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설 요령은 집사자(執事者)의 좌(左)가 서(西)요 우(右)가 동(東)이다.
따라서 젯상의 앞이 남(南)이 되고 뒤가 북(北)이 된다.
남(南)에는 제상 앞 중앙에 향탁을 놓고, 그 동(東)편에 주준상(酒樽床), 서(西)편에 축(祝)탁을 놓는다.
향탁 위에는 후면 중앙에 모사를 놓고 그 뒷줄에 합동로서(盒東爐西)로 향합과 향로를 놓고.
주준상 위에는 강신잔반(降神盞盤), 퇴주그릇 주전자 술병을 놓고,
향탁 앞에 배석(拜席))이며 북면(北面) 중앙에 신위(神位)인데 고서비동(考西東)이다.
제사상 진설(陳設)법은 각 지방의 관습에 따라 다른 점이 많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향교에서 권하는 제사상 차리는 법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진설하는 위치를 말할 때는 편의상 제사 지내는 신위를 향하여 우편을 동쪽, 좌편을 서쪽으로 정합니다.
북쪽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신위를 모실 위패(位牌)와 촛대를 마련한 다음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리고 진설이 다되면 사진 혹은 미리 써둔 지방을 위패에 붙입니다.
제사상 앞 가운데 위치한 향상에는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 놓으며
그 밑에 모사(茅沙)그릇, 퇴주그릇, 제주(술)등을 놓습니다
진설하는 방법에서 기본이 되는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밥은 서쪽(왼쪽) 국은 동쪽(오른쪽)에 위치 한다.
즉 산 사람의 상 차림과 반대 이다. 수저는 중앙에 놓는다.
◈
적은 옛날에는 술을 올릴 때마다 즉석에서 구워 올리던 제수의 중심 음식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제수와 마찬가지로 미리 구워 제상의 한가운데 놓는다.
◈ 좌포우혜(左脯右醯)
4열 좌측 끝에는 포(북어, 문어, 전복)를 놓고 우측 끝에는 젓갈을 놓는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생선은 동쪽에 놓고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하게 놓는다.
◈ 홍동백서(紅東白西)
과일 중에 붉은 색 과일은 동쪽에 놓고 흰색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 조율시이(棗栗枾梨)
조율시이라하여 좌측부터 대추, 밤, 감(곶감),배(사과)의 순서로 놓는다.
◈ 좌면우병(左麵右餠)
2열 좌측에 국수를 우측에 떡을 놓는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4열 동쪽에 김치를 서쪽에 나물을 놓는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 쪽에 놓는다.
진설하는 열은 모두 5열로 하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합니다.
◈ 제1열은 술잔과 메(밥), 떡국(설), 송편(추석)을 놓는 줄
앞에서 보아 떡국(송편)은 우측에 술잔은 좌측에 차린다.
시접(수저와 대접)은 단위제의 경우에 앞에서 보아 왼쪽에 올리며,
양위합제의 경우에는 중간 부분에 올린다.
◈ 제2열은 적(炙)과 전(煎)을 놓는 줄
대개는 3적으로 육적(육류 적), 어적(어패류 적), 소적(두부 채소류 적)의 순서로 올린다.
적 : 생선이나 고기를 대꼬챙이에 꿰어서 양념하여 구운 음식.
전 : 재료에 밀가루를 뭍혀서 후라이 팬에 부친 음식(부침개).
◈ 제3열은 탕을 놓는 줄
대개는 3탕으로 육탕(육류탕), 소탕(두부,채소류탕), 어탕(어패류탕)의 순으로 올리며,
5탕으로 할 때는 봉탕(닭,오리탕), 잡탕등을 더 올린다.
한가지 탕으로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 제4열은 포와 나물을 놓는 줄
좌측 끝에는 포(북어, 대구, 오징어포)를 쓰며 우측 끝에는 식혜나 수정과를 쓴다.
그 중간에 나물반찬은 콩나물, 숙주나물, 무나물 순으로 올리고
삼색나물이라하여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등을 쓰기도 하며
김치와 청장(간장), 침채(동치미, 설명절)는 그다음에 올린다.
◈ 제5열은 과실을 놓는 줄
동쪽부터 대추, 밤, 감(곶감), 배(사과)의 순서로 차리며
그 이외의 과일들은 정해진 순서가 따로 없으나 나무과일, 넝쿨과일 순으로 차린다.
과일 줄의 끝에는 과자(유과)류를 놓는다.
* 우리는 선주후면이므로 진안주로 술을 먼저 드시고
다음에는 진지를 드시며 마지막으로 숭늉을 드시고 물리치게 된다
祭祀床 위에 3實果의 敎訓
棗 栗 枾 (조율시)
제사를 모실 때 보면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있듯시 제수를 진설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과일로는 오색 또는 삼색을 쓰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치는 덕목 중의 하나는 아무리
간소한 제사라 할지라도 삼색 과일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棗 (대추와) 栗 (밤과) 枾 (감)
(조 ) (율) (시) -감이 없는 계절에는 곶감, 이렇게 세 가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없이 제사를 지냈다면 그 제사는 무효라며 다시 지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할 만큼 이 세가지는 절대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런가 하는 의미를 적어본다.
첫째로, 대추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추의 특징이라면 한 나무의 열매가 헤아릴 수 없이 닥지닥지 많이도 열린다는 것이
되겠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의 묘한 생리다.
그것은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불어도 그냥 꽃으로 피었다가
꽃으로만 지는 법은 없다. 꽃 하나가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
이것을 사람에게로 옮겨 놓으면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서 가야 한다 -그것도 많이 낳고서 가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제상에 대추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집안에 후손이 끊어지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막 혼례를 올린 신부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 된 사람들이 대추를 한 움큼 새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
주는것도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아들 딸 구별 말고’ 대추 열 듯이 많이 낳아, 자손이 번창케 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밤을 꼭 쓰라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밤이라는 식물도 생리가 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알의 밤이 땅속에 들어가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줄기와 가지와 잎이 되어 성숙한 나무를 이룬다.
여기까지는 여느 식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여느 식물의 경우 나무를 길러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 버리지만, 밤만은 땅속에 들어갔던 최초의 씨밤이 그 위의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도 절대로 썩지 않고 남아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건 간에 애초의 씨밤은 그 나무 밑에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그냥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밤의 생리는 이렇게도 묘하다. 그래서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자손이 몇 십, 몇 백대를 헤아리며 내려가더라도 조상은 언제나 나와 영적으로 연결된 채로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조상을 보시는 위패,
신주(新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다. 밤나무가 특별히 결이 좋은 것은 아니요, 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밤나무의 상징성 때문이다.
다음은 감이다.
감을 왜 꼭 쓰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역시 감이 지니는 묘한 생리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한다.
하지만 감 심은 데서는 절대로 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탐스런 감에서 나온 감씨를 심어도 거기서 나오는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고욤나무다.
감씨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그 나무에 고욤이 열리지 감이
열리지는 않는 것이다. 고욤은 생김새는 감을 닮았지만 크기는 도토리만하고 떫어서 다람쥐 같은 들짐승들이나 먹지 사람은 먹지 못한다.
감나무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감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된다. 그래서 3~5년쯤이 되었을 때
그 줄기를 대각선으로 짼다. 그리고 기존의 감나무 가지를
거기에 접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접합이 되면 그 다음부터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만약 장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줄기가 아니라 가지에
접을 붙이면, 한 나무인데도 이쪽 가지에선 감이 여릴고, 저쪽 가지에서는 고욤이 열리는 기묘한 일도 벌어진다.
감은 이렇게 묘한 과일이다. 이 감나무가 상징하는 바는 이렇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이 쓰신《격명요결(擊蒙要訣)》의 첫줄도 “인생사세(人生斯世)에 비학문(非學問)이면 무이위인(無以爲人)
이니라.” 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에는 생재기를 째서
접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先人)의 예지를 이어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제물 하나를 차리는 데에도 자손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망각한 채로 제상에 이들을 올린다면 마치 돌을 올리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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