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9월10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13장, 디모데후서3장
성경낭독: 누가복음1:1-4절
설교본문: 사도행전1:1-3절
설교제목: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복음
예배찬송: 143장(시47), 89장(시31), 184장(시67), 357장(시134).
눅1장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행1장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차례대로 살펴나가려 처음 발걸음을 뗍니다. 우리는 색다른 복음을 발견하거나 찾아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살폈던 복음서의 내용과 동일한 복음을 사도행전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이 주님의 생애와 연관된 이 땅에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면, 사도행전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보좌 우편에서 약속하신대로 교회를 세우시고 보호 해 가시는 천상에서의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복음이며, 우리의 소망이며 위로입니다.
세상의 모든 희망찬 시도들은 좌절되었고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불과 1세기 전에 가열차게 진행되었던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실험들은 부족함을 넘어 커다란 분리와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정치와 철학에서 우리는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산재해져 있는 영적인 시도와 종교들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복음서들도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가게 될 사도행전도 유일한 소망인 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지금이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전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설교되고 가르쳐지는 일입니다.
우리시대 가장 비극적인 일은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며,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혼란 속에서 이러 저리 방황하며 살아간다는데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황과 혼동을 제조하고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교회라는데 있습니다. 유일한 복음을 소유한 교회가 이 복음을 멸시하게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세상의 방식들과 타협함으로 혼돈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곳에 마음을 두는 일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나 지금이나 지속되는 위협입니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복음에 대한 왜곡은 심란합니다. 유일한 소망과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끊임없이 복음에서 이탈하여 왜곡의 길을 걸었고, 탈선으로 무지와 어둠속에 떨어지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증거들을 통하여 마음을 붙드셨던 것처럼, 승천하신 이후에도 교회에서 발생한 숱은 이탈에서 바로 잡기 위해 사도들과 사역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유일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교만을 치료하고 주의 복음에 천착하도록 주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의 모성적 돌봄 속에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기원을 찾으려 한다면 21세기의 상황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기원은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교회를 알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사들이나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교회의 기원이 어디인가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1: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아로새기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는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 된 사람들이 전해준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다고 말합니다. 데오빌로를 비롯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읽게 될 모든 수신자들이 알고 있는 복음을 더욱 확실하게 새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저술목적을 알리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부터 마지막 승천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승천을 꼼꼼하게 기록한 사람은 누가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주님의 승천을 분깃점이 됩니다. 주님의 지상사역인 누가복음과 주님의 천상사역인 사도행전을 가르는 기준이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수신자였던 데오빌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이름의 뜻대로 교회에 가해지는 압박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는 이방인 성도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하라는 호칭이 붙든 것으로 보아 로마의 고위공직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누가가 성경을 쓰고 출판하는 일에 후원자일 수도 있고 중요한 독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의 첫 번째 책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것을 다루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첫머리도 바로 누가가 처음 다룬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1-3절을 봅시다.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전체의 요약입니다. 또한 다른 모든 복음서들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두 가지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누가가 기술한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영원에 계신 분으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구주가 되시기 위해 참 하나님의 아들께서 참 사람이 되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되 무죄하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수많은 표적과 이적을 통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알리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일한 구원자요 메시야임을 숨기지 않으셨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가 전하고 있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셨고 지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신념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누가는 가감 없이 주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복음을 알고자 한다면, 주님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는 성경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가르치신 복음의 내용을 알려하면 성경을 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여전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지와 어둠이 우리시대에도 퍼져 있습니다. 21세기지만 여전히 암흑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패악한 무지에 사로잡혀 시선을 주의 말씀에 매이지 못하게 하고, 주님 밖에 머물도록 붙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는 모세의 책들과 선지서와 시편, 사도들이 전한 복음서와 선지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 참된 생명과 위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근원인 복음이 내용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기독교는 특정한 가르침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내용입니다. 복음 도덕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와 복음서 저자들이 전했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가르쳤던 내용이 바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주제였고,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문제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서에서 다루는 것처럼 유일한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것들을 혼합시키고,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왜곡의 길로 미끄러져간 일입니다. 우리 시대 또한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천착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누가는 이어서 앞선 복음에서 다룬 범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절입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예수님의 승천은 이 땅에서 복음의 역사의 종착역입니다. 주님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엡4:10). 승천으로 인해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완벽하게 성취되었고, 우리는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셨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셨지만,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천상에서도 사도들이 증거하고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릴 것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마28:20) 주님은 약속대로 복음의 말씀과 사역자들을 통하여 자기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계십니다.
사도들을 택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훌륭한 성품이나 여러 가지 공헌을 통해서 사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아무런 공로 없이 사도의 직임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말고, 소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 집중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 할 때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신 소명, 주님의 부르심에 집중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사도는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계시는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신실하게 전하는 일입니다. 이일은 ‘성령으로 명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이성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곧 하나님의 권위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를 통해서 친히 부활하여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모든 복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전하는 복음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단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복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사역자들을 통하여 주의 뜻을 가르치시고, 당신의 교회를 돌보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토대가 없이는 그 어떤 권위도, 사도들의 증언도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에 있어서 한 점의 의혹도 없도록 하기 위해 부활은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40일 동안이나 제자들에게 실제로 자신을 보이셨으며, 함께 이 땅에 머물러 믿음 없는 자들에게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내내 하신 말씀과 동일한 영생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핵심교훈은 곧 하나님나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거듭남으로 시작해서 복된 영생으로 완성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빚어주시기 까지는 하나님나라와 상관없는 외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통치 또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선행, 인과응보, 양심과 도덕법까지가 그 한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 아버지의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복음의 말씀으로 들어올리셔서 하나님의 나라, 주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시고, 완성될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복음은 삶의 개선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전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전 것을 새롭게 하신 분이십니다. 창세기부터 예언되어오고 약속하신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철학이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다면 복음을 믿을 의무가 없을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철학의 이론들에 따르면 이것을 믿어도, 저것을 믿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하고 우리가 들은 복음은 유일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복음은 데오빌로에게만 향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신 것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육체로 본 것처럼 우리는 그 날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개선시킨다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든다는 개혁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죄가 소멸되며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대단한 정치적 지도자가 나오면 좀 더 나은 정책으로 나라가 변화되고 좀 더 개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유하게 되고 돈이 많아지면, 삶에 큰 안락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도, 사회적 구조도, 돈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새롭게 하십니까? 무엇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복음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무엇을 친히 가르치셨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행하시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