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가 중국 주엽나무를 심은 것은 1532년(중종 27), 그의 나이 42세 때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간신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오히려 그의 세력에 밀려 좌천되었다그것도 모자라 파직된 후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심고 책을 읽으며 전원생활에 젖어들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경산에서 산림복합농장인 동아임장을 경영하는 함(咸)회장과 달성군 논공에 새로 임야를 마련하여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사장과 함께 10여 년 전 인도정부가 기증한 보리수(菩提樹)나무를 심었다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를 찾았다. 그러나 신문기사 내용과 달리 적멸보궁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나는 종무소를 찾아가 옛 신문을 보이면서 물어보았으나 그들로서도 모르는 일이라 하여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 경주 옥산서원을 찾기로 했다.
서원에는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심었다는 우리나라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중국 주엽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가 있어 보기 위해서였다. 날카로운 가시와 긴 꼬투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우리나라 주엽나무와는 가시의 생김새에서 약간 차이가 날 뿐 외관상으로 크게 구분되지 않는 나무다.
회재(晦齋)는 조선 전기 문신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아버지 번(蕃)이 양동마을 손씨 가문으로 장가를 들게 됨에 따라 그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가 이시애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 계천군 손소(孫昭, 1433~1484)이었던 만큼 그의 출생은 자못 화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과 달리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인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맞는다.
외로운 소년 언적을 아버지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펴 주었던 사람은 공조·이조판서와 경상·전라·충청·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외삼촌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이었다. 훗날 언적이 조선 18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모셔지는 영광스러운 인물로 성장한데에는 외삼촌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두 분의 관계를 두고 ‘우재(우재 손중돈의 호) 없는 회재는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즉 우재의 보살핌과 배려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회재가 있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1514년(중종 9년), 24세에 급제하고, 고향 경주부의 교관을 시작으로 초급관리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가는 도중 1519년(중종 14) 그의 나이 29세 때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다. 조광조 등 이른바 신진 관료들이 진출하면서 기존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현량과를 설치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왕실의 상징인 소격서를 없애는 한편,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들의 위훈을 낮추거나 폐지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치자 지나치게 급진적인 그들에게 실망을 느낀 중종의 미움과 이를 못마땅해하는 일부 훈구파 세력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정변이다.
이 때 같은 연배(年輩)의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 또는 파직되었으나 회재는 몸을 보전해 그 후 관료로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학자로 대성할 수 있었다. 이는 개혁이 곧 정의라는 신념으로 구체제를 일대 혁신하려는 파당을 쫓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신의 인격도야에 매달리며 맡은 바 직무만 성실히 해온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철학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그가 그 후 성균관 전적, 병조와 이조의 좌랑, 인동현감, 사헌부 지평, 경상도 어사 등을 역임하면서 공직자로서는 최고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청백리로 뽑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회재가 중국 주엽나무를 심은 것은 1532년(중종 27), 그의 나이 42세 때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간신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오히려 그의 세력에 밀려 좌천되었다그것도 모자라 파직된 후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심고 책을 읽으며 전원생활에 젖어들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의 예상과 같이 국정을 농단하던 김안로가 실각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재는 사람을 볼 줄 아는 통찰력도 지녔던 것 같다. 다시 등용된 그에게 대사성,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경상도관찰사, 판중추부사 등 주요한 직책이 주어졌으나 노모를 모셔야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 한편으로는 사양하고 한편으로는 나아갈 때도 있었다.
1547년(명종 2), 그의 나이 57세 때 윤원형 일파가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된다. 그는 그 곳에서 오로지 학문에 매진하여 좬대학장구보유좭 좬구인록좭 좬봉선잡의좭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1568년(선조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이듬해에는 ‘도덕이 있고 박문(博聞)한 것을 문이라 하고, 의를 주로 하고 덕을 행한 것을 원’이라 하여 문원공(文元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후 제자들에 의하여 옥산서원이 세워지고 경주 향현사에 있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성주의 천곡서원을 비롯해 전국 15여 서원에 모셔진다.
옥산서원은 수 년 전 찾았을 때와 달리 더 정갈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양동마을 손서 고택과 같은 큰 향나무 두 그루가 이채로웠으나 찾고자 하는 중국 주엽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별채인 독락당에 있다고 했다. 회재가 마음을 닦던 세심대를 지나 독락당으로 향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처첩 등이 혹 굶주릴 때가 있었다는 좬조선왕조실록좭 의 졸기(卒記)와 달리 현재 종손이 거주하는 집은 퍽 아담해 보였다.
1601년(선조 34), 손자 준과 순 두 형제가 지었다는 안내판이 있다. 잦은 방문객들에 시달렸는지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있었으나 결례를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독락당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원줄기가 썩어 베어버렸다는 기록과 달리 500여 년이라는 수령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것 같았다.
또한 대문간 옆에 어린나무가 한 그루 더 자라고 있어 후계목을 미리 길러 장래를 대비해 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았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우리 현실에 맞도록 재해석하고 이를 퇴계 이황에게 잇게 한 학자로서, 부모를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원한 효자로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일한 관료로서 일생을 보낸 그의 혼이 서려 있는 귀중한 나무를 보면서 많은 교훈을 읽을 수 있었다. |
첫댓글 좋은 정보 잘 보고 갑니다ㅣ. 촌에서 자라 누구보다도 나무, 열매, 나물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주엽나무에 대한 많은정보가 있군요.. 내 고향 시골 배밭 입구에도 한포기가 있습니다..가시달린 이나무가 주엽나무라는 사실도 오늘 알았네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