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역 선교사의 삶-경남·부산지역 선교사의 삶
부산·경남에서 20년간 활동한 아담슨(Adamson) 선교사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최초 호주 선교사는 데이비스(Davies, 1889.10.2-1890.4.5)이다. 두 번째는 맥케이(Mackay, 1891.10.12-1893.8.23) 일행이며, 세 번째는 아담슨(Adamson, 1894.5.20-1914.3.)선교사이다. 부산시 중구 동광동 5가 26번지(本町 5丁目 26)에 아담슨 부인(Eliza Annie)의 묘가 있었으나 멸실되었으며, 현재 마산시 합성2동 1번지(창신대학)에 순직기념비가 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20여 교회를 설립한 아담슨 선교사
아담슨(Adamson, Andrew, 한국명: 孫安路)은 호주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북부에서 영국성서공회 선교사로 5년간 활동하였으며, 인도 장로교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Indi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영국에 일시 머물다가 호주빅토리아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가 파송하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4년 5월 20일 내한하였다. 1894년부터 1909년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마산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894년 7월 15일 부산 최초의 세례식을 베어드(Baird)가 집례 할 때 아담슨은 성경(히12:1-2) 봉독과 설교를 담당했다. 1895년 11월 3일 유아 세례 1명을 포함하여 남자 10명과 여자 11명 등 모두 22명에게 세례식을 집례 하였다. 1896년 3월에는 초량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반을 개설하기도 했다. 1898년 예배당 건립을 계획하고 1899년 안식년 휴가 때 호주 빅토리아 지역을 순회하며 건축기금을 모금하여 1900년 6월 초량에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초량교회에 시무하면서 여러 지역을 전도해 동래, 기장, 울산, 거창, 의령 등에 선교구역을 확장하였다. 가까운 동래, 사상, 구포지역은 걸어 다니며 전도하였으며, 좀 더 멀리 갈 때는 조랑말을 타고 김해, 진영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마산이나 통영의 먼 길에는 통통배를 이용하였다.
한편, 1895년 10월 15일 부산 좌천동에 일신여학교를 맨지스(Menzies)가 설립할 때 도움을 주었으며 고아원을 설립하고 사회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1896년 6월 10일에는 부산 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식(심취명-김봉숙) 주례를 담당했다.
아담슨 선교사는 부산과 경남지역에 참으로 여러 교회를 설립(시무)한 기록이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종합 분석하면 15년간(1894-1909년) 부산, 진주, 마산, 통영, 거창교구에서 매년 1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사례로 진주교구 관할의 의령군에서 서암(西岩,1905), 정연(定連,1907), 용소(龍沼,1907), 이목(梨木,1907), 분계실(分溪室,1907), 마장(馬場,1907), 상정(上亭,1908), 신반(新班,1908), 이목정(梨木亭,1908)교회를 설립하였다. 마산교구에서는 함안군의 사촌(舍村,1897), 윤외(輪外,1908) 함안(咸安北,1909)교회를 설립하고 마산(舊馬山,1901)과 문창(馬山,1901)교회도 설립하였다. 부산교구에서는 양산(梁山邑,1906)교회를 설립하고, 통영교구에서는 충무(大和町,1905)교회와 고성군 배둔(背屯,1907), 고성(固城邑,1908)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밖에 창원에서 월백, 본포제일교회 등을 설립하므로 부산·경남지역에서 20여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마산선교부의 개척과 창신학교의 설립
아담슨은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마산(馬山府 外西面 上南里)에 거주하였다는 기록(朝鮮在留歐米人名簿)이 있다. 그가 마산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선교 사업은 성경을 가르치는 청소년 교육사업이었다. 매주 토요일과 주일에는 마산 근교를 순회하며 성경을 배포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11년 7월 마산선교부를 개설하였으며, 1911년 12월 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가 조직될 때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거제, 함안, 의령, 마산, 송남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
그는 마산에서 선교 활동 하면서 한옥을 사들이고 10여명을 모아 1906년 5월 17일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하였다.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쳐 새로운 문물(文物)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이 독서숙은 1909년 9월 15일 창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초대교장으로 1911년 8월 18일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순회 전도(1907.2)하면서 선교 사업에 대하여 “한국에서 현 상태로 순회여행을 하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지만 꼭 필요한 봉사이다. 선교사 자신에게는 모든 계층의 사람을 상황과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이 된다. 또한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부산·경남지역에서 순회 전도와 교육 선교에 20년간 봉직하다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14년 3월 한국을 떠나 호주 멜버른을 경유하여 영국으로 돌아가 1915년 8월 4일 런던에서 별세하였다.
부산에서 순직한 아담슨 부인 엘리자(1861-1895)선교사
아담슨 선교사의 부인 엘리자 A.(Adamson, Eliza Annie)는 1861년 출생하였다. 7살의 딸 바이올렛(Violet)과 6살의 딸 마벨(Mabel)을 데리고 남편 아담슨과 함께 1894년 5월 20일 내한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1년 6개월 만에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산에서 1895년 11월 27일 호주 선교사로는 세 번째 순직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삶에 대하여 마산 창신대학에 건립된 순직 기념비에는 “1894년 5월 20일 남편 Adamson 선교사와 같이 한국 선교를 위하여 부산에 부임하였으나 한국에 온지 1년 6개월 만에 심장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서 별세하셨다.
아담슨 선교사는 슬픔을 이기고 1901년 마산 최초 교회인 마산포교회(문창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목사가 되고 또한 1908년 경남 최초의 신식학교인 창신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초대 교장으로서 선교와 더불어 신식 교육과 민족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아담슨은 첫 부인 엘리자와 사별한 뒤 영국(런던) 출신 페인(Camilla G. Payne) 선교사와 재혼하였다. 페인은 1896년 11월 내한하여 1914년 2월까지 봉직하다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1925년 별세하였다.
글·신호철 장로 (양화진선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