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佛敎 공부 1
선불교禪佛敎 宗敎的으로는 禪佛敎 또는 禪宗, 思想的으로는 禪思想, 學問的으로는 禪學이라고 불리는 禪은 다른 思想이나 宗敎와는 確然히 구분되는 徵的인 革命性, 實踐性, 日常性, 直觀性, 單純性 등을 갖고 있다.
中國의 禪佛敎는 이미 1천5백 년 전에 “교류수하류橋流水下流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흐르고 있다” “동산수산행東山水山行 산이 물위로 걸어간다” 는 엄청난 轉換을 드러내 보인다. 말하자면 人間의 旣存 思惟體系를 뒤엎는 一代의 意識 革命이다.
禪은 한마디로 마음공부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이 地上이 極樂이 될 수도 있고 苦海가 될 수도 있다.
禪佛敎는 發生부터가 長安과 洛陽을 中心으로 한 制度佛敎에 對抗하는 地方佛敎, 皇室中心의 貴族佛敎에 대한 民衆佛敎 , 觀念佛敎에 대한 實踐. 生活佛敎라는 胎生的 屬性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온 地球가 變化와 改革의 목소리로 들끓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21世紀 以後의 文明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고서는 人類의 生存을 더 이상 지탱支撐하기 어렵다는 絶叫다.
우리는 지금 20世紀 패러다임들이 急激히 바뀌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目擊하고 있다. “發想의 轉換” “改革” “構造改編“ ”리엔지니어링“ ”벤치마킹” 등이 이러한 變化를 代表하는 오늘의 話頭이다. 具體的으로는 “價格破壞, 流行破壞, 季節破壞” 같은 전혀 새로운 現像들이 우리 日常生活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다가오는 21世紀 이후의 千年은 文化의 世紀, 哲學의 世紀, 宗敎의 世紀, 전 新文明의 르네상스시대가 되리라고 많은 未來學者들과 知性들은 豫測하고 있다.
變化와 改革, 새로운 文明의 展開에는 반드시 그 밑받침이 되는 “思想”이 있어야 한다. 이는 누구도 否認할 수 없는 歷史의 法則이다.
西歐 知性들은 21世紀 以後 精神文明의 르네상스를 이끌 代案 思想을 이미 2次 大戰이 끝나면서부터 東洋에서 찾으려는 탐색探索을 거듭해 왔다. 西歐 合理主義 思想을 대신해 21世紀 以後의 새로운 精神文明을 이끌 代案思想으로 禪思想과 老莊思想이 가장 有力視 되고 있다. 특히 老莊을 어머니로 하고 佛敎를 아버지로 해 태어난 中國 禪佛敎가 强調하는 發想의 轉換과 意識構造의 改革은 오늘의 時流에 딱 맞는다.
禪思想의 核心 直觀的 通察이다. 禪은 모든 事物과 現像을 있는 대로 바라보는 直觀力을 깨달음에 이르는 사로思路의 요체要諦라고 누누이 强調 한다. 따라서 禪에서는 理論的인 分析이나 長短, 高低, 黑白으로 分別하는 二分法的인 分別心을 斷乎히 排擊한다. 禪의 核心인 直觀力은 感受性이다. 最近 脚光을 받는 情報産業에서 가장 重視되는 基本的인 要素가 바로 感受性이다.
在日僑胞 송정의 日本 소프트 뱅크 社長은 “情報革命에는 아이디어와 感受性이 武器” 라고 말한바 있다.
創意性과 感受性은 禪佛敎가 거듭 强調해 온 禪思想의 基本的 本質이다. 禪思想의 核心인 單純性, 直觀性, 日常性, 革命性(改革性)등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必要로 하는 精神的, 産業的 寶庫가 아닐까 생각한다.
世界的인 精神分析學者 칼 구스타프 융은 禪佛敎에 대한 期待를 다음과 같이 披瀝한바 있다.
“禪師들이야 말로 안개에 쌓인 不確實한 未來를 지켜주고 있는 산꼭대기의 횃불이다” 라고 말하였다.
천하조주天下趙州 問 : 어디서 왔느냐? 答 : 瑞祥院에서 왔습니다. 問 : 그렇다면 그 祥瑞로운 佛像의 모습을 보았는가? 答 : 瑞祥은 보지 못했고 누워 졸고 있는 부처를 보았을 뿐 입니다. 問 : 너는 主人이 있는 沙彌냐, 아니면 主人이 없는 沙彌냐? 答 : 主人(스승)은 분명히 있습니다. 問 : 네 스승이 누구냐? 答 : (南泉에게 절을 올리며) 겨울이 깊고 날씨가 춥사온데 그간 平安 하셨습니까?
少年 趙州가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748-834)를 찾아 갔을 때 주고받은 禪問答이다. 話頭로는 “유주사미有主沙彌”라 한다.
話頭의 原來의 名稱은 공안公案이다. 話頭는 禪問答의 題目이다. 禪林 最初 公案은 六祖 慧能祖師(638-713)와 明上座의 禪問答서 비롯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다.
六祖가 “禪의 根本要旨가 무엇이냐”는 明上座의 質問을 받고
“네 마음이 善과 惡이라는 二元論에 물들지 않은, 네가 父母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原初的 모습은 무엇인가” 하고 反問 하였다. 六祖의 反問은 明上座에게 內面的 自我를 만나 볼 것을 促求한 것이다.
話頭의 重要性을 맨 처음 强調한 사람은 황벽黃檗 희운선사希運禪師(?-850)다. 그 후 臨濟宗 양기파 대혜종고선사(1086~1163)가 話頭를 드는 參禪精進을 體系化해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을 定着시켰고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趙州禪師의 名聲을 代表하는 세 가지 別名이 있다. 天下趙州, 古佛, 구순피선口脣皮禪이 그것이다. 禪宗思想 古佛이라는 別稱을 가진 사람은 趙州를 비롯해 조계고불曹溪古佛(六祖慧能), 江西古佛(馬祖道一禪師), 潙山古佛(潙山靈祐禪師), 江南古佛(중봉명본선사)이렇게 5명뿐이다.
古佛이라는 稱頌은 最上僧의 法力, 完全無缺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뜻한다.
趙州는 120세까지 살았다. 그는 스승 南泉禪師를 참문讖問하는 데서부터 才氣 넘치는 기봉機鋒(銳利한 言動)을 發揮한다. “유주사미有主沙彌”라는 話頭가 보여주고 있는 少年 趙州의 선기禪機(禪僧의 技倆)를 보자
禪問答의 定型句인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은 空間的, 地理的 場所가 아니라 存在의 根源, 즉 父母로부터 태어나기 以前의 本來面目(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뜻한다. 禪問答은 하나같이 日常의 對話體를 즐겨 사용한다. 때로는 俗語, 卑語를 마구 쓰는 會話體다
趙州가 南泉 門下에서 화롯불 當番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중들이 밭에 나가 보청普請(僧侶共同作業)을 하고 있은데 절 쪽에서 “불이야! 불이야! " 하고 多級하게 외치는 趙州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중들이 순식간에 禪堂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趙州는 禪堂門을 안으로 잠가버렸다. 스님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이때 南泉이 窓門 틈으로 열쇠를 던져주자 趙州는 禪堂門을 활짝 열고 나왔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趙州救火“라고 한다. 趙州는 실제로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처럼 절박切迫하게 ‘불이야’를 외쳐댔을까
이때의 불은 世俗凡夫가 휩싸여 있는 愛慾. 어리석음의 불길, 즉 解脫以前 無明의 불길을 象徵한다. 말하자면 無明의 불길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可憐한 人間의 存在를 演出한 것이다.
깨달음을 갈구渴求하는 弟子의 외침을 感知한 스승 南泉은 果然 어떠한 지음知音의 解答을 주었는가. 단지 열쇠를 방안으로 넣어주었을 뿐이다.
이는 네가 갇힌 그 불길은 네 스스로 열쇠로 열고 나와야 한다는 이른바 成佛의 비대리성非代理性을 알려준 소식이다.
禪의 모든 問題는 이처럼 “너 자신을 알라! 는 내면자증內面自證으로 歸結된다. 見性이니, 成佛이니 하는 絶對自由의 획득獲得은 부처도 스승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깨우침은 오직 自手成家로만 이루어진다.
이류중행異類中行
어느 날 남전보원南泉普願 禪師가 趙州에게 말하였다. "요즈음은 이류異類(짐승)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가장 좋다." 趙州가 물었다. “이異에 대해서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류類(짐승)란 어떤 것 입니까?”
南泉이 두 손을 땅에 짚고 엎드려 네 발로 걸어가는 짐승 흉내를 냈다. 이때 趙州는 스승 南泉의 엉덩이를 다짜고짜 짓밟아 땅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열반당涅槃堂(禪院의 病室)로 뛰어 들어가 외쳐댔다. “후회스럽다. 후회스럽다!” 南泉이 이 소리를 듣고 侍者를 시켜 趙州가 무엇을 後悔 하는지 물어 보도록 했다. 趙州는 侍者에게 말했다. “내 그를 계속해 짓밟지 않은걸 後悔한다.”
趙州가 스승인 南泉의 엉덩이를 짓밟은 行爲는 분명히 미친 사람의 行動 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승에게 발길질을 한 趙州의 풍전한風顚漢(미친 놈)다운 行動은 禪林에선 한 소식을 전한 ‘英雄的 行動’으로 激讚을 받는다.
이 逸話를 話頭로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 한다.
南泉이 提示한 ‘異類中行’은 깨달음을 成就한 大乘菩薩이라면 스스로의 涅槃에 安住하지 말고 大悲心을 일으켜 地獄道. 畜生道로 뛰어 들어가 6도 輪回하고 있는 衆生을 救濟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南泉은 涅槃에 틀어박혀 있지 않다는 象徵으로 움직이는 짐승의 動作을 흉내 낸 것이다. 證得한 깨달음에조차 執着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부주열반不住涅槃’을 드러내 보인 게 南泉의 짐승 흉내다.
趙州는 그런 行動도 아직 깨우침을 나타내 보이려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며 완전히 모든 걸 떨쳐버리지 못한 ‘執着’의 냄새를 풍기는 유치幼稚한 짓이라고 뭉개버린 것이다.
백림선사 산문 기둥에는 ‘사장진제寺藏眞際 천추탑千秋塔’ ‘문대조주門對趙州 만리교萬里橋‘ 라는 7言 2句의 글귀가 새겨져 대련對聯하고 있다.
많이 드는 話頭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이 곧 도다’ ‘전정백수자前庭柏樹子 뜰 앞의 측백나무’ ‘무無’자 등 모두 趙州禪師의 것들이다.
요시소사尿是小事 오줌 좀 눠야겠다 問 : 가장 절박切迫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答 : 오줌 좀 눠야겠다. 小便은 하찮은 일이지만 나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야.
天下古佛 趙州와 한 중의 禪問答이다. ‘요시소사尿是小事’라는 話頭는 成佛이니 解脫이니 하는 佛敎 最高의 理想도 오직 自身의 努力에 의해서만 成就할 수 있다는 成佛 비대리성非代理性을 밝힌 한 소식이다.
우선 중의 물음은 禪의 3대 테제(These 정립定立)인 즉금卽今(Now), 자처自處(Here), 자기自己(Self)중 自己를 가르킨다.
大, 小便은 아무리 貴한 사람이라도 스스로가 解決할 수밖에 없다. 解脫, 涅槃, 成佛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깨우쳐 이루지 않고 그것을 대신해 이루어질 수 있는 存在란 없다. 오줌 마려울 때의 切迫感. 그러나 그것은 絶對的으로 어찌할 도리 없이 스스로가 힘을 주어 放尿해야만 하는 것이다. 막힌 게 확 뚫리는 用便 後의 快感은 누구나 맛보는 日常事다. 기막힌 眞理다.
禪은 事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흰 눈은 희고 까마귀는 검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禪이 붙잡고자 하는 것은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그것도 가장 直接的이고 살아있는 方式으로 붙잡고자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 선사禪師(782-865)는 일찍이 다음의 사자후獅子吼를 토한 바 있다. “부처는 마른 오랑캐 똥 한 조각이며 聖人이란 이름도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德山의 손자뻘인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禪師(864-949)는 이런 自問自答을 남겼다
問 : 萬法은 어디서 나오는가? 答 : 똥 더미에서다. (中國 祖師禪門의 장구성이라는 居士는 大便을 보려고 힘을 주는 순간 ‘아’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면서 전에 들었던 話頭를 깨쳤다고 한다.)
禪이 成就하고자 하는 目標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內在하는 思量分別의 계교計巧에 빠지지 않고 우리 意識으로 하여금 普遍理性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不可避하게 禪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禪의 大小便 哲學이 새삼 實感이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禪 修行이란 마음의 鎭靜한 本質을 通察해 마음이 自身의 主人이 되도록 마음자체를 訓練 시키는 作業이다. 그 最終 目標는 어떠한 것에도 支配 당하지 않는 ‘絶對自由’의 획득獲得이다.
조주趙州 밀밀의密密意 깊고 깊은 뜻 問 : 깊고 깊은 뜻이란 어떤 겁니까? 答 :(趙州禪師는 質問을 한 比丘尼 앞으로 다가가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問 : 노스님께서는 아직도 그것이 남아 있습니까? 答 : 오히려 그것을 지니고 있는 건 네가 아니냐?
‘密密意 깊고 깊은 뜻’ 이란 話頭는 趙州와 한 比丘尼의 이러한 禪問答에서 생겨났다. ‘요시소사尿是小事’처럼 成佛 非代理性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不平等論을 說破한 法問이다.
‘密密意’란 釋迦牟尼가 靈山會上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加葉에게 전해준 소식, 즉 佛法의 根本(眞如, 自性, 道)을 말한다.
問答의 核心은 ‘그것’이다. 잘 봐야 한다. 禪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보다도 빨리 몇 만 리 날아가 버리고 번개보다도 몇 백 배 빠르게 虛空을 지나가면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比丘尼의 ‘그것’은 形而下學的인 색정色情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趙州의 ‘그것’은 形而上學的인 佛性(自性, 마음)을 말하고 있다.
德山의 방棒, 臨濟의 할碣(고함소리)과 함께 禪家의3대 名物의 하나인 趙州의 ‘구순피선口脣皮禪’은 이처럼 한순간에 세치의 혀로 ‘形而下’를 ‘形而上’으로 끌어올리고 또 반대로 뒤집기도 한다.
出家僧에겐 男女의 境界가 없다. 趙州가 比丘尼의 어깨를 어루만짐은 곧 석가모니가 연꽃송이를 든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脫俗하지 못한 比丘尼는 텅 빈 마음으로 事物을 대할 때 손에 닿는 것 그대로가 眞實된 것이라는 촉사이진觸事而眞의 묘체妙諦를 모른 체 색심色心이 發動해 되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趙州 古佛은 타이른다. 색色을 느끼는 네 마음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眞如. 自性. 道)인데 정말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6祖 慧能 以後의 禪宗은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心外無佛)는 心地法問으로 一貫해 오고 있다. 마음이 어떻게 생각을 일으키는가에 따라 比丘尼의 마음과 같이 色情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趙州와 같은 無心의 佛性이 되기도 한다. 어깨를 만져주었을 때 짜릿함을 느끼는 그 ‘마음’이 곧 佛性과 道의 바탕임을 모른 체 ‘한 소식 했다는 古佛인 당신에게도 아직 色慾이 남아 있느냐’ 고 묻다니......쯧쯧!
어느 날 또 한 比丘尼가 趙州禪師를 참문讖文 했다. 問 : 사문이 닦아야 할 修行이란 어떤 것입니까? 答 :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 問 : 노스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答 : 내가 만일 너와 關係했다 하더라도 너는 아이를 낳을 수 가 없다.
讖問한 比丘尼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趙州의 대답에 ‘趙州, 나는 지금 당신까지도 포함한 전 寺門의 修行할 바를 물은 것’ 이라고 반박反縛하고 나섰다.
이것이 ‘노스님과는 相關없는 일’ 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이다. 趙州의 對答은 너는 이 趙州에 의해서는 새로운 生命, 즉 成佛을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話頭로는 ‘막생아莫生兒(애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라 한다.
成佛이라는 새로운 生命의 誕生은 ‘自身의 努力’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아이를 낳듯 누구와 關係를 가져서, 修行을 해서 이루는 일이 아니라는 준엄峻嚴한 타이름이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것이 禪家의 絶對 禁忌이듯이 깨우침을 자신 밖으로부터 얻으려고 가르침을 구하고 修行을 하는 것도 역시 ‘禁忌’라는 애기다.
이것이 바로 깨우침은 修行을 通해 얻는 게 아니고 한마디 말에 문득 自身의 本體를 發見해야 하는 것이라는 南宗 頓悟思想의 도불용수론道佛用修論이다.
禪은 000과 宇宙意識의 本質的인 構造를 파헤치는 作業이다. 이를 위해 禪은 우선 旣存의 思惟體系를 단호히 拒否한다. 觀念的인 推論이나 理論的인 分析, 0000 지식, 낡은 慣習, 高低. 長短. 貴賤. 凡聖등의 二分法的인 分別心 같은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라고 한다. 오직 直觀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마치 뒤에 깔린 意味를 찾지 않고 그림이나 詩를 그대로 보고 읽는 것과 같은 實在 觀察만이 禪的인 認識이다. 禪은 한마디로 主觀的 唯心論의 最高峰이라고 할 수 있다.
禪은 分別心과 사량계교思量計較를 버리고 實存的 體驗을 通해 얻어지는 歸納的 方法의 認識體系를 樹立하고자 한다. 禪이 目標하는 認識體系의 出發點은 無心이다. 따라서 오직 ’無心‘ 하나밖에 없다.
個人的인 人格과 宇宙 全體性이 훌륭하게 一致할 때 意識的 人格과 無意識的인 人格 간에 갈등葛藤은 解消 된다. 이것이 바로 健全한 心的 存在方式이며 現代 全身 治療法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禪은 現代 精神分析學과 一致한다. 그래서 現代 精神分析學은 治療法에 禪을 널리 活用하고 있다.
話頭(公案)는 無意識이 意識을 침공侵攻하도록 해 固定된 틀에 묶여 있는 우리의 意識을 解放 시킨다.
이같이 急激한 意識變換으로 야기惹起된 ‘自身의 變革’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禪問答이다.
<우리나라 高僧들의 이야기> “오늘은 육영수陸永修 보살菩薩이 지 어미 배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보지 속에서 나온 날이다.“
韓國佛敎 曹溪宗 춘성春城 선사禪師(1891-1977)가 朴正熙 大統領 婦人 陸永修 여사 생일날 설해 준 禪法問의 序頭이자 말후구다. 法席을 메운 高官 대작大爵의 婦人들이 얼굴 파묻을 쥐구멍을 찾느라 허둥댔다. 生日祝賀에 겨우 욕辱만 한 바가지 퍼 먹게 한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른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禪이 자리하는 곳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의 出生을 이보다 더 事實的으로 묘사描寫할 수는 없다. 地位가 높건 낮건 돈이 있건 없건 누구나 태어날 때는 똑같이 으앙하고 울고 이 세상을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것이다. 佛性이 萬有에 고르게 편재偏在해 있듯이 萬人이 平等하다.
그 일화逸話를 몇 개 더 소개紹介해 보자.
어떤 女大生에게 들려준 法門이다. “내 그 큰 것이 어찌 네 좁은 데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뭐,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나는 여태껏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내 자지 밖에 못 봤어“
끽다거喫茶去 차나 마셔라 - 전에 여기 와본 일이 있는가? - 예, 온 적이 있습니다. - 끽다거喫茶去(차나 마셔라)
- 전에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 처음 입니다. - 끽다거喫茶去(차 한잔 하게)
趙州의 核心 思想은 한마디로 말해 日常生活이 곧 眞理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다. 禪은 우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심즉불心卽佛‘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돈을 貪하고 色을 밝히는 마음도 佛心일까. 아니다. 心卽佛의 ‘心’은 우주섭리宇宙攝理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平凡한 日常生活을 이끄는 本來의 소박素朴하고 순수純粹한 마음. ‘나’라는 存在를 지탱支撐해 주는 根源的인 마음을 말한다.
가령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불을 쬐는 마음이 根源的인 마음이다. 이런 밑바탕의 마음을 平常心이라고 한다. “平常心是道” 야말로 祖師禪의 核心思想이다.
平常心是道를 說破한 사람은 ‘馬祖道一禪師’ 다. 그래서인지 趙州의 話頭 중에는 平常心을 說破한 話頭가 가장 많다. 代表的인 예가 ‘喫茶去 차나마셔라’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측백나무’ ‘세발우거洗鉢盂去 밥그릇이나 닦아라’ 같은 것들이다.
어느 날 趙州 종심禪師에게 두 명의 衲僧이 찾아왔다. 趙州가 그들에게 똑같이 質問을 던졌다. 한 사람은 와봤고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趙州는 두 사람에게 한결같이 ‘茶나 마셔라’고 일렀다.
옆에 있던 원주가 異常하다고 생각되어 물었다 원 주 : 왜 와 본 사람이나 처음 왔다는 사람이나 다같이 ‘茶나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 주 : 원주! 원 주 : 예 조 주 : 끽다거喫茶去(자네도 차 한잔하게)
이상이 ‘喫茶去’라는 有名한 話頭가 생겨난 기연機緣(學人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機會와 因緣) 이다.
‘喫茶去’는 祖師禪의 核心思想인 日常生活이 곧 道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만물일체萬物一體 思想을 代表하는 話頭의 하나다.
禪院에 入門者가 오면 禪師가 通常 던지는 質問 中의 하나로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등의 물음과 같은 것이다. 이 質問은 單純한 空間的 地理的 方向이나 旅程을 묻는 것이 아니다. 人間이라는 存在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深奧한 意味를 內包한 質問이다.
趙州가 세 사람 모두에게 ‘茶나 마시라’고 한 뜻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自己自身에게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禪의 모든 問題는 내면자증內面自證으로 歸結된다. 깨달음이니 成佛이니 하는 理想은 물론 日常生活 속의 行爲와 判斷 등 모든 思考와 行動을 마음, 즉 內面을 통해 省察하고 그 結果로 얻어지는 良心에 따르라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면 對答하고 사람이오면 茶를 나누어 마시는 日常事가 삼매三昧인 禪이며 佛法이고 道다. 이러한 日常事를 온갖 雜念과 拘束을 벗어난 無心한 境地에서 行하면 그것이 곧 解脫이고 깨달음이다. 茶를 매개媒介로 한 禪問答은 수없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한 중이 曺洞宗 開創者인 洞山 良价禪師(807-869)를 참문讖問했다.
問 : 어디서 왔는가. 答 : 西天에서 왔습니다. 問 : 언제 西天을 떠났는가? 答 : 공양供養 뒤에 떠났습니다. 問 : 너무 더디군! 答 : 산과 물을 구경하느라 그랬습니다. 問 :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 答 : [중이 앞으로 나가 차수叉手(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굽히는 공손한 절)하고 섰다] 問 : [洞山은 허리를 굽혀 읍揖하고는 말했다] 茶나 마셔라!
趙州의 ‘喫茶去’와 같은 意味를 갖는 禪問答이다. 洞山도 西天(方位上으론 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禪에서는 여원黎元, 眞理등을 상징象徵한다)을 들먹이며 차수叉手(如如한 自性本體의 象徵)하는 등의 觀念的 眞理를 집어치우고 茶를 마시는 日常속의 道를 實現 하라고 가르친다.
潙仰宗 開山祖의 한사람인 위산혜적선사仰山慧寂禪師(807-883)와 삼성혜연(臨濟義玄禪師의 法師)의 問答도 茶를 마시는 無心의 境地를 일깨운다.
問 : 네 이름이 뭐냐? 答 : 혜적慧寂 입니다. 問 : 慧는 무엇이고 寂은 무엇이냐? 答 : 바로 스님 앞에 있습니다. 問 : 아직도 거기에는 앞과 뒤가 있구나! 答 : 앞뒤의 문제는 이만 젖혀놓겠습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答 : 茶나 한잔 마셔라.
仰山이 묻고 삼성이 답한 禪問答이다. 仰山이 ‘너라는 存在는 대체 뭐냐'라고 물었다. 삼성은 자기이름 대신 仰山의 法名을 내세워 逆攻으로 들어갔다. 慧寂은 글자대로는 모든 것을 超越한 智慧의 平和스러움을 뜻한다.
나도 당신의 法名이 뜻하는 것처럼 한 소식한 成佛의 境地라는 뻐김이다. 仰山이 慧와 寂의 뜻을 물은 것은 禪의 理解정도를 探知하기 위한 反問이며 다시 한 번 걸고 들어간 攻擊이다. 삼성의 ’바로 스님 앞에 있다‘는 대답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알아준다는 反擊이다. 역시 自慢스럽다. 그러자 仰山은 앞과 뒤를 分別하는 分別意識을 責望한다. 禪에서 가장 禁忌是하는 前後. 左右. 生死. 凡聖으로 나누어 二分法的인 思量 分別心을 發動한 데 대해 가차 없이 一擊을 가한 것이다.
삼성은 더 觀念的인 것으로 뛰어 올라가 ‘스님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는 앞과 뒤가 끊어진 자리, 즉 무여열반無余涅槃의 境地에서 본 것 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禪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버리면 哲學이 되어 버리고 觀念이 되어 버린다. 禪은 이쯤에서 일대의 轉換을 해야 한다. 그래서 仰山은 마지막 한 방을 내리치고 만다. ‘茶나 마셔라’
이눔아, 空然한 觀念的 유희遊戱나 일삼지 말고 삶 그 自體로 돌아가 日常속의 眞理를 살펴라! ‘냉수 먹고 속 차리라’ ‘삶 그 自體로 돌아가라’는 애기다. 이게 禪이다. 茶를 마시는 데는 더 以上의 論爭과 討論이 필요 없다.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한 잔의 茶를 마실 수만 있다면 그것이 앞과 뒤가 없는 것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哲學的 물음을 가름하는 答인 것이다.
禪은 오직 우리가 생생하게 存在하고 있다는 事實을 또렷이 意識 할 수 있는 確實한 經驗을 가지라고만 要求한다. 이는 生과 死를 하나로 보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바탕을 體得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現存이 永遠이고 過去이고 未來라는 마음가짐이면 된다는 이야기다.
禪學的으로는 이를 ‘頓悟’라 한다. 위진남북조시대魏秦南北祖時代의 축도생으로 부터 비롯된 頓悟思想은 中國人들의 傳統思想인 만물일여萬物一如 思想과 전체작용설全體作用設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서로 道伴 사이이며 一世를 風味한 禪杖들은 운암담성과 天皇道悟의 茶이야기는 한층 심오深奧하다. 어느 날 운암이 茶를 끓이고 있는데 天皇이 法談을 했다.
천 황 : 누구한데 주려고 茶를 끓이나? 운 암 : 마시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이 있네. 천 황 : 어째서 그 사람 스스로 끓여 마시게 하지 않는가? 운 암 : 多幸이 내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른바 法身과 現身의 關係를 거량한 수준 높은 禪門答이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日常의 對話이다. 그러나 이 對話 속에는 유현幽玄한 선기禪機가 번득인다. ‘茶를 마시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은 바로 存在의 本質인 本體自性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는 茶를 끓일 수도 없고 끓여서도 안 되는 사람이다. 또 그가 茶를 마시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本體自性’이 茶를 마시는 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도 成立이 안된다. 또 茶란 그 사람만이 마실 수 있는 전매專賣 특허품特許品도 아니다.
天皇이 왜 그 사람에게 직접 끓여 마시게 하지 않느냐고 추궁追窮한건 觀念속의 本體自性을 具體化 시켜 肉眼으로 볼 수 있게 해보라는 反擊이다.
多幸히 내가 여기 있지 않은가! 엄청난 한마디다. 내 肉身과 나의 本體自省은 分離되어 있지 않다는 宣言이다. 基督敎적 表現을 빌린다면 육화肉化가 바로 ‘나’라는 애기다.
茶를 마시고 싶다는 ‘欲求’와 茶를 끓이는 ‘行爲’는 動과 不動을 區分하는 現實 속의 個多 世界에서만 비로서 確認될 수 있다. 法身이 現實로 나타난 것이 茶를 끓이고 있는 운암이다.
基督敎는 이를 聖靈의 역사役事라 한다.(肉化한 하느님이 地上의 人間으로서 具體的 行動을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다.) 즉 운암의 내적인 法身과 외적인 現身은 分離되지 않고 一致해 있으면서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고 凡夫의 일을 하는 道人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용담숭신龍潭崇信이 스승 天皇道悟禪師의 侍奉으로 있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問 : 제가 入室한 이래 심요心要의 가르침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答 : 네가 들어온 날부터 나는 너에게 잠시도 가르침을 그친 일이 없다. 問 : 어떤 점에서 저를 가르쳐주셨다고 하십니까? 答 : 네가 茶를 가져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오면 먹었고 禮를 표하면 答禮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떤 점에서 내가 마음 本質을 너에게 보이기를 소홀疎忽히 했단 말이냐?
龍潭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天皇이 한 소식 전해주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당장當場에 깨닫는 것이다. 사유思惟하고 反省하기 시작하면 놓쳐버리고 만다."
龍潭이 언하言下에 깨닫고 깨달음을 어떻게 보임補任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天皇은 이렇게 일렀다.
“너의 자성自性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도록 하라. 完全히 自由로와야 하고 어떤 執着도 말아야 하며 環境이 要求하는데로 行動하라. ‘平常心’에 따르기만 한다면 그 외 달리 거룩한 깨달음이란 없느니라.”
雲門宗. 法眼宗의 法脈 原流인 雪峰義存禪師(822-908)와 한 중의 問答도 ‘喫茶去’를 통한 日常生活의 眞理를 일깨우고 있다.
問 : 장님은 어떻게 세월을 보냅니까? 答 : 차나 마시고 밥이나 먹어라.
여기서도 ‘喫茶去’라는 具體的이고 日常的인 예에 逆說的으로 高次元的 意味를 附與해 佛法을 說明하고 있다.
장경혜릉長慶慧陵(854-932)과 보복종전(867-928)의 거량을 보자. 長慶이 어느 날 보복에게 시비를 걸고 들어갔다
問 : 如來에게는 方便과 眞理란 두 가지 말이 없다. 如來도 일자불설一字佛說은 아니다. 오직 두가지 말이 없을 뿐이지 않는가? 答 : 그럼 如來의 말이란 어떤 건가? 答 : 너 같은 귀머거리는 얘기해 줘도 알아듣지 못할게다. 答 :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걸 보니 如來의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問 : 그럼 如來의 말이 무엇인가? 答 : 茶나 마시게.
한마디로 長慶은 무사선無事禪(死禪)인 반면 보복은 유처유불有處有佛의 경지인 동선動禪이다. ‘장경불어長慶佛語’라는 이 話頭는 佛法이니 見性이니 하는 觀念的 涅槃世界를 버리고 茶를 마시는 日常 속에서 마음의 安定을 얻으면 極樂이요 解脫이라는 얘기다. ‘覺性’을 뜻하는 茶는 日常事를 통해서 깊은 內面의 省察을 이끄는 견인차牽引車 역할役割을 한다.
절강성 천태산에 운봉지덕이라는 한 소식한 禪師가 살고 있었다. 청할과 충후라는 두 長老가 그의 名聲을 듣고 찾아갔다. 운봉은 마침 산 밑에 떨어진 알밤을 줍고 있었다.
問 : 道를 닦는 벗이여, 암주庵主는 어디 계시는가? 答 : 어디서 오셨습니까? 問 : 산 밑에서 왔소. 答 :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소? 問 : 여기가 어디오? 答 : (운봉대사가 읍을 하면서) 가서 차나 마시지요.
이때의 ‘茶나 한잔 하자’는 말은 單純한 人事致禮의 接待가 아니다. 우리 茶를 통해 얻은 覺性의 정도를 한번 겨뤄 보자는 法談의 對決을 뜻한다.
禪家에서는 茶 한 잔에 宇宙가 녹아들고 빗물처럼 흐르는 俗世 思念의 意識이 말끔히 씻긴다. 禪語錄에 登場하는 茶는 江南地域에서 나는 綠茶를 말한다. 平常心을 따르는 日常生活의 代表的 事例인 ‘喫茶去'는 급기야 宋代 臨濟宗 園悟克勤禪師(1063-1135)에 이르러 다선일치茶禪一致라는 하나의 禪林傳統으로 굳어진다. 禪家에서는 禪과 같은 比重을 갖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園悟克勤의 다선일치茶禪一致와 더불어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농선일치農禪一致. 崇山 少林寺를 中心으로 僧侶에게 武術을 권장勸獎하는 권선일치拳禪一致가 그것이다. 禪林의 3사일치三事一致라고나 할까.
園悟는 湖南省 협산사에 主席하면서 저 유명한 ‘碧巖錄’을 썼다. 園悟는 碧巖川 옆의 바위동굴에서 碧巖川 물로 茶를 다려 마시며 이 책을 執筆했다. 그는 佛敎硏究가 차 맛에 深趣하는 다도茶道에 比例해 日就月將하고 佛法의 理解와 차 맛을 느끼는 境地가 서로 같은 境界에 이름을 스스로 찬탄讚嘆했다.
禪家의 차(茶)는 곧 ‘깨달음’을 象徵한다. 茶를 달이고 잔에 따르는 行爲가 바로 선정禪定이고 如如한 佛法의 체현體現이다. 山寺의 綠茶 한 잔이 갖는 意味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佛法’이며 日常 속에서 光明을 發하고 있는 具體的 道의 현현이다
韓國 禪宗에서 ‘茶禪一致’의 境地를 代表하는 초의의순草衣意恂선사(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은 茶를 마셔 마음을 깨이게 하는 청한심성靑寒心醒을 이렇게 노래한다.
동다송東茶頌 죽뢰송도구소량竹籟松濤俱蕭凉 대숲 소리 솔 물결 모두 다 서늘하니 청한영골심간성淸寒瑩骨心肝惺 맑고도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유허백운명월위이객惟許白雲明月爲二客 흰 구름 밝은 달만 두 손님 되라 하니 도인좌상차위승道人座上此爲勝 도인의 자리에는 이것(茶)이면 훌륭하네.
茶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은 草衣禪師를 한없는 ‘낙도樂道’의 世界에서 노닐게 하고 있다. 솔바람 들으며 호젓이 茶를 마시는 閑暇함은 어떠한 財閥의 好事보다도 天下를 號令하는 帝王의 滿足보다도 더 높고 貴한 價値를 지닌다. 茶 한잔의 意味가 天下를 制覇하는 ‘속절없음’이라고나 할까. |
출처: nirvana 원문보기 글쓴이: 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