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힌슨, 청교도신학, 박영호역(기독교문서선교회:1994)
윌리엄 퍼킨스는 탁월한 설교자로 그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워익셔(Wawichire)에서 태어나 캐임브릿지의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학자다운 능력이
두드러졌으나 사생활은 광폭하고 죄가 많았다. 개종한 후에는 칼빈주의의
뛰어난 대표자가 되었으며, 언제나 영적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
겼다. 그는 1584년 대학에서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퍼킨스는 후에 성직을 부여받고 캐임브릿지 감옥에 수감된 죄인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젊은 사형수를 만나서 이야기했다. 이 청교도 설교자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서, "당신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라"고
기도했다. 그는 그 사형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방법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게 주님을 믿고 죄사함을
체험하라고 전했다. 그 젊은 사형수는 그렇게 했으므로 침착하게 자신의 사형집행,
곧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의 영광스러운 빛을 맞이할 수 있었다. 퍼킨스의 선택과
유기의 도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이 사건을 명심해야 한다. 이 사건은 신학의
도움으로 그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냉담하고 무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85년경에 퍼킨스는 캐임브릿지의 성앤드류의 교구목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죽을때
까지 계속 그 일을 맡았다. 그의 저작은 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과 갈
라디아서 1장에서 5장, 마태복음 5장에서 7장, 히브리서 11장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
어졌다. 그는 실제적인 '양심의 사례연구'(Cases of Conscience)를 저술했다.
그의 저작들은 널리 인정을 받아서 라틴어와 불어,독일어,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이런 저작들은 '윌리엄 퍼킨스 전집'(The Works of William Perkins,1616~1618)이란
3권의 책으로 편집되었다.
1. 서론
퍼킨스의 '황금사슬이론'(Golden Chain)은 청교도신학의 설교의 기본적인 지침이다.
비록 청교도 설교자들이 모두 다 퍼킨스의 사슬의 세세한 부분까지 각자 다 일치하지는
않지만, 청교도들이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개혁의 신조라고 말한다. 구원론에 대한 그의
분석과 체계화는, 특히 선택받은 신자에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관련해 볼때,
놀란 만하다. 퍼킨스는 믿음은 죄많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진정한 회개는 죄를 깨
끗이 씻음으로 생겨나며 완전한 복종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황금사슬이론'의 가장 흥미있는 특징은 다만 일시적으로 죄많은 마음에서 우러난
참회를 하는 신앙의 열광자에 대한 것이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각자 개인이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교제밖에'(out of fellowship) 있다는 것을 이전보다도 더 많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퍼킨스의 개념은 리챠드 박스터의 교회론 선집에도 나타난다.
청교도들은 결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다만 세례와 사도신경의 신앙고백과 제단의 부르
심에 대한 응답과 같은 외적인 필요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귀의의 결과로 복종과 선행을 하는 진정한 신자들의
유종의 은혜를 설교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자신감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세속적인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식의 설교로만 풀 수 있
다. 그러므로 사울이나 유다의 희개와 같은, 감동적이기는 하나 거짓된 회개는 진정한 귀의
의 표시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청교도들은 대체로 또한 지나치게 신앙의 '열심'을 보여주려고 하는 '회심자'를 경계했다.
그들은 영적 열심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열심이 깊이 감춰진 회개하지 않은 죄를
'은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열심인 많은 사람들이 죄와 걱정을 승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
해준다. 또한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그들의 신도들에게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만큰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해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는 많은 활동을 보지만 참된 영적 성장과 경건한 삶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첫댓글 퍼킨스의 황금사슬도형을 보면, 중생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에 대한 개념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유효한 부르심 아래에 '유효한 선포와 듣기', '심령의 완화', '신앙' 이 세가지를 넣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중론과 관계해서 비교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심령의 완화'가 '유효한 부르심'의 개념 아래에 있고 또한 '유효한 선포와 듣기' 바로 다음에 오는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연중론이 강조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유효한 부르심' 바로 뒤에 '예비은혜'가 있다는 것. 물론, 연중론은 유효한 부르심 앞에도 '예비은혜"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유효한 부르심이 있기 까지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됨을 강조합
니다. 이런 황금사슬도형이 과연 순중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연중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연중론마인드맵과 비교해 보심이 어떠실지요?
교회에서 누구하고도 의논할 수 없이 수년간 혼자 고민했던 회심의 여정... 연중론을 접했을때 참으로 일치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거듭남(요 3:3)'에 관한한 연중론을 지지합니다. 그렇지만 ---론은 하나의 현상학 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신학이 아닌 신앙에 있는데, 신학에 바르게 서 있다고 여겼던 분 조차 한 사람의 구원을 '절차"에 집착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멀어져 결국 또하나의 자신만의 집을 짓게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연중론의 마인드 맵의 아이디어에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지합니다. 하지만 오늘 작은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맞습니다..뭐든지 지나치면 과한것이지요..좋은소리도 세번 들으면 지겨워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 입니다..
기탄없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다만 사랑이 듬뿍 담긴 정다운 언어로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두가지 병폐를 보았는데,.은사주의자는 교리주의자를 경시 합니다..반대로 교리주의자는 은사주의자를 천시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를 아우를만한 그것,,.딱 무엇이라고 할만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인것 같습니다..
체험신앙에 물들어진 지난날 때문에 ,.
신학에 몰두하고자 했더니..이제는 교리나 신조안에서도 무언가의 한계를 느낍니다..
가장 고민스런 문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본 이들이 없는,
그야말로 신학적 소양만을 가지고 강단에 서는 이들에대한 부족함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제가 몇일전 상주의 열방센터에서 가졌던 의문,
신학적소양(선교사님들은 전문적신학교육을 받은분이 별로 없음)을 지니지 아니 했음에도,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를 전할때에 은혜가 되더이다..
간혹 신학적으로 점검 받아야 할 부분이 비쳐지긴 했지만,..
수십년을 목회에 전념해온,.그 어떤 강사님!
제가 보기에도 세속화에 물든 설교를 듣노라니,.받은은혜가 물릴뻔 하더군요..
제자신은 이 중생론 토론에 있어..어느 --론이 옳다 그르다로 접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르다>로 보는것입니다..
우리는 흑백론 신앙에 얼마나 젖었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분량따라 사시는 것이,.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야베스 저는 연중론이 잘 정립되기를 바라는 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노력들을 적극 지지합니다.
@고벨 순중론에 물든 세월이 50년이라 합니다..
개혁주의노선의 전통속에서 무엇이 바른신앙인가를 살펴보자는데,.
그 무엇이 그렇게 어려운지요..
고벨님!!..지켜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어떤 개인의 욕심이 아닌,.한국교회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이일이 시작 되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정야베스 동의합니다^^
토론에 참석하지 않고 글을 읽는 '혜택'만 입다가 이렇게 글 남겨서 죄송합니다....
죄송할것 없습니다..우리 주님은 `예` `아니오` 를 분명히 할줄아는 이에게 기뻐할것 입니다..
네....정야베스님의 글들에서 그러한 안타까움이 느껴졌었습니다...
저는 연중론이 잠자는 교회를 깨우리라 확신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성령의 체험이 어떻게 닥아오는지 모르는 분들에게..
이 연중론은 참다운 물음과 도전이 되리라 확신 합니다...
개혁주의노선 중요합니다..
신뢰할만한 목회자..신학자의 주장도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객관적 요소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또는 십자가의 사랑이 느껴지는 주관적 만남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각자가 받은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제발 헐뜯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사탄이니 이단이니 이딴소리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수십년 교회를 다녀도 구원의 확신조차 없는 수많은 영혼들..
또한 구원을 받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무리들..
저는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수십년 다녔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죽기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려 봐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맞는것인지 점검 해봐야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 합니다..
이런 분들이 양무리마을에 많아 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