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 인현동)에 났으며 성은 이씨고 자는 여해, 휘는 순신이고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에 순국 후 내린 시호다. 32세에 무과에 오른 후 국경 경비에 임하다가 47세에 전라 좌수사가 되었고 49세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의 전적으로는 옥포해전대첩과 당포해전대첩, 부산대첩, 한산도대첩, 명량해전대첩 등 수많은 전투에서 백전백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8년 11월 19일에 남해 노량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54세에 전사하고 말았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남해바다 전체를 지휘하고 임진왜란 때 여러 해전에 임했던 관계로 남해 쪽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굉장히 많다. 진도와 해남, 여수, 거제, 통영 등 왜적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모든 곳에 유적지가 있는 셈이다. 그곳엔 어김없이 기념관과 사당이 있다. 이곳 통영에도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가 가 보았던 <한산도 제승당>뿐 아니라 충무공을 추모하기 위한 신위사당인 <충렬사>와 착량언덕에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와 기신제를 올리는 <착량묘> 등이 있다.
한산섬은 82년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왔던 기억이 있다. 이후 민재가 두 살 때인 94년에 왔으므로 이번이 세 번째가 되는 셈이다. 남편 가족 모임으로 대구에서 통영으로 5시간 차를 몰고 가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통영유람선 선착장에서 출발했다. 통영에서 한산도까지는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가파른 계단위 '충무문'앞에서 - 현석](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inhyang.hihome.com%2F5052-1.jpg)
"한산셤 달 밝은 밤의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녀희 차고 기픈 시름하는 적의 어듸셔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라는 유명한 시를 알 것이다. 그 수루가 있는 한산섬 제승당... 통영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니 통영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아저씨가 이 시의 앞 구절을 읊는다. 청정해역이라며 바다면서도 섬이 많아 파도가 적다보니 굴과 김 양식이 아주 많다는 것과 곳곳의 구경거리도 놓치지 않고 설명을 한다.
한산섬에 다다르니 멀리 산꼭대기에 커다랗게 서있는 '한산대첩기념비'와 지나가는 어부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며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는 거북모양의 '거북등대'가 나오고 곧바로 표석이 있는 한산도 선착장이 나온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멀미를 하지 않아 좋았다. 굽이지는 해안선이 눈에 익어 멀리서 보아도 포근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제승당>에 3년 8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군사를 정비하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여러 가지 무기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이 머물면서 집무를 봤던 운주당(運籌堂) 옛터에 제승당(制勝堂)이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몇 번의 보수와 개축을 거쳐 현재까지 왔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한산도 앞 바다에서 학이 날개를 펴는 '학익진전법'으로 왜적을 대파한 전투 현장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이 전투가 자랑스런 전투였지만 일본인에겐 오욕의 전투였음을 알 게 하는 것이 통영에 있는 "해저터널"이라고 한다. 한산전투에서 패한 왜인들이 쫓겨가면서 물길을 만들기 위해 길을 뚫어 도망치려했던 '판데목'이란 곳에서 무수히 죽임을 당하자 일제강점기 때 왜군이 많이 죽은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고 터널을 뚫어 조선인들을 그 밑으로 지나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길이 461m인 이곳은 도보로 10여분이 되는 곳으로 수학여행 때 친구들과 한번 걸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번엔 그 위로 난 통영대교를 지나 차를 몰고 지나다녔다. 기회가 닿으면 한번 걸어보는 것도 남다른 기억이 될 것이다.
제승당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 1km정도의 해안산책로는 왼편으로는 송림과 오른편으로는 바다가 있어 운치를 더하는데 해안 가에는 굴양식이 풍성함을 보여주듯이 떠내려와 굳어 버린 듯한 굴 껍질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제승당>에는 제승당 본 건물 외에도 수루와 한산정, 충무사 등의 건물이 있다. 휴게소와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제승당을 관리하는 당장이 머무는 "수호사"가 있고 그 옆에 '우물'이 있다.
장군이 머물렀을 때 마셨다는 우물이라 우리도 마셔보았는데 짠맛은 없었으나 약간 텁텁한 느낌을 주었다. "대첩문"에서 "충무문"을 지나 "제승당"까지 가는 길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소담스럽게 꽃을 남기고 있어 바람과 파도가 적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가파른 계단 위의 충무문을 지나면 제승당이 눈에 들어온다. "제승당"안에는 '노량해전도; 진중생활도; 우국충정도; 한산대첩도; 사천해전도' 등 5폭의 그림이 있으며 거북선 1/25 축소모형과 지자총통, 현자총통, 커다란 제승당 현판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제승당" 왼편에는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통제사와 부사 등을 지낸 분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행적비"와 장군의 애국시로 유명한 "수루"가 있다. 비록 최근에 만들어진 곳이지만 수루에 올라 멀리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바다라기보다 호수 같다는 기분이 든다. 어스름 달까지 뜬다면 더욱 운치가 있지 않을까...
제승당 오른편에는 "한산정"과 "충무사"가 있다. 한산정에서 바라보이는 과녁은 바다를 사이에 둔 활터로 특별무과시험을 치르기도 했다는 곳으로 눈어림 짐작으로도 100m를 훌쩍 넘길 것 같은데 그곳까지 명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해봤다.
![한산정에서 바라본 과녁..](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inhyang.hihome.com%2F5052-4.jpg)
공을 추도하기 위한 영정을 모신 "충무사"로 들어가는 곳엔 세 개의 유허비를 볼 수 있는데, 통제사 조경과 통제사 이태상이 이곳을 재건하거나 중수할 때 세운 것으로 영조 대(1739년)과 고종 대(1877년)에 만든 것이다. 한글유허비는 최근에 만들어 세웠다한다. 유허비에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제승당의 의미 등을 담고 있다.
"충무사" 입구 왼편에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에서 떨어져 쌓인 노란 잎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뒤편에 서있는 붉은 단풍나무까지 어우러져 조용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숙제하듯이 끌려와 충성과 애국이란 단어를 배워야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학여행길이 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요즘 TV광고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보다가 점점 차가워지는 기온에 옷깃을 여미며 선착장으로 되돌아왔다.
(2001년 12월 9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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