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여섯 관부(官府).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를 총칭한다.
그런데 이 많은 관청들은 왕이 거처하고 집무를 보는 곳인 궁궐에 있지 않고 궁궐과 가까운 곳에서 집무를 보았는데 그 곳이 바로 '육조거리'이다.
육조 거리의 위치는 지금 광화문 앞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이 있는 세종로이다.
↑ 육조거리의 구성은 대략 이렇게 조성되어 있었다.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이라는 도시를 만들며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낸것이 현재 광화문 광장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이다.
이 때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의 입구까지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39m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된 것이다.
몇년전 광화문 광장을 새로 조성할때 토층 검사를 해보니 조선 건국 이래 도로를 4번은 깐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됐다.
거리의 폭만해도 60미터가 넘음으로써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거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구한말의 사진이 남아 있어서 그 모습을 현재에도 알 수 있습니다.
의정부,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실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있어 이들의 합의로
국가 정책을 의결하였고, 그 아래에 육조를 두었다
의정부가 있었던 자리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오랜 기간동안 정부대변인 역할을 했던 공보처, 문화부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성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 시설의 설치.운영을 총괄하는 곳으로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였다
호조, 인구 및 재정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호구의 관리, 각종조세의 수취, 식량과 재화의 관리 등 국가의 재정과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한성부와 호조가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는 국가통신망의 중추를 담당하는 KT 본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기로소,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문관으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내고 70세가 넘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기로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관청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교보빌딩이 들어서 있다.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등의 관아가 있었던 육조거리 동쪽편 관청 건물들
도심을 재개발하면서 육조거리 동쪽편을 흐르던 작은 개천인 열천을 복원해 놓고 있다
예조, 의례.교육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문화부', '교육부', '외교부'에 해당한다. 국가적인 의례와 음악, 제사의 시행, 학교와 과거의 운영,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예조는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행사연습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예조가 있었던 자리에 무반을 상징하면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오늘날 합참본부에 해당하는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
이때 예조는 한성부가 있던 자리로 옮기고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예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정부종합청사. 이곳에는 옛 관아건물로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중추부, 문무 당상관이면서 소임이 없는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대우하는 관청이다.
본래 이 관청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최고의 군사기구였으나 뒤에는 고위 관료들을 예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사헌부, 언론 및 감찰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감사원'과 유사한 관청이다.
국왕에 대해 간언하고, 관원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사헌부와 중추부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도심공원으로 바뀌었다
병조,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무관의 인사를 비록하여 국방과 군사의 제반 사항, 봉수, 역참 등을 담당하였다.
형조, 법률.사법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범죄의 조사 및 처벌, 소송, 노비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공조, 국토의 관리나 공사, 공예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난 '국토해양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산림의 관리, 치수, 건축, 토목, 그리고 수공예 등을 담당하였다.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해방이후에도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문화공간인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공조 남쪽편 관청 건물들
공조 남쪽편 작은 관청 건물들은 대부분 개인소유의 상업건물로 바뀌었다.
광화문 광장 서쪽편 세종문화회관 주변. 관아 뒷편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청계천 개울이 흐르던 곳으로 지금도 골목이 남아 있다.
1890년에 육조 거리(지금의 광화문 광장을 포함한 세종로)에 있는 해태상앞에서 말을 탈 사람을 기다리는 마부
1894년 광화문과 육조 거리
1896년도 육조 거리
사진만 봐도 도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표현이 거리로 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광장이란 말로 대신해도 될듯하다.
광화문에서 바라본 육조거리
조선 최고의 관청이 모인 거리이지만 관원, 일반 백성, 아이들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 두 개가 있는데 그 해태상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였다.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은 일제침략기 때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생기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그 일대도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을 겪으며 모두 사라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철거되기 직전 1920년쯤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1902년에 찍은 육조거리 인근 모습.
왼쪽 가운데쯤에 광화문이 보인다
1906년의 육조거리
↑ 당시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보여주는 미니어쳐.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이었지만, 조선 왕들은 경복궁에 있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청와대
경복궁
세종대왕
이순신
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황금 라인인 광화문 광장
2016년에 우린 622년전의 준비된 기운을 받아 단군이래 가장 뜨거운 민족의 외침을 모았던 것이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395년 불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2016년엔 단군이래 가장 뜨거운 촛불이 밤을 밝혔다
광화문에 다시 가실때 오늘 읽으신 것을 상기하신다면 동행자분들에게 꽤 하실 말씀이 많아지실꺼 같습니다.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더 행복하세요
첫댓글 오, 잘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덕분에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ㅎㅎ
안녕히 주무세요
병조가 제일 작네 의금부랑 같이 붙여주던가
이러면서 나라에 큰일이 나면 군관들은 뭐하고 있었냐고
헛소리나 했던거네 남한산성보고와쓴데요
사대부 지들 자존심이 백성만 더 죽인꼴이죠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아 잇엇다면 대단한 문화유산이 되엇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