적 상태와 신비스런 주문 효과로 인하여 사무엘을 본 것 같은 심리적 현상에 빠져버린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사울 앞에 나타난 모습을 단순한 심리 현상이나 환상으로 돌리기에는 그 장면 묘사가 너무도 생생할 뿐만 아니라 사울 외에도 엔돌의 무당 역시 그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는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받아들이기 힘들다. ② 실제로 사무엘이 나타났다는 해석, 이 학설은 실제로 죽었던 사무엘의 영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해 다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설 역시 성경의 증언과는 부합되지 않는 학설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접신녀가 초혼술에 의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올렸다는 것은 죽은 자들의 영혼과 이 땅 위의 사람들이 서로 연락할 수 없다는 성경의 기록(참조,
눅 16:19-31)과 어긋나는 이교적 사술에 불과한 것이며, 둘째로 '사무엘의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라고 말한 접신녀의 말 역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
전 3:21; 12:7)는 성경의 증언에 위배되는 사상으로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죽은 자의 생명은 땅 밑의 동굴인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와 같이 생존한다고 믿는 미신적 사고의 발로였고, 셋째는 접신녀가 본 사람이 실제의 사무엘이었다면 그녀가 사울보다는 사무엘을 더욱 두려워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울을 더욱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③ 귀신이라는 견해. 이 견해는 '루터' (Luther)와 '칼빈'(Calvin) 등의 보수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로서 여기에 나타난 사무엘이 '실제의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울에게 나타난 귀신'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접신녀가 사용한 초혼술은 거짓된 속임수로, 접신녀가 불러올린 것은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귀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의 의해서도 인정되는 매우 타당한 학설인데 특별히 귀신이 사울의 멸망할 미래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귀신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참조,
삼상 16:14;
고후 12:7). 이러한 사건의 기사를 통해 우리는 신접한 자나 무당이 악령과 연합한다거나 어떠한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에게 죽은 자를 불러 올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사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자의식을 갖고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성경적 교리를 재삼 확인해 볼 수 있다.
VI. 사무엘서의 신학
1. 왕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사무엘서에 묘사된 왕정의 실시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못한 승낙'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세워 왕으로 삼는 신정 정치의 거부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으며(참조,
삼상 8:7),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을 설득시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끝까지 고집하자 그들을 향한 징계의 한 방편으로서 왕정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정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이 왕정으로 인해 겪어야 할 무거운 고통도 함께 선언하셨다는 점과(참조,
삼상 8:10-17),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지 아니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경고(참조,
삼상 8:18), 그리고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호 13:11)는 호세아 선지자의 증거에 의해서도 잘 증명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정을 거부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미 족장 시대 때에 이스라엘에 선한 왕을 세워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겠다는 예언을 하셨고(참조,
창 49:10), 모세 시대에는 왕의 옹립과 옹립된 왕이 지켜야 할 구체적인 규례까지 계시해 주심으로(참조,
신 17:14-20) 이스라엘의 왕정 정치를 허락하고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정작 이스라엘이 왕정을 요구 때 그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기 위해 준비하셨던 왕정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으로 허락하셨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요구한 왕정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왕정과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실시하시고자 하셨던 왕정은 단순한 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왕에 의해 실행되는 '신권적 왕정 정치'였는데 반하여 이스라엘이 요구할 왕정은 세속적인 왕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간적인 왕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만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정 요구에 대해 '그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
삼상 8:7)고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던 것이며, 그들의 요구대로 세속적인 왕정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에 따른 많은 고통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서에 나타난 '왕정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적인 왕정의 거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신실한 왕에 의해 인정되고 실현되는 '신권적 왕정 정치'였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정을 요구하자 그들을 위해 준비된 축복이 분노의 표현으로 바뀌었다는 점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2. 예정론과 자유 의지
사무엘서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또는 자유 의지와의 관계인데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옹립과 폐위와 관계된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다.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된 사울은 치세 초기에 성령의 통제를 받아 움직이는 지극히 겸손한 자요 선한 왕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희생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왕이 되었고 사무엘은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한 왕을 심하게 책망하면서 이제 후로는 사울 왕의 나라가 영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하여 사울에게 주어졌던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다윗에게 이양되었고, 왕족 역시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게서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에게로 이양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분명히 사울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한 결과, 즉 사울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악하게 사용한 결과로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사울에게 있었다. 그런데 성경의 또 다른 곳, 예컨대
창 49:10절과 같은 곳에서는 '홀(왕권)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됨으로써 유다 지파의 영원한 왕권이 이미 족장 시대 때부터 예정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즉 베냐민 지파로부터 유다 지파에게 통치권이 이양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이양된 것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울 왕의 폐위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므로 사울에게는 어떠한 도덕적 종교적 책임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 모든 책임이 있다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울에 대한 어떠한 동정이나 위로의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위로는커녕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로 응분의 심판을 받으며, 멸망의 길을 향하고 말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의 폐위가 전적으로 사울 자신의 죄의 대가일 뿐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거나 하나님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허용 작정 면에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의 모든 것을 예정하셨지만 그의 타락과 멸망은 그의 불순종과 불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예정론과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두 가지 이해로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는 것이요 인간의 자유 의지는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에 초점을 맞춰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서에 나타난 예정론과 자유 의지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예정을 이루어 가심'이라 할 수 있다.
3. 순종에 대한 고찰
사무엘서에서 강조된 대표적인 신앙 인격 중의 하나가 바로 '순종'이다. 아니 적어도 사무엘서에 있어서 순종은 다른 어떠한 신앙의 덕목보다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제사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의 강조가 사무엘서에 와서 갑자기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창조로부터 사무엘서에 이르기까지 순종은 끊임없이 강조되어 오다가 사무엘서에 와서야 비로소 문자화되어 강조된 것뿐이다. 이제 성경이 증거하는 순종의 흐름을 살펴보면 다름과 같다.
1) 창조의 원리로서의 순종
순종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던 창조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에는 자연 만물의 절대적인 순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절대적인 원인과 근거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창조의 방법은 말씀에 대한 자연 만물의 순종'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종의 개념은 사무엘에서 처음으로 강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요구하신 최초의 의무였다.
2) 행위 계약으로서의 순종
자연에서 요구되었던 순종의 의미가 인간에게로 이전된 최초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행위 계약이다(참조,
창 2:16, 17). 행위 계약의 핵심은 순종이었는데 이때의 순종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걸려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고, 그리하여 영혼이 멸망에 처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창조의 원리로서 시작된 순종의 개념은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된 최초의 의무로 이어졌으며, 그 의미도 단순한 의무로서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의미로 부여되었다.
3)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난 순종의 개념
인류 최초의 제사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에 의해 드려졌다. 그런데 이들의 제사에서도 순종의 개념은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창세기'의
창 4:1-5 주해 부분 참조). 이러한 사실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서의 증언에 대한 실례이다.
4) 족장들의 신앙 속에서 나타난 순종의 신앙
창조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순종의 개념은 족장들의 시대에 와서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으로 활짝 피어났으니 그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백 세에 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의 순종이다. 특별히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아름다운 순종의 절정을 이루는데 백 세에 난 아들을 순종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순종과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의 뜻에 조용히 자기의 몸을 내맡긴 이삭의 순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시는데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순종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5) 순종과 모세의 율법
이러한 순종의 개념이 최초로 성문화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였다. 특별히 '순종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때 임하는 축복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따르는 저주를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명시해 놓으셨다. 이러한 율법의 명시로써 창조로부터 이어오던 순종의 개념은 이제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의 의무로 주어졌던 것이다.
6) 순종에 대한 결론
이렇듯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점차 그 의미가 확대 발전된 순종의 개념은 사무엘서에서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강조되었을 뿐 사무엘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거나 언급된 것이 아니며,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대속물로 내놓기까지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 완성되었고,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주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