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체험인가? 상상력인가?
시인, 평론가 / 이승하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는 신문기사나 역사와는 다르지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 즉 허구입니다. 그리스 신화도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선녀와 나무꾼 전설도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신화나 설화는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도 얼토당토않은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언론에 보도가 되었거나 여러분 주변에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충격이나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문학의 감동은 보다 고차원적이지요.
제 대학 동기 중에 조창인이라고 있는데,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써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것인데, 그 소설을 읽고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합니다. (저도 읽으면 울지 모르겠습니다만, 녀석이 저한테 책을 주기 전에는 읽지 않을 생각입니다.) 만들어낸 이야기란 일종의 거짓말인데 그것이 아주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울게 했으니 문학이란 참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소설 가운데에는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취해오는 경우도 있고 전기나 자서전 같은 실제 이야기에서 작중인물을 빌려오기도 하지만 문학작품은 궁극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즉, 문학의 가치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허구의 세계를 아주 그럴듯하게 그리되 '진실'을 추구해야 훌륭한 문학작품이 됩니다. '그럴듯하게'를 비평적인 용어를 써 설명하면 구체성·사실성·개연성 같은 것이겠지요. 문학이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럴듯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것을 정직하게만 그려서는 안 되며,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요소가 가미되어야 작품이 되는 것이지요.
'아리랑'
(동녘출판,1988)
은 조선인 독립운동가 김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고 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중국, 시베리아, 만주, 한국, 일본에 불어닥친 혁명의 폭풍우를 헤쳐나간 독립운동가의 고뇌와 좌절, 사상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자기가 겪은 일을 좋은 문장으로 곧이곧대로 그리는 것이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면 르포·수기·수필·서간문·일기 같은 것이 최고의 문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문학으로 취급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지만 그 책을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은 사실과 허구의 교묘한 혼합을 지향합니다. 사실인 것도 같고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도 같고 잘 분간이 안 가는 데 문학의 묘미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체험이고 하나는 상상력입니다. 이 두 요소에 관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
"The poem is born, not made."(서양 속담)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善의 훌륭한 방편이다."(셸리)
"상상력이란 것은 죽어가는 열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두는 불사의 神을 말하는 것이다."(키츠)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 다들 봇물처럼 넘쳐흐를 정도의 시를 갖게 될 것이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R.M. 릴케)
체험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갑니다. 각자가 글을 쓰고 있는 그 시점까지 보고 듣고 느낀 온갖 것이 다 체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또한 독서 체험을 비롯하여 예술작품을 본 체험, 영화를 본 체험, 여행을 한 체험, 꿈 체험 등 오관을 통해 감각한 모든 것, 각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이 다 체험이지요.
그런데 시적 체험은 정서적 체험입니다. 시의 힘은 '공감' 내지는 '감동'에서, 혹은 '충격'에서, 혹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인 체험은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슴에 남는 것이 있어야 '시'입니다.
군복을 입은 생 텍쥐페리(1900∼1944)
2차대전 당시 정찰비행 도중 격추당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소설가 가운데 다소 특이한 체험을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무기여 잘 있거라』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스페인내란 중 스페인을 여러 차례 찾아가 취재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의 영역에 상상력을 가미함으로써 훌륭한 소설을 썼습니다. 체험만으로도 상상력만으로도 문학은 탄생할 수 없음을 증명한 셈이지요. 앙드레 말로가 캄보디아에 가본 적이 없다면 『왕도』를 쓸 수 없었을 테고,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조종을 해본 적이 없다면 『남방우편기』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 같은 작품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남북전쟁 체험을 전혀 한 적이 없이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탁월한 전쟁소설 『붉은 무공훈장』을 쓴 스티븐 크레인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간접체험의 중요성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는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았고, 남북전쟁에서 살아남은 당사자들(노인네들이었겠죠)과 그 후손을 수도 없이 만나 체험담을 들었다고 합니다.
꼭 등반 경험이 있어야만 산악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업 체험이 있어야만 해양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직접 가서 취재를 한 것도 다 체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겠다면 유심히 보는 습관, 메모를 하는 습관, 스크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습관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필요한 것이 상상력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체험을 얼마든지 메우고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영국 수필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에, 문학은 상상에, 철학은 이성에 직결된다고 말해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또한 역사가 사실을, 철학이 실재를 다룬 데 반해 문학은 상상의 세계를 다룬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의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추악하게, 더 진실되게, 더 거짓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환타지 소설이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그 소설의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상상은 공상이나 망상과는 다르지요. 상상은 허구의 진실, 문학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공상과 혹세무민하는 망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는 "상상력이란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했던 것을 기억케 하며, 그것을 어떤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 낭만주의 초기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상상은 영혼의 감각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에 있어서도 상상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상상력이란 쉽게 말해 조금 엉뚱한 생각입니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됩니다.
자 그럼 결론을 내립시다. 문학은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 서 있는 것이며,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밀가루 반죽이랄 수 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거나 국수를 만들거나 자장면을 만들거나 그것은 쓰는 사람의 자유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