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1354(고려 공민왕 2)∼1417(태종 17)]
◀ 완산부원군 이천우 영정
-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경기전)
휘는 천우(天祐)이며, 시호는 양도(襄度)이다. 완풍대군의 차남으로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남평문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크고 너그러워 숙부인 태조고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태조고황제의 휘하에 종군, 누차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황산대첩에서 아기발도를 토벌할 때 귀와 코에 부상을 입었다.
요동정벌 때 상호군으로 참전하였으며, 태조고황제의 회군을 도왔다. 또 1392년 조선개국에 즈음하여 여러 신하가 태조고황제에게 즉위를 권할 때, 태조고황제가 세 차례나 불가하다고 사양하며,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자 공이 태조고황제를 부축하여 등극케 한 공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 1396년(태조 5) 강원도 조전절제사가 되어 왜구토벌에 진력하였다.
1399년(정종 1)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되고, `박포의 난'을 평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1401년(태종 1) 태종대왕과 삽혈동맹(챍血同盟), 1402년 안주도 도절제사가 되어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404년 개국 · 정사 · 좌명 3공신의 회맹(會盟)에 참여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1404년(태종 4) 태종대왕이 송도 · 신도(한성) · 무악 중 택일하여 천도하려 할 때 왕은 묘실(廟室)에서 향을 올리고 공에게 명하여 쟁반에 척전(擲錢 :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일)의 의식을 거행하니, 송도와 무악은 이흉일길(二凶一吉)이었고 신도는 이길일흉(二吉一凶)의 점괘가 나와 한성이 가장 길하므로 천도된 바 있다.
1407년(태종 7)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국초에 숭유문치(崇儒文治)의 길을 열었고,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1409년(태종 9) 병조판서와 삼군진무소 도총관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병정을 맡았다.
1413년(태종 13) 이조판서, 1414년 의금부 도제조를 역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16년(태종 16) 퇴직할 때 태종대왕은 “경이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보답을 못하였으니 좋은 논 80결(1결은 5두락, 1두락은 1마지기)과 노비 80명을 상으로 내리겠소.” 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차라리 저 손토시[?]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저에게 주십시요.” 하였다. 임금은 매사냥을 너무 즐겨서 정사에 소홀할까 해서 올리는 갸륵한 충고로 받아들여, 웃으면서 청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화공에게 명하여 공의 화상과 두 마리 매를 그리게 하고 어필로 `사 완산부원군 리천우(賜 完山府院君 李天祐)' 라고 쓰고 두 마리 매와 함께 하사하여 청고한 지행(志行)을 천추에 기리게 하였다. 공의 부조묘(지방문화재)에는 하사받은 영정과 두 마리 매그림(문화재자료 제22호)과 회맹축(會盟軸), 포총교지(褒寵敎旨)가 보존되고 있다. 영정은 1774년(영조 50)에 어진화가 한종유(韓宗裕)가 개보했고, 두 마리 매의 당초의 그림은 손상되어 숙종대왕 때 다시 그렸다. 우참찬 유최기(兪最基)가 1747년에 찬문(贊文)을 쓴 목각판(木刻版)도 함께 남아 있다.
완산부원군 연보
필자 : 이창헌
돌아가신 후(後)
세종 원년(1494), 상왕(태종)이 신왕(세종)과 동교대산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마를 서로 바꾸어 타며 후에 정승이된 지신사(智申事) 하연(河演)에게 이르기를"우리 부자의 이 다정한 모습은 고금에 드문 일이로다. 다만 완산군(양도공 이천우)이 이 자리에서 이를 보지 못하니 그것을 안타까와 하노라"하며 추념하시었다.
세종 6년
2월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세종은 정승들을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태종께서 항상 하륜과 이천우의 공을 말씀하시었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냐?"고하니 대신들이 극구 찬동하여 배향되었다. 함께 모셔진이로 진산부원군 영의정 하륜, 한산부원군 충무공 조영무, 청성부원군 우의정 정탁, 계림군 경절공 이래가 있다. 배향공신이란 임금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를 사후에 종묘에 신주를 함께 모시는 것으로 신하로서 가장 튼 영예엿으며 자손들은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 받았다. 조선조 500년동안 83분의 위폐가 종묘에 모셔졌다.
세종 9년 1월
경연에서 강목통감을 강론할 때 왕은 중국의 소사를 상고하며 사병의 폐단을 말씀한 후 "옛 날 태종께서 군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병을 폐함이 어떤가'하니 오직 완산군 이천우만이 '파해야 마땅하다'하였으니 완산은 과연 식견이 높은 사람이었다" 칭송하셨다. 참판관 김자가 대답하기를 "신이 완산군 이천우를 일찍이 뵈오니 참으로 어진 재상이었습니다"하였다.
광해 8년(1616년)
사람들이 공의 충의와 공렬을 기려 발의하여 영광 묘장 오봉산기슭에 사당을 세워 춘추 향 사를 거행하였으니 영당사(影堂祠)라 이름하였고, 이는 뒤에 서원이 되어 선현을 추모하고 유생을 교육하는 도장이 되었다. 묘장서원은 1934년 중건되었는데 양도공의 후손 중 학문과 충렬이 뛰어난 일곱분이 함께 모 셔졌다. 이서원은 한때 영신학당이 병설되어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했다.
영조 50년 1744년
태종께서 하사하신 영정이 좀이 슬고 색이 바래 다시 그리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화공을 가 마로 태워왔다. 화공은 어진(御眞)화가 한종유이다. 이때 당시 이조참의 박사해가 14세 종손 이석의 요청으로 "완산부원군 화상 이모찬"을 지었다.
양도공의 배위와 자손
정경부인 여흥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따님이다. 민제는 태종의 왕후 원경왕후의 아버님 이니 태종과 양도공은 4촌간이면서도 동서간이 된다. 민씨는 장자로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여양군 굉(宏)을 두셨다. 계배 황보씨는 황보 담의 따님인데 슬하에 2남을 두셨으니 지돈녕부사 여성군 완과 판서 여 흥군 선을 두었다.
부조묘 및 종가
처음 세워진 것은 성종초엽 추정 위치; 전남 영광 조선조에서는 명절이면 나라에서 제수를 보내 양도공의 공훈을 기리기도 했던 종가는 현재 의 종손(22대손) 규헌(국전 특선작가)이 지키고 있다. 양도공의 증손 효상(孝相)이래 23대 종손 기정까지 500년간 20대가 태어난 집이다. 대표적인 소장물은 양도공영정, 이응도(二鷹圖) 목판, 포총교지, 양도공 부조묘 및 종가 모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숙종 8년 포총교지의 원본과 이응도 중 백송골도가 화재를 당하여 노화송골의 형태에다가 흰색칠을 하여 보완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