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전 리
풍산읍에서 구담으로 연결되는 916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와 중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서면 여자못을 만난다. 이 못을 감싸 돌면 검무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갈전리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에 작은 꽃동산을 만들어 오랜 세월을 이겨낸 볼품 있는 소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이 소나무의 연륜을 통해 이 마을의 역사를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곧 바로 올라가면 1리인 갈밭마로 연결되고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3리인 원당으로 이어진다. 갈전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풍남면 하회동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면 장기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갈전리로 개편되었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시·군 통합에 의해 안동시 풍천면으로 변경되었다.
행정구역은 갈전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와 인구는 1리가 96가구에 261명, 2리가 87가구에 265명, 3리가 58가구에 127명의 주민이 있어 전체 241가구에 653명의 주민으로 구성된 비교적 큰 동리이다.
지형은 서북쪽이 리의 주산(主山)인 검무산(劒舞山)을 등으로 한 산지(山地)이고 동남쪽이 비교적 낮은 구릉에 논밭이 형성되어 있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모산, 갈밭, 진천 등 3개 마을, 2리에 못골, 밤나무골, 새터, 면소 등 4개 마을, 3리에 양광, 원당, 지당, 너다리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도청 이전으로 행정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 못골
조선 선조(宣祖) 때에 순흥(順興) 안씨(安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이 곳에 작은 못이 하나 있었다 하여 현재까지 못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1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샛터·새마·새마을
여자지(女子池)못 둑 아래쪽에 위치한 동네이며, 근래에 와서 새로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새마을·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밤나무골
갈전 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여자지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보 밑에 형성된 마을이다.
▶ 갈밭·갈전(葛田)·가을전(加乙田)
조선 선조 임금 때인 1592년 조연원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당시 이 지역에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산천을 뒤덮고 있었다고 해서 갈밭이라 불렀다. 갈전은 갈밭의 한자표기이며, 가을전이란 지명은 여자못과 갈대밭에 새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더할 가(加) 새 을(乙) 밭 전(田) 자를 써서 가을전이라 했다. 본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934년 행정 구역 변경에 따라 풍천면에 편입되었다.
가 곡 리
안동시내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나 구담으로 가는 길목에 가일이 있다. 본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일, 지곡촌, 갈전리의 일부와 풍남면의 하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가일과 지곡의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가곡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70가구에 479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산(井山)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가곡리는 1리에 논동골, 가일, 도가걸, 시골 등 4개의 자연마을과 2리에 중리, 평장골, 선원, 못밑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로를 세운 안동 권씨 태사 행(幸)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후 지금까지 약 500년 동안 이들의 삶의 자취가 담겨진 안동 권씨 집성마을이다.
퇴계 선생의 두 번째 부인인 권씨 부인이 이 마을 태생으로 퇴계에게는 처가 동네가 되기도 한다.
▶ 지곡(枝谷)·가일(佳日)·가곡(佳谷)
이 마을은 옛날에 지곡(枝谷)이라 불렀는데 안동 권씨와 순흥 안씨가 사이좋게 땅을 갈라서 사는 집성마을이다. 정산을 바라보며 오른편에 안동 권씨가 터를 잡았고 왼쪽에 순흥 안씨가 터 잡았다. 안동(安東) 권씨(權氏)의 집성마을인 이곳을 지곡이라 부르는 데는 성씨와 관련이 있다. 권(權)은 가지가 많아야 번성한다는 뜻에서 가지라는 뜻이 담긴 지(枝) 자를 써서 지곡이라 하였다. 훗날 지(枝) 자를 가(佳)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마을 앞으로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풍산들 너머로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장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아름다울 가(佳) 자로 바꾸어 가일 또는 가곡이라 하였다. 마을 뒷산인 정산에 당이 있어 마을의 안일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정월 보름날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현재 지내지 않고 있으며 큰마·웃마·아랫마로 나누어진다.
◇ 큰 마:가일의 중심되는 곳으로 가장 많은 주민들이 산다고 해서 큰마라 한다.
◇ 웃 마:큰마 위에 있는 마을이라고 웃마라 한다. 달군골을 통해 정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 아랫마:마을 입구에 있는 가일못 위에 있다. 큰마를 기준으로 아래쪽에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정산(井山):가일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산이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거물산' 동쪽에 있다. 산 위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정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전한다. 팔역지(八域志)에는 정산지하(井山之下) 활만인(活萬人)'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옥정 봉(정산 봉우리)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했으나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정산은 묘하게도 마을 가운데로 두 산줄기를 흘려 놓아 마치 용이 두 마리 새끼를 보듬고 젖을 먹이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을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마을을 갈라놓은 형국이니 두 성씨(安, 權)가 서로 다투는 형국이라 한다.
그러나 다툼이 끝나면 금방 화해가 되어 뒤끝은 없다고 설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마리 새끼가 어미의 젖을 놓고 서 로 다투다가도 젖을 먹고 나면 다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 학자수(學者樹):마을 입구에 접어들면 왼편으로 가일못이 펼쳐져 있고 이 못둑으로 오르는 언 덕을 오르면 연못 주위에 엄청난 크기의 회나무가 서 있다. 동네 정자나무로 군락을 이룬 이 나무에 의해서 커다란 그늘이 만들어지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기도 하지만 학동들이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해서 학자수라 부른다.
▶ 시골
풍산읍 소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뒤에 신랑고개가 있는데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사람이 열 세 살 된 아들을 아틈실에 장가를 보냈으나 초행 때 가마를 타고 가던 신랑이 이 고개에서 까닭 모를 죽음을 당해 신부가 일평생 이 고개를 바라보고 살았다 해서 신랑고개라 부른다. 시골이라고도 한다.
▶ 도가걸
시골마와 가일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지방도에 연접하여 형성된 마을로 길가마을이란 의미와 옛날에 술 빗는 도가가 있다고 해서 도가걸이라 한다.
▶ 논동골·노동(魯洞)
안동권씨 노동재사와 노동서사가 자리잡은 마을이다. 1818년 노동정사(魯洞精舍)를 건립하여 이 부근 아이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그 당시에는 민가는 없고 정사만 있었으나 1947년 초등학교가 설립된 후에 민가가 들어섰다.
◇ 노동서사(魯洞書舍):병곡(屛谷) 권구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사림에서 1768년에 지은 건물이다.
▶ 선안(仙安)·선원(仙原)
화산(花山) 권주(權柱,1457∼1505) 선생이 수학한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선원강당(仙原講堂)이 마을에 있다는데서 마을의 이름을 선원이라고 했다. 가곡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선원강당:화산 선생이 공부하던 옛터에 후손들이 지은 강당이다. 강당 1동과 선원재사 1동이 있다. 화산 선생의 묘소는 재사 뒤편 정산 서록에 있다. 같은 날 돌아가신 정부인 고성이씨의 묘가 그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