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블루스' 안정애 이야기.
제가 진행했던 안정애 관련 방송원고로 대신 올립니다.
참고 삼아 봐주세요.
[박성서의 음악파일-안정애 편, 첫 번 째]
-2005. 4.1
오늘은 50-60년대를 풍미하며 지금까지도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가수
안정애씨에 대한 노래와 얘기를 준비.
안정애씨는 애조를 띤 허스키한 매력적인 음색으로 특히 블루스라는 제목의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리듬&블루스와는 다른 장르)
아울러 영화주제가를 많이 불렀는데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녀가 발표한 노래 중 블루스라는 단어가 직접 제목에 들어간 노래는 데뷔곡인 ‘밤비의 블루스’를 시작으로
‘대전블루스’, ‘순정의 블루스’ 등 자그마치 20여곡이 넘게 발표.
안정애씨는 1936년 경남 하동에서 대의원까지 지낸 부친과 포목상을 하시던 모친 사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형제가 자그마치 열 두 남매로 그의 모친은 자식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당시 하동군수로부터 표창까지 받았었다고.
안정애씨의 본명은 안순애.
유년 시절 안정애씨는 당시 작명가로부터 이름에서 달이 구름에 가린 형상이라
객지로 자리를 옮겨야 빛을 발한다는 말을 듣고
이 때부터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움.
실제로 그의 열 두 형제들은 모두 노래를 잘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큰 가수가 되는 안정애씨 자신이 집안에서 노래를 가장 못한 축에 들었다고.
또한 집이 하동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위치한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지방공연을 오면 종종 그녀의 집에서 기거를 했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들을 접하면서 더더욱 연예인의 꿈을 키웠고
특히 당시 신인무명가수였던 박재란씨와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둘은 외모부터 목소리까지 닮아 주위로부터 쌍둥이라는 소리까지 들음.
고향 하동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안정애씨는 스무 살 되던 해
드디어 화려한 가수에의 꿈을 안고 몰래 가출.
말 그대로 비로도치마에 삐찌꾸두를 신고... (삐찌꾸두란 뾰족구두를 그 당시는 그렇게 부름.)
그러한 멋쟁이 차림으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으나
정작 가수에의 길은 전혀 찾을 길 없어 두 달 간 친구 언니집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기거하다가
결국 헛수고로 끝난 채 고향으로 되돌아옴.
그러나 몇 개월 뒤 또다시 몰래 집을 빠져 나와
다시 서울로 도주해 레코드사의 특약점 등을 돌아다니며 가수 데뷔의 길을 찾아보았으나
역시 쉽지 않은 일.
그러던 중 우연히 가수 고복수씨가 설립해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의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이에 주저치 않고 가수과정에 등록.
허나 안정애씨는 차비가 없어 당시 청파동에서 학원이 있던 명동까지 매일 걸어 다니며 노래를 배우기 시작,
학원에 등록한 지 1주일 만에 운 좋게도 꿈의 무대인 신인콘테스트 선발무대에 서게 됨.
이 신인콘테스트에서는 블루스, 트로트, 발라드를 각각 한곡씩 모두 세 곡을 부르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당시 히트 명곡이었던 ‘카츄샤의 노래’와 ‘봄날은 간다’, 그리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을 불러 신인가수로 발탁,
작곡가 김부해선생(당시 신세기 문예부장)에게 픽업되어 드디어 첫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됨.
이 노래가 바로 그녀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밤비의 블루스’.
이 노래를 NG 없이 단 한 번 만에 녹음을 끝냈다고 하는데 빅 히트하면서 말 그대로 신데렐라로 부상.
지금 이 노래 감상, 특히 단 한 번 만에 취입을 끝냈다는 바로 그 녹음 테이프에서 직접 준비.
김방아 작사, 김부해 작곡의 이 노래는
1958년에 취입된 그녀의 데뷔곡으로서 역시 ‘블루스의 여왕’답게 첫 곡부터 블루스곡.
[노래 01] 안정애-밤비의 부르스
(김부해 작사, 작곡)
이 노래 취입 당시 본명 안순애 대신 안정애라고 얼떨결에 예명을 쓰게 된 그녀는
이 노래가 빅히트함에 따라 자연스레 이름이 안정애로 굳혀짐과 동시에
신세기레코드사, 당시 이름은 신신레코드사의 마스코트로 급부상하며 많은 사랑을 독차지.
특히 ‘대전부르스’, ‘순정의 부르스’, 그리고 ‘이별의 김포비행장’, 영화주제가 ‘애증산맥’ 등이
모두 데뷔한 지 1,2년 사이에 발표해 히트시킨 곡들로
특히 작곡가 김부해 선생과는 콤비를 이뤄 좋은 곡들을 발표.
레코드사 측 역시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유독 아꼈기 때문에
신세기의 간판여가수이자 마스코트로 인기를 독차지하며 동시에 신세기레코드사는 녹음실인 장충스튜디오까지 설립하는 등
안정애씨의 인기와 더불어 레코드사 역시 전성기를 구가.
특히 빼어난 미모와 허스키한 매력적인 목소리로
미8군 쇼 단체에 스카우트되어 미8군 무대에 설 것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당시 신세기 강윤수 사장이 목을 많이 쓰게 되면 목소리를 쉬어버리고 또 가수로서의 수명이 짧아질 것을 우려해 반대,
미8군 무대에 서지 못했고 또한 영화 출연 역시 제의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사장이 허락하지 않아 역시 불발.
결국 가수 활동, 즉 음반 취입 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함으로서 가수로서의 목소리를 관리해주며 배려해준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역시 메이저회사 대표답게 가수들의 관리를 잘하셨다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반면 늘 SP음반의 앞뒤를 장식하던 신신레코드사의 대표적인 남녀 인기가수의 파트너 격이었던 남자가수 윤일로씨는
'항구의 밤' '추억의 영도다리' 등의 히트와 더불어 지방,
특히 부산공연을 잦게 갖자 목을 버렸다고 도중하차시킨 일화 역시 유명.
이어 준비한 곡은 안정애씨가 발표한 또 하나의 부르스곡 ‘순정의 부르스’.
이 노래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작곡자 이재현씨의 작사, 작곡의 노래로 1961년도에 발표된 노래.
[노래 02] 안정애-순정의 부르스
(이재현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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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음악파일-안정애 편, 두 번 째]
-2005. 4.8
오늘 역시 지난 시간에 이어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50-6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매력적인 가수 안정애씨 편으로 준비.
그녀가 발표한 블루스곡 중에서 제목에 블루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노래 제목을 살펴보니
그의 대표곡인 ‘대전부르스’를 비롯해 데뷔곡인 ‘밤비의 부르스’, ‘순정의 부르스’,
‘여인부르스’, ‘다방부르스’, ‘도라지부르스’, ‘연락선부르스’, ‘탄식의 부르스’ 등 자그마치 20여곡에 이르고
또한 그녀의 여섯 살 아래의 여동생 안숙자씨 역시 가수가 되어 단 한 곡의 노래를 듀엣으로 함께 취입했는데
그 노래 제목은 ‘자매의 부르스’.
허스키한 음색과 멋진 외모를 가진 미녀가수였지만 오직 가수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미8군 무대나 극장무대, 그리고 심지어 영화 출연 제의까지 거절해야 했던 그녀는
고향 언니의 소개로 서른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지만
신랑이 미군 PX 사무관으로 미국 현지로 발령 나는 바람에 가수활동을 포기할 수 없어
미국을 따라가지 않고 결국 헤어지고 국내에서 가수활동에만 전념했을 만큼 오직 가수이기만을 고집.
안정애씨는 비록 영화 출연 제의를 거절, 영화배우의 길은 포기했지만
가수로서 해야 영화주제가를 특히 많이 부름.
그가 불러 히트한 노래 ‘대전블루스’는 59년에 취입되었지만
그로부터 4년 뒤인 63년, 이종기 감독에 의해 ‘대전 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고
또 당시 영화 ‘길은 멀어도’, ‘너는 말했다’, ‘애증산맥’, ‘베니스의 애가’ 같은 영화주제가를 불러 사랑받기도.
지금 준비한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이기도 한 노래 ‘대전부르스’.
이 노래는 79년, 조용필씨가 리바이블해 빅 히트를 다시 기록하기도 했고
1999년도에는 대전역 광장에 이 노래의 노래비가 세워짐.
이 노래 '대전부르스‘는 일본에서도 꽤나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켜 안정애씨 역시
10여 차례나 일본공연을 갖는 등 한때 접어야 했던 무대 활동을 뒤늦게나마 다시 이어갈 수 있도록
기폭제가 되어주기도 한 노래이기도.
허나 이 노래비에 정작 이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이름이 표기되지 않아 매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이 노래는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으로 증기기관차가 열차를 끌던 50년대 말,
그러니까 59년에 발표된 노래. 이 노래 역시 당시 취입된 녹음 마스터테이프에서 직접 감상.
[노래 03] 안정애-대전부르스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그는 가수생활을 접은 후 한때 매우 어려운 생활을 겪기도.
딸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78년 무렵에는 보증금 1만원에 월세 3천원 짜리 단칸방에 살며 야채가게를 시작,
직접 새벽마다 채소밭에 나가 배추나 오이 등을 따서 장사를 시작하고
또 숯을 봉지에 담아 팔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앉아 일하느라 허리병까지 앓았다고.
이어 79년부터는 다방 그리고 치킨센터를 차려 종업원 없이 혼자 도맡아 일을 했을 정도로 고된 생활 연속.
그러나 이러한 일로 생계를 이어 가면서 본인이 왕년의 인기가수였다는 사실만큼은 철저히 숨겼다고 하는데
그 것도 오래가지 않아 결국 모 여성지에 이러한 안정애씨의 생활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고 이어
TV에 까지 소개되면서 결국 찾아오는 팬들로 인해 더 이상 장사를 순수하게 할 수 없어 모두 정리함.
이러한 고생 끝에 키운 그녀의 외동딸은 훌륭하게 자라 숙명여대 불문과를 나온 뒤
현재는 결혼해 무의탁 가장이나 어린 학생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안정애씨 역시 집에 있는 이불들을 모두 딸에게 보낼 정도로 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중.
주위 누구에게도 선생님, 선배라는 호칭 대신 언니,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권위주의를 버리고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한 손이나 몸에 보석 장신구를 두르기보다는 스스로 인간보석이 되어야한다는 지론으로 생활.
남대문시장 새벽 쇼핑을 자주 하는 편.
원로가수로써 그녀에게 바람이 있다면 늘 느끼는 것처럼 전국에는 외로운 노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며
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공연을 통해 이들과 함께 손뼉치며 눈물도 함께 흘리고 싶다고.
실제로 그녀는 경로위문공연단체인 한마음봉사단의 김영수 단장과 함께
18년간 공연을 하며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고
이러한 공로로 작년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즐겁게 사는 방법은 그들과 더불어 있는 곳이 늘 궁전이고 잔치라는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가수 안정애 선생은 아직도 롱드레스와 청바지, 부츠가 여전히 잘 어울리는 멋쟁이.
오늘 마지막으로 준비한 노래는 홍성기 감독의 영화 ‘길은 멀어도’의 주제가.
이 노래는 강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으로 1960년도에 발표.
[노래 04] 안정애-길은 멀어도
(강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