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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을 그만두고, 이 세상으로 나가, 수많은 이방인(?)중에 하나로 살아온 지 어느덧 9년이 흘렀다. 증인시절로 돌아가기는 싫지만, 그곳에 두고 온 나의 거울 같은 친했던 증인친구들이 때로는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열정을 함께 나누었던 그들은 내주위에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학교와 사회에서 이어진 다른 친구들로 채워져 있다. 난 오늘도 그들과 똑같은 언어와 똑같은 몸집과 똑같은 표정으로 느끼고, 소통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난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내 친구들과 전여친들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왜 이리도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군중속의 고독...
항상 웃고, 까불어 대는 나의 밝은 모습에 내 친구들은 느끼지도 못하는 나의 내면을 나타내는 언어다.. 별로 대단하지도 못했던, 하지만, 평범하지도 못했던 나의 지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의 부모님은 소위 주안에서 결혼하셨다. 아버님은 부자집 차남으로 태어나서, 명문대 입시에서 떨어져서, 재수를 하시던 중,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증인이 되셨다. 어머니는 경찰간부의 장녀로 태어나셨고,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증인을 하셨던 나의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집회를 참석하시고, 어린 나이에 침례를 받으셨다. 그 사이에서 나는 증인2세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두 분은 성격이 극도로 맞지 않아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혼을 하셨다. 이혼하신 후 어머니께서 나를 외갓집으로 데리고 가서, 키우셨다. 어린 시절... 비록 외갓집이었지만, 난 남부럽지 않은 아이였다. 외갓집에 유일한 조카였던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로부터 온갖 이쁨을 독차지 하며 곱게 자랐다. 당시 나의 어머니는 이혼 후에 무활동이 되셨는데, 난 외할머니와 이모 손에 이끌려서, 꼬맹이 때부터 집회를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재혼을 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당시에 아버지는 재혼을 하셔서, 새어머니가 계셨고, 그 사이에 태어난 나의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집은 나에게 그다지 행복한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두분 다 성격이 강하신 편이라, 자주 다투시고, 나도 체벌을 많이 당하는 편이었다. 항상 집이 무서웠던 나는 밖으로만 돌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이, 난 항상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제명처분을 받으신 상황이었지만, 그분은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셨고, 자주 성경과 출판물을 보시며, 증인시절을 그리워하셨다. 그분은 나중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복귀를 하셨고, 새어머니도 침례를 받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무렵, 회중장로였던 고모부가 나를 그분의 회중에서 모범이 되는 형제로 알려진 당시 고등학생이던 JJ라는 형을 나에게 연구사회를 시켰다. 그 형은 나의 증인시절을 통털어서 나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내가 본받고 싶었던 그 시절의 정신적 지주이자 역할모델이었던 그 형을 난 초등학교5학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 형은 학교성적도 전교권이었고, 영적으로도 열심이 대단했으며, 아주 지적이었던 사람이셨다. 나중에 믿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대를 진학했으나, 1학년만 마치고 그만두고, 한 때, 스스로 독신을 서약할 만큼, 온 영혼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고 싶어 했던, 진실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게 다소 흠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증인사회에서는 보기가 드물게 언행이 일치하던 사람이었다. 그 형은 연구생이었던 나를 자기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나에게 항상 영적인 도움을 주고자했던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 형은 나중에 중립을 지키고 나와서, 봉사훈련학교를 입학하고, 영어회중의 특파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2학년 때까지, 집회는 참석했으나, 그다지 모범적이고 얌전한 증인스러운 아이가 아니었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이 그렇듯이, 화나면 친구들과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하는 지극히 이방인스러운 아이였다. 나의 생활의 중심은 이방인친구들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2학년 때,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 연구사회자 형은 나를 회중의 또래 얘들과도 친해지도록 하기위해, 나를 청소년 모임이나, 순회방문식사를 일부로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회중의 또래 아이들과 이방인친구들만큼 친해졌고, 그 얘들과 어울려 다지면서 봉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2번연설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내가 미침례 전도인이었을 무렵, 아직 이방인스러운 모습을 벗지 못하고, 학교에서 친구와 치고 박고 싸움을 해서, 살짝 멍이 든 채 집회를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내 연구사회자형이 말했다.
“잘하는 짓이다!! 전도인신분인 녀석이 학교에서 쌈박질이나 해!!”
난 그 형의 그 말 한마디에 증인스럽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사실 어찌 보면, 그 나이 때는 원래 그렇게 크는 것인데.. 암튼 그 후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학교에서 치고 박고 싸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중학교2학년 11월 어느 날 증인친구 두 명과 함께 침례를 받게 되었다. 그때 나와 절친했던 어릴 적 친구. BH와 JT.. 우리 셋은 함께 방학 때가 되면, 같이 보조파이오니아를 신청하고, 밤늦게까지 터미널봉사하고, 집에 가면서 분식집에 들러서 오뎅, 떡볶이를 사먹곤 했었다.. 학교 시험을 볼 때도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할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우리 셋이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을 때,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정규파이오니아를 시작했었다.
그중 JT는 나중에 중립이후 봉사훈련학교(MTS)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광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몇 년전에, 나는 JT와 몇 번 술자리를 갖은 적이 있었다. 20대후반의 젊은 장로였던 그 아이는 이미 증인에게서 정신적으로 멀어져 버린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난 너를 증인이 아닌 어린시절 친구로서 만나는 거야. 사실 나도 한번씩 증인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게 아닌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내가 만약 증인을 그만둔다면, 내 인생에 남는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에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난 고등학교에 가서도, 방학 때만 되면, 꼬박 꼬박 보조파이오니아를 하고, 일주일에 꼭 두 번씩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집회에 참석하는 모범적인 형제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어린시절부터 배웠던 증인의 이론이 진리라고 믿었었고, 내 연구사회자형이 그랬듯이, 빨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정규파이오니아 하면서, 회중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소망이었다.
이방인스러웠던 나의 행동이나 태도도 점점 골수증인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당시 속해 있었던, 광주 SK회중... 당시 우리회중의 주임감독자였던 K형제는 알코올 중독자에 집에서는 부인과 자녀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폭력적인 가장이었고, 그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회중에서도 한 번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자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분의 중학생 아들을 무식하게 패버린 일도 있었다. 특히, 그분의 큰딸이었던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거의 정서불안수준이었다. 증인을 떠나서, 인격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 분이셨지만, 우리 순회구의 대회감독자였던 또 다른 알콜중독자 J형제와 친한 덕분에 부대회감독자로 자랑스럽게 귀한 그릇으로 쓰이셨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2학년 무렵에 회중이 분할되어서, 광주 SL회중에 연합하게 되었다.
그 회중의 주임감독자였던 B형제.. 그분은 증인들이 대학을 가지 않던 시절에 대학을 가서, 대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셨던 증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인텔리축에 속하는 분이셨다. 증인사회가 오히려 대학을 나오고, 사회적인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대우해주듯이, 그분은 당시 30대초중반에 주임감독자를 하셨고, 지역대회연사로도 활동하실 만큼 지역사회에서 인지도가 있는 분이셨다. 하지만, 그분은 조직 내에서의 위치에 상관없이, 합리적이고, 관대하고, 젠틀한 분이셨다. 난 광주 다른 회중에서 장로들 간의 알력다툼에 의해 불필요하게 장로들이 해임당하고, 서로 견제하고 알력싸움도 대단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회중에서는 B형제의 따뜻한 카리스마에 다른 장로들도 그분을 존중하고 서로 분위기도 좋았었다. 덕분에 당시 우리 회중은 따뜻하고 가족적인 회중이었다. 회중성원들도 대체로 정이 많고, 인간적인 분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렇게 분위기 좋은 회중에도 미꾸라지 같은 분들이 계셨으니, 그분들은 두 K형제들이었다. (사실 둘이 친형제지간이다. 당시 형은 장로, 동생은 봉사의 종) 중졸이 최종학력인 두 K형제들은 나에게 뭐하러 대학을 가려하냐고 따지듯이 말하곤 했다. 사실 그 두 사람들은 콤플렉스에 찌들어서, 맨날 남들 뒤에서 욕 하는게 취미였던 별로 인성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우리회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침례를 받은 미모의 노처녀 자매님이 한분 계셨다. 증인 자매들 중 형제가 부족해서 실제로 결혼을 못하는 분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미모의 자매님에게는 그런 건 현실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분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형제들은 많았으나, 대학 다닐 때도 미인으로 소문났고, 서른 살의 나이에도 한참 어려 보였던 그 대졸자매는 어지간한 형제들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자매를 콤플렉스 덩어리 두 K형제들이 좋게 볼 리 만무했다. 눈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그분의 개인적 취향을 뒤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하곤 했고, 그 바탕에는 자신들의 학력컴플레스가 깔려있었다. 당시는 대학에 대해서, 이미 파수대를 통해서 전향적으로 풀어줬던 시기라, 대학을 가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두 가방끈 짧은 형제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주제넘게 나에게 대학을 가지 말 것을 강하게 충고하며,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라 나도 다소 혼란스러웠고, 정말 신세계가 가까웠는데,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순진했지만...
난 내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내 연구사회자형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으나, 그 형은 그 당시에 중립문제로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나오신 주임감독자였던 B형제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분은 대학교육을 받은 덕분에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분이셨으니, 당연히 나에게 현실적인 이유로 대학을 가라고 조언해주셨다. 이상한 원칙을 만들어서 강요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답답한 장로들도 많았을 텐데, 그분이 관념의 포로였던 그 당시의 나에게 증인치고는 비교적 현실적이고 유연한 안목을 가지고 조언해 주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까 언급했던 그 미모의 자매님도 내가 대학문제로 고민할 무렵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SY형제, 대학은 절대로 위험한 곳이 아니야.. 대학은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야. 대학도 안나온 형제들이 대학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 사람들 말 듣지 말고, 꼭 대학에 들어가. 알았지??”
그분은 대학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일부 증인들에게 이미 진저머리가 나 있었다.
그분들의 조언도 듣지 않고, 그 두 K형제들이 말한 것처럼 아마겟돈이 목전에 와있다고 착각하고, 내가 대학진학을 포기했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학에 가기로 결정을 하고, 전남대 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소망한 대로, 대학에 들어감과 동시에 정규파이오니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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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디서나 증인들 사는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있어서 최곱니다..90년대 초반은 정말 끝이 올것만 같았던 긴박한 분위기..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경험과 많이 오버랩되는군요...잘 읽고 있습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