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5일 회원 30명이 경남 산청으로 창립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답사를 가기전 장용기 운영위원장님이 혼자 사전답사를 다녀오셨답니다. 감사. 감사 ...
답사지는 목면시배유지, 산청한방휴양관광지, 성철대종사생사, 구형왕릉을 다녀왔으며 장병기 오락부장님이 회원들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웃음을 주셨습니다.
목면시배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이곳은 고려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붓대에 면화씨를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잘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퍼지게 하였다.
그 이전에는 명주 , 모시 , 삼베 등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을 하였으나 목면의 전래로 우리나라 의복 역사상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서민생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목면시배지 주변에는 지금도 조상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5164244B7784046A)
겁외사(성철대종생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는 진리를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스님의 생애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겁외사라는 이름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하고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스님이 말년에 잠시 머무르시던 부산거처에 손수 붙여놓은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복원된 성철스님의 생가를 외호하기 위해 건립된 겁외사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다르다.
일주문이 따로 없고 누각을 통하여 겁외사에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겁외사에는 벙답인 대웅전과 스님들이 정진하는 심검당, 요사채가 있고 성철스님의 동상이 모셔져있다.
겁외사 뒤편에는 율은고거라는 이름으로 생가를 재현 했다. 율은고거는 전체적으로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유물전시관인 포영당 , 사랑채인 율은재 , 안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웅전 외벽에는 성철대종사의 다비식 장면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 생전의 스님은 무소유론 자였던것 같은데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구형왕릉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수십만개는 족히 될것같은 수많은 돌들을 쌓아서 만든 돌무덤, 처음보면 피라미드가 연상이 되는 이 돌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금관가야의 제 10대왕 (521~532 재위)인 구형왕 무덤이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형왕릉의 능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앞에 전(傳)자를 붙여 '전구형왕릉'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서기 521년, 가락국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위에 오른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준 서기 532년까지 11년간 재위하였으며 , 이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신라군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하다가 이곳에서 죽으면서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속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내 무덤을 돌로 덮어라' 는 유언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가락편년기에는 '구형왕이 겨울에 방장산의 태왕궁에서 신라에게 나라를 바치자 그 시호를 양왕이라 하였다 ' 라고 적혀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한 뒤에도 이곳에서 30년을 더 살았다고 전해진다고하니 정확한 역사를 알기에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듯 합니다.
그리고 여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과 좌평 4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던 구형왕의 셋째 아들 김무력의 손자가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장수 김유신이니 구형왕은 김유신장군의 증조부가 되는군요.
전통한방휴양관광지 : 산청군 금서면 특리
박물관 소개
1층 : 전통의학실, 기획전시실, 영상실, 안내실, 매표대, 뮤지엄 샾
제1전시실 - 전통의학실 (1~3공간 : 기획전시실, 민속실, 체험실)
2층 : 약재전시실, 세미나실, 관장실, 사무실, 학예연구실, 전망대, 휴게실
제2전시실 - 약재전시실 (1~4공간 : 약재소개 및 약초 압화 전시)
국세전각전 : 산청군 금서면 특리
스승밑에서 17년간 동양철학을 비롯해 조각,서예,전각,회화와 주물까지 두루 익히고 , 그렇게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붙들고 씨름한 것이 올해로 40년째란다. 2006년말 행정자치부의 '4대 국새' 응모에서 인문(도장 글씨부분)과 인뉴 (도장 손잡이부분) 두 부분 모두 당선된 것이 시발이 되어 4대 국새 만들기를 총괄한 국새제작단장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이번 4대 국새의 글씨체는 훈민정음체 모형은 봉황 제작방식은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적 방식이다. 국새 작업은 이곳 산청에서 이루어 졌는데 예로부터 그 지방의 흙으로 국새 거푸집을 만들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국새는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국가를 대변하는 문화언어로서 자리 매김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힘이 실린다. 국새를 만드는 데 있어 개인의 성취욕이나 사욕을 부리지 않은 민홍규님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8AA284B77846C71)
첫댓글 우리문화 답사회 카페 개설을 축하 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도사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