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관不二觀 불리관不離觀
부처님 법은 둘이 아닌 불이관不二觀으로 경계를 지을 수 없다. 불리관不離觀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경계 없는 무한의 공간과 시간을 향하여 누구나 언제나 무엇이나 가장 충만하게 만족을 주고 행복을 주는 가르침으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어느 한편이나 어느 쪽이나 어느 한 집단이나 어느 소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에 부합하여 좀스럽지 않다.
離心無別有佛리심무별유불
離佛無別有心리불무별유심
‘마음 떠나 부처가 없고, 부처 떠나 마음이 없다.’ 대품반야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다. 마음 마음 수많은 조사들이 닳도록 일러준 말이다. 마음이란 실체는 말로 그릴 수 없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말이 끊어진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 마음이 무어냐다. 유식론을 통하여 이미 일깨운 바가 있다. 마음도 단계가 있다. 겉으로만 아는 마음과 속으로 깊이 아는 마음이 있다. 덜 깬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통 털어 완전하게 깨친 부처의 마음이 있다. 제6식 제7식 마나식, 제8식 아뢰야식, 제9식 엄마라식, 그 다음이 제10식이요 건율타야식이요 부처의 자리_불지佛地다. 우리 모두는 수행 행을 닦아 모두 부처가 되려고 한다. 이 순간에도 다음 세상에도 세세생생 그러도록 발원하는 이는 근기 높은 보살행이다. 이 마음의 깨침의 단계와 경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늠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증명하는가. 조사들처럼 이심전심으로 의발을 전하고 받는 오롯이 선택된 분들만 증명서를 받는가. 일반대중들은 접근하기 어려운가를 생각해본다.
여기에 삶이 개입하지 않는 깨침은 우리의 논외로 할 수 밖에 없다. 삶과 깨침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바를 벗어난 깨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에 이 현세의 세간의 모든 현상과 작용에 대한 개입과 인지와 각성과 나눔이 없는 깨침은 어디에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석가 세존의 정법이 고스란히 전수되어 온 조사의 말씀은 우리의 나침반이다. 33조사이며 중국선종 6조 혜능대사의 세간 개입은 많은 이들의 입과 글로 회자되어 왔다.
佛法在世間불법제세간
不離世間覺불리세간각
離世覓菩提리세멱보리
恰如求兎角흡사구토각
불법(佛法)은 세간世間에 있으니, 세간을 버리지 말아야 깨친다.
세간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세속의 세간을 떠난 출세간이 있을 수 없다. 세간을 포용한 출세간이다. 세간을 간파한 그대로 출세간이다.
가히 세간의 고통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미 사바의 어구에서 좌절해버린다면 제1구를 놓치는 것이다. 참아야 하는 땅으로서 사바, 참을 수 있는 땅으로서 사바, 참을 수밖에 없는 땅으로서 사바에만 그친다면 사바는 사바요 극락은 극락 따로 노니는 일이니 이는 하나의 진리를 설한 석가세존의 법이 아니다. 고통을 마침내 하나도 남김없이 앗아야 하는 사바다. 이에 대한 발원이 없는 행자는 자비의 국량을 의심해야 한다. 사바 곧 극락이다. 둘이 떠나지 아니한 당처에서 모든 차별이 무너진다. 모든 계단이 무너진다. 모든 불평등이 무너진다. 차별의 의심 차별의 마음이 있는 한 누구든지 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죽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는 대발원이 사바의 거리에서 물결칠 때 우리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대열에 함께 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너른 행로에서 만난다. 자비의 확대과정이 마음 닦음이요 공감의 확대과정이 수행이다. 자비 없는 무자비의 폭력과 죽임에 대듬은 생명의 기본적인 속성이요 감응이다. 여기에서 방편의 길잡이가 필요하다. 더 높은 단계의 깨친 이가 덜 깨친 이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잡아 주어야 한다.
4월16일 세월호 대참사사건大慘死事件를 대하는 시각에서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어떨까? 우리의 수행은 최종적으로 본래 부처인 자리에서부터 나왔기에 그 자리에서 보는 연습을 하는 모든 활동이라고 본다. 참사가 벌어진 인과에 무수한 3독이 쩔어 있다. 생떼같은 자식을 꽃다운 아이들 학생들 열입곱 열여덟 아이들의 무참한 죽음의 원인을 밝히자고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요 인과의 과정을 낱낱이 밝히고자 하는 게 너무도 소박한 인간으로 가지는 소원임을 안다면 첨단의 소통수단을 가진 오늘날 너무도 쉬운 일일 수 있다. 국민 개개인들의 세금으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조직에서는 당연히 의무를 이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홀하거나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일이 무려 침몰된 뒤 200일 넘도록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무자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써야하는가 이다.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여덟가지 바른 길에서 바른 견해가 가장 으뜸이다. 정당한 권리를 누리고 나누는 정상적인 국가에서 가능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요구와 주장이나 외침은 정당한 것이리라. 무려 304명이란 인명이 순식간에 수장된 원인과 과정에 대한 신속하고도 적절하고도 자비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그 의무를 이행한 조직이나 수장이나 최종 책임자에게 향하는 요구나 주장이나 대듬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 비난당하거나 부당한 압력이나 물리력에 의해 좌절시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른 행동은 무엇인가. 고통의 즉각적인 제거에 있다. 이를 막는 어떠한 해태도 용인할 수 없다. 해야 할 책임자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자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그런 책임자는 새로운 책임자로 갈아치워야 한다. 부처님 법에서 가장 기본이 3독을 제거하는 것이다. 3독을 발휘하는 자 누구인가다. 정견을 갖지 못한 지배자일 경우 그 폐해는 천지우주를 뒤덮을 정도로 고통이 크게 미친다. 이럴 때 나약한 민중들이 기대는 힘이 바로 부처님의 온전하고 두루한 원력이다. 시공을 초월한 부사의한 법력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바루고 고쳐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무자비한 지배자인가, 고통받는 중생인가?
諸惡莫作제악막작
衆善奉行중선봉행
自淨其意자정기의
是諸佛敎시제불교
모든 그릇되거나 고통을 주는 짓을 말고
모든 아름다운 이로운 일을 즐겨하며
그 뜻이 맑고 고우면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다. 이웃의 아픔이나 고통, 사바세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깊고 바른 성찰, 이런 성찰을 통한 바른 실천이 없이는 바른 불자라고 할 수 없으리라.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그대와 내가 다르지 않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업신은 법신으로 환원되어 툭 트여 무한 창공을 나는 저 새들처럼 훨훨 난다. 사바의 고통을 넘어
해탈의 세계를 우리가 만든다. 본래 나고 죽음이 없는 머무름 없는 곳에 머문다.
2015년1월호 설법연구원 게재 원고_김영일_無念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