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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사상공부
사람 속에는 우주의 나이테가 있다. 사람의 몸과 맘에는 137억년 우주의 역사가 녹아 있고, 37억년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돼 있고 맘에는 2백 만년 인류역사가 새겨져 있으며 5천년 민족사가 살아 있다. 사람의 맘속에는 영원한 신적 생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사람은 생명과 역사의 씨알이다. 37억년 생명진화와 2백 만년 인류역사의 씨알인 사람 속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다함없는 지혜가 숨겨 있다.
사람은 스스로 하는 생명의 주체다. 사람은 마땅히 물질과 기계, 돈과 권력의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씨알사상은 사람을 생명과 역사의 씨알로 보고 옹글고 알찬 사람이 되어 물질과 기계의 주인과 주체로 살자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가리킨다. ‘나’가 없는 사람은 없다. 내가 생명과 역사의 씨알임을 깨닫고 그 씨알을 싹틔우고 꽃과 열매를 맺어 옹글고 알찬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서로 살리는 길을 열어가자는 것이다.
씨알사상은 유영모·함석헌 선생님이 내놓은 사상이다. ‘씨알’로 쓰는 것은 자연생물학적인 씨앗이나 씨알을 넘어서 사람의 생명과 정신에 깃든 깊은 뜻과 사명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ᄋᆞᆯ’에서 ㅇ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둥글고 큰 세상을 뜻하고 ㆍ는 하나의 점과 같이 작은 ‘나’를 나타낸다. ᅟᅠᆯ은 솟아오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활동을 나타낸다. 흙속에 묻힌 씨앗이 두터운 흙덩이를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듯이 ‘나’는 물질의 힘과 육체의 욕망을 뚫고, 둥글고 큰 세상을 향해 솟아오르는 생명과 정신의 작은 씨눈 같고 새순 끝과 같은 것이다.
‘씨’는 사람의 입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깊고 낮은 소리이고 ‘ᄋᆞᆯ’은 가장 크고 높은 소리다. 씨알은 작은 것이지만 울림이 깊고 크다. 씨알 속에는 무궁한 생명력이 있어서 생명과 정신의 껍데기를 깨고 알맹이를 드러내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씨알사상을 공부하여 내가 나를 꽃 피우고 열매와 씨를 맺어 남을 널리 이롭게 하고 세상을 물성과 이치에 따라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기 바란다.
씨알사상은 내가 씨알임을 깨닫고 씨알로 살자는 사상이다. 씨알은 스스로 싹트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와 씨알을 맺는다. 씨알은 저 자신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함으로써 많은 생명을 먹이고 살려서 세상을 풍성하게 한다. 씨알이 씨알을 낳듯이 사람은 사람을 낳는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겉 나, 몸 나는 부모가 낳아주지만 속 나, 참 나는 내가 스스로 낳아야 한다. 또 역사와 사회의 씨알인 사람은 새 역사와 새 사회를 낳을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씨알사상은 사람마다 씨알임을 깨닫고 씨알의 구실과 사명을 다 하자는 사상이다.
차례
1부 씨알의 존재
1 씨알과 생명진화
2 씨알의 구실과 사명
3 스스로 싹트고 자라는 씨알: 섬김과 기다림의 교육
2부 씨알의 활동
4 곧게 서서(直立)과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됨(天地人合一): 주체와 전체의 일치
5 희생과 상생: 죽어야 산다
6 몸 맘 얼의 울림
3부 씨알의 길
7 내가 생명의 길이다
8 씨알의 믿음과 삶
9 국가주의를 넘어서 세계평화로
10강 자치와 협동
1부 씨알의 존재
1 씨알과 생명진화
씨알은 생명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났다. 씨알 속에는 생명진화의 비밀과 목적이 담겨 있다.
1) 생명진화의 비밀, 적과의 공생
37억 년 전쯤에 지구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생겨났다. 이 원시 생명체를 세균 또는 박테리아라고 한다. 이것들은 세포분열의 방식으로 번식했다. 몸이 커지면 몸이 쪼개지는 방식으로 개체 수가 늘어난 것이다. 몸을 쪼개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변화나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20억 년 가까이 아무런 발전과 진화가 없었다.
그때까지 세균들은 수소에서 힘과 영양을 얻어 살았다. 본래 산소는 생명에 해로운 것이었는데 산소에서 힘과 영양을 얻는 세균이 생겨났다. 산소를 마시고 사는 세균들은 사나워져서 다른 세균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약한 세균들은 무리를 지어 막을 둘러쓰고 살았다. 막을 둘러쓴 세균들은 막을 열고 사나운 세균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진핵 세포다. 사나운 세균은 새로 생겨난 세포에서 발전소와 엔진 구실을 했다. 이것이 식물에서는 광합성 작용을 하는 엽록소요 동물에서는 미토콘드리아다. 약한 세균들과 사나운 세균의 공생으로 생명세계에는 눈부신 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의 공생, 적과의 공생을 통해서 높고 아름다운 생명세계가 열렸다는 사실은 생명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갖게 한다.
약한 세균들과 사나운 세균이 공생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몸을 쪼개는 방식으로는 번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씨앗이 생겨났다. 작은 씨앗 속에 생명의 알짬을 담아서 씨앗을 통해 번식하게 된 것이다. 생명체의 몸을 쪼개지 않고 생명체의 알짬을 씨앗에 담아서 생명체의 몸 밖에서 번식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개체는 죽어도 씨앗을 통해서 생명을 전하고 늘어나게 할 수 있다.
2) 개체의 죽음과 진화
이제 거의 모든 생명체는 씨앗에서 나서 많은 씨앗을 남기고 죽는다. 개체가 죽으면서도 씨앗을 통해서 생명을 전하고 늘리는 일이 10억 년이 넘도록 이어왔다. 그러는 사이에 생명은 깊어지고 높아지며 풍성해지는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뭇 생명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진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스스로 생명진화의 매체가 되고 생명진화의 씨알 구실을 하였다.
씨앗은 생명의 목적이면서 수단이다. 뭇 생명은 씨앗을 맺고 퍼뜨리기 위해서 살며, 씨앗은 생명을 낳고 이어가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 있다. 씨앗은 자기를 흙 속에 묻고 깨지고 죽음으로써 생명활동을 펼친다. 씨앗은 자기를 버리고 깨트리고 죽임으로써 사는 길을 보여준다. 생명의 세계에 죽음은 왜 생겼는가? 개체의 생명은 죽더라도 전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이 생겨났다. 낮고 작은 생명에서 높고 큰 생명으로, 물질에서 영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개체의 죽음과 씨앗의 죽음이 생겨난 것이다. 육체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고 물질로는 죽고 정신으로는 살기 위해서 생명세계는 죽음을 감수하게 된 것이다. 물질의 낮은 단계서 정신과 영의 높은 단계로 진화하고 올라가고 초월하기 위해서 개체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3) 사람, 생명진화 꼭대기에 핀 꽃
생명의 진화과정을 더듬어 보면 아메바, 물고기,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쳐 사람이 나왔다. 사람의 몸속에는 37억 년 생명진화의 역사가 담겨 있고 맘에는 2백만 년 인류 역사가 새겨져 있고 정신에는 5천 년 민족사가 들어 있다. 정신 속에는 신령하고 영원한 생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천문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는 우주의 나이테가 들어 있다. 사람 몸에 있는 무거운 원소들(탄소, 산소. 철 등)과 우주의 별들이 탄생할 때 생긴 원소들이 똑 같다. 우주의 별들을 형성한 물질이 지구가 되고 지구의 물질에서 생명이 나오고 생명에서 사람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몸속에 우주의 나이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37억 년 생명진화의 역사 끝에 핀 꽃이고 맘은 2백만 년 인류역사 끝에 맺은 열매이며 얼은 5만 년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 sapiens) 역사 끝에 맺힌 씨알이다. 사람의 몸은 37억 년 자란 생명나무 꼭대기에 핀 꽃이다. 내 얼굴은 37억 년 동안 생명진화의 역사가 다듬고 빚어낸 것이다. 저마다 다르게 생겼지만 사람의 몸과 얼굴은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추하고 못나 보여도 그 얼굴 하나를 빚기 위해서 37억년 생명진화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존귀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한없는 자부심과 고마움을 지녀야 할 것이다.
사람은 우주의 씨알이고 생명진화의 씨알이다. 사람의 몸과 맘 속에 우주의 역사와 신비가 깃들어 있고 생명진화의 역사와 방향과 목적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몸과 맘은 우주보다 깊고 높다. 사람의 몸과 맘이 우주의 중심과 꼭대기다. 사람의 몸과 맘 속에서 우주의 뿌리와 깊이가 드러나고 신비와 뜻과 목적이 밝혀질 것이다.
사람 속에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잠시 피었다 지는 아름다운 꽃처럼 사람의 몸과 맘도 잠시 살다가 죽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무궁한 생명이 들어 있고 신령하고 영원한 생명의 불씨가 타고 있다. 사람 속에 우주와 생명진화의 보람과 값, 뜻과 목적이 들어 있다. 씨앗이 작고 초라하듯이 사람은 한없이 연약하고 모자라고 못난 존재일수 있으나 그 속에는 한없는 가치와 생명을 품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은 가장 존귀하고 값진 존재다. 사람은 우주와 생명진화의 값과 보람, 뜻과 목적을 드러내고 실현할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가진 존재다. 사람은 자기 속에 우주와 생명진화의 값과 보람, 뜻과 목적을 지닌 존재이므로 자기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 곧 우주와 생명진화의 값과 보람, 뜻과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4) 복숭아 씨의 비유, 씨알사상
이러한 씨알사상을 복숭아 씨로 설명할 수 있다. 복숭아에는 껍질과 속살과 씨가 있다. 껍질은 곱고 아름답다. 껍질은 속살과 씨를 보호하는 구실도 하지만 짐승과 사람의 눈을 끄는 구실을 한다. 복숭아의 목적은 껍질에 있지 않다. 때가 되면 껍질은 스스로 갈라지고 터지거나 벗겨져 버린다. 껍질 속에는 속살이 있다. 속살은 영양이 풍부하고 달콤하지만 이것도 복숭아의 목적은 아니다. 속살은 아낌없이 주자는 것이다. 품고만 있으면 속살은 곯아버리고 썩어버린다. 속살 속에는 씨가 있다. 씨는 딱딱하고 써서 먹을 수가 없다. 복숭아의 목적은 씨에 있다. 씨를 통해서 복숭아는 새로 날 수 있고 널리 퍼질 수 있다. 씨만 살아 있으면 복숭아는 영원히 살 수 있다.
사람의 생명도 껍질과 속살과 씨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의 외모, 재주, 솜씨, 돈과 지위와 같은 것은 다 껍질이다. 이것들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고 생명과 맘을 지키는 구실을 하지만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생명과 인격을 높이지는 못한다. 생명의 속살은 맘이다. 맘이 통하고 맘을 주고받을 때 부부관계와 친구관계가 지속된다. 맘의 정(情)은 아낌없이 주자는 것이다. 맘의 정을 주지 않고 품고만 있으면 맘은 곯고 메말라진다. 맘의 정을 주고받으면 풍성하고 기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맘속에 씨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한 사랑, 석가가 말한 자비, 공자가 말한 인(仁), 소크라테스가 말한 참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이 아니라 복숭아씨처럼 딱딱하고 쓴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인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인생의 속씨인 사랑과 자비를 지키고 살려나가면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
물음과 새김
1 씨앗은 어떻게 생겨났나?
2 사람이 우주와 생명과 역사의 씨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3 사람의 속 씨알은 무엇인가?
4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을까?
2 씨알의 구실과 사명
씨앗 속에는 수 억 년 동안 이어온 생명이 담겨 있고 수 억 년 이어갈 생명이 들어 있다. 씨알은 과거의 생명과 미래의 생명을 이어 준다. 씨알은 생명을 이어주고 전해주는 매체다. 작은 씨알 속에 생명의 알짬이 알뜰하게 들어 있다는 점에서 씨알은 생명의 속 알맹이 실체다. 씨알은 스스로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는 점에서 스스로 생명을 낳고 짓고 새롭게 하는 생명의 주체다. 씨알은 생명의 매체이고 실체이고 주체다. 우주와 생명과 역사의 씨알인 사람도 우주와 역사와 생명을 이어주고 전해주는 매체이고 우주와 생명과 역사의 속 알맹이를 지닌 실체이고 우주와 생명과 역사를 지어가는 주체다.
생명을 잇고 생명의 속 알맹이를 알차게 하고 생명을 짓는 일은 서로 이어져 있고 뗄 수 없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생명을 이으려면 알차야 하고 생명의 속 알이 알차면 주체가 된다. 생명의 주체인 참나가 되어야 생명을 이을 수 있고 속 알을 알차게 할 수 있다. 생명의 속 알이 알차게 되어야 생명을 잇고 주체가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을 이을 수 있어야 생명의 속 알이 알차고 생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생명을 이음
씨알은 과거의 생명을 이어 받아 미래의 생명에로 전하는 구실과 사명을 지니고 있다. 씨알 속에 무궁한 과거가 있고 무한한 미래가 있다. 영원한 과거와 미래가 씨알 속에서 만난다. 사람 속에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들어 있고 무궁한 미래가 담겨 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통하게 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사람은 영원한 과거와 무궁한 미래를 잇는 존재요 그 둘을 하나로 통일하고 새로 짓는 주체다. 영원한 과거와 무궁한 미래를 잇고 통일하고 새로 짓는 나의 삶 속에 생명과 시간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하늘)도 참여한다. 지금 여기 나의 삶 속에 하나님도 우주도 역사도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을 잇고 통일하고 새로 짓는 일은 사람인 나의 일이면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나의 일에 참여하고 내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사람으로서 나는 삶의 주체가 되고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 된다. 하나님이 나의 일에 참여하게 하려면 작은 씨알처럼 나를 버리고 비우고 낮춤으로써 하나의 점처럼 작아져야 한다. 내가 작아지고 비워지고 겸허해져서 하나님이 나의 일에 참여할 때 나는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여기 나의 삶에서 결정된다. 지금 여기서 나의 삶이 잘못되면 과거도 허망해지고 미래도 불행해진다. 과거의 생명을 내가 지금 여기서 이으면 이어지는 것이고, 잇지 못하면 끊어지는 것이다. 부모의 삶, 스승의 생각, 나라와 겨레와 인류의 정신을 내가 잇고 옹글게 하고 새롭게 지어가야 한다.
정해진 운명이 미래서 다가오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 내 삶 속에서 나와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하나님과 하늘의 형상이 내 속에 있다. 사람에게는 관상, 심상,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관상은 심상의 껍데기요 심상은 하나님 형상의 껍데기다. 하나님 형상은 우주와 생명과 역사의 중심과 주체이고 하늘의 주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무한과 초월, 없음과 빔, 사랑과 참이다. 무한과 초월, 없음과 빔, 사랑과 참의 하늘을 품고 그리워하고 그 하늘 속으로 들어가 하늘의 자유를 얻으면 삶과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선 존재다. 하늘로 솟아올라 나아가서 하늘의 자유를 얻어 생명진화와 인류 역사를 잇고 알차게 하고 새롭게 짓는 씨알의 목적과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생명을 알차게 함
껍데기에 매이면 쭉정이가 되고 거짓된 씨알이 된다. 알차면 참된 씨알이 된다. 껍데기와 쭉정이는 생명과 역사의 불에 타서 없어지고 속 알맹이는 영원한 생명의 곳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생명을 이으며 새 생명의 싹을 튼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을 이으려면 생명의 속 알맹이를 옹글고 알차게 해야 한다. 생명의 속 알맹이를 옹글고 알차게 한다는 것은 생명을 깊고 높게 하고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생명을 알차게 하려면 지금 여기의 덧없는 시간에서 ‘늘 삶’(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 지금 여기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늘’(영원)에 이르러야 한다. ‘오늘’은 ‘오! 늘’이다. 덧없이 지나가는 오늘 하루의 삶에서 지금 여기의 덧없는 순간에서 감격과 감탄 속에서 ‘오!’하며 ‘늘’(영원)을 붙잡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서 영원을 붙잡고 영원을 살아야 한다. 오늘 이 순간의 덧없는 생명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씨알을 붙잡고 싹트게 하고 꽃 피우고 열매와 씨를 맺어야 한다.
어떻게 생명의 속 알맹이를 싹트게 하고 덧없는 시간 속에서 ‘늘 삶’(永生)에 이를 것인가? 사랑과 참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나와 너와 그의 삶에서 속 알맹이가 싹트고 늘 삶에 이르는 길은 사랑과 참의 길뿐이다. 사랑과 참이 생명의 속 알맹이이고 늘 삶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참으로 사랑과 참을 싹트게 하고 사랑과 참에 이르러야 한다. 사랑과 참에 이르면 생명은 스스로 깊어지고 높아지며 스스로 자라고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생명을 낳음
씨알은 스스로 저 자신을 낳고 저 자신이 되고 저 자신을 지어야 한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유전자의 자기복제’(自己複製)로 이해한다. 유전자가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기계적이고 공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생명을 생명답게 설명한다면 ‘유전자가 자기와 같은 유전자를 낳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는 것이다. 생명은 제가 저를 낳고 만들고 기르는 존재다.
씨알이 싹트고 자라고 꽃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씨알이 할 뿐 아무도 아무 것도 씨알의 일을 대신할 수 없다. 씨알은 제 몸으로 싹이 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제 자신으로 저를 낳고 짓고 피어나게 한다. 씨알이 저 자신을 낳고 스스로 자라듯이 사람은 저 자신을 낳고 짓고 기르는 존재다. 씨알이 씨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생명과 역사의 씨알인 사람도 저 자신을 낳고 짓고 기르고 다듬어내야 한다. 어머니가 나를 낳지만 몸 나, 겉 나를 낳을 뿐 속의 나, 맘과 얼을 낳지는 못한다. 겉 나인 몸 나는 어머니가 낳아주지만 속 나, 참 나는 내가 낳아야 한다. 씨알의 사명은 참 나를 낳는 것이다.
생명진화 과정 전체가 ‘겉 나’인 몸 나 속에서 ‘속 나’인 얼 나, 참 나를 낳는 과정이다. 생명은 땅의 물질에서 생겨났고 물질(몸과 환경) 안에 있으나 물질(몸과 환경)을 넘어선 것이다. 물질에 매인 생의 본능에서 감성과 지성이 닦여 나오고 감성과 지성에서 얼과 신이 솟아올랐다. 사람은 본능과 지성과 얼을 지닌 존재다. 사람은 몸 속에서 참나 속 나를 드러내고 닦아낼 책임과 의무와 사명을 지닌 존재다.
하늘에 이르러 생명진화와 역사를 완성함
사람은 오랜 생명진화 과정을 거쳐 생겨났다. 생명진화의 낮은 단계에서 생명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하늘을 향해 일어섰다. 생명진화의 끝에 나온 사람은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존재다.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사람은 땅의 물질세계를 넘어서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품고 하늘의 자유와 높음을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생명진화와 인류 역사의 중심과 끝이 내 속에 있다. 내가 하늘의 자유에 이르면 37억 년 생명진화와 2백만 년 인류역사가 보람되고 목적에 이르지만 내가 하늘의 자유에 이르지 못하면 생명진화와 인류역사가 헛되고 만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섬으로써 사람은 하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늘과 소통하고 대화함으로써 사람은 하늘의 자유와 사랑, 깊음과 높음, 뜻과 사명을 땅의 물질세계와 생명세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늘의 뜻은 무엇인가? 만물과 뭇 생명과 사람이 저마다 저답게 주체로서 옹글고 알차게 되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실현함으로써 사람은 생명진화와 인류역사를 실현하고 완성할 수 있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일은 땅 위에서 하늘을 닮은 둥글고 큰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둥글고 큰 세상은 저마다 주체로 참여하면서 전체가 하나로 되는 세상이다. 사람은 땅 위에서 하늘을 닮은 둥글고 큰 세상을 이룰 준비가 된 존재이며 그 세상을 이룰 사명을 가진 존재다. 사람은 씨알이 되어 가정과 일터에서, 이웃과 친구 사이에서 둥글고 큰 세상을 이루어가야 한다.
하늘의 자유에 이르러 물건과 기계를 부림
생명은 물질에서 나왔으나 물질을 넘어선 존재다. 생명진화는 땅의 물질을 넘어서 하늘에 이르자는 것이다. 본능적 욕망과 감정은 물질에 매인 것이다. 물질은 주어진 법칙에 매인 것이다. 기계는 물질에서 나온 것이고 본능은 물질에 매인 것이다. 물질, 기계, 본능은 법칙에 매인 것이다. 물질과 기계와 본능 그리고 본능에 매인 감정과 지능은 물질과 환경의 법칙에 매여 종살이 하는 것이다. 하늘은 자유로운 것이다. 하늘의 품성과 뜻을 받아 하늘의 형상을 지니고 하늘의 자녀(天子)가 되면 물질과 법칙, 시간과 공간의 주인과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옛날에는 황제만이 천자라 하고 나라와 법의 주인노릇을 했으나 이제는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이고 헌법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는 국민이 천자다. 나라의 씨알인 국민이 법에 따라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하늘의 자녀인 참 나가 되어 생명진화와 역사를 실현하고 완성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늘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하늘의 자유를 얻어야 물질의 주인이 되어 물질을 이끌고 물질을 물성과 이치와 법도에 따라 실현하고 완성하며 바르게 쓰고 부릴 수 있다. 돈을 돈으로 권력을 권력으로 물건을 물건으로 기계를 기계로 바로 쓰고 보람 있게 쓸 수 있다.
물음과 새김
1 생명을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2 생명을 옹글고 알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3 어떻게 내가 나를 낳을 수 있나?
4 둥글고 큰 세상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3 스스로 싹트고 자라는 씨알: 섬김과 기다림의 교육
주체의 자유와 존재의 깊이
씨알은 스스로 뿌리 내리고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줄기와 가지를 뻗고 스스로 꽃과 잎을 피우며 스스로 열매와 씨를 맺는다. 스스로 하는 것이 생명과 정신의 근본원리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주체이며 만물은 저마다 저답게 스스로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주체는 물질적 조건과 법칙에서 자유로운 것이며 스스로 있는 만물의 존재는 한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우주 만물과 생명과 정신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모래알 하나 이슬 한 방울도 저답게 저로서 있는 것이다. 생명은 한없이 깊은 것이다. 세포는 ‘살알’(육체의 알, 생명의 알)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생명의 알맹이며 주체로서 살아 있다. 벌레 하나가 꿈틀거려도 우주 생명 전체가 꿈틀거린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 아파도 우주 생명 전체의 님이 아픈 것이다.
존재와 생명의 깊이를 다 알 수 없고 나타낼 수 없다. 모든 존재와 생명과 정신은 스스로 드러내고 스스로 실현해야 한다. 나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주체의 깊이와 자유를 다 헤아릴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다. 내가 헤아리고 설명하고 표현한 다음에도 남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름을 지키고 모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나를 모르고 너를 모르고 그를 모른다. 일과 물건의 깊이를 모른다.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체념한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나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면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 닿은 존재요 하늘을 품고 하늘을 닮은 하늘의 자녀다. 하늘에는 좌절도 절망도 체념도 없다. 풀이나 나무는 하늘 아래서 제가 저답게 살기 때문에 좌절도 절망도 체념도 모른다. 스스로 하는 주체인 생명은 좌절과 절망과 체념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정죄한다. 미워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너를 모르는 것이다. 네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면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고 꼭대기다. 사람은 저마다 제게 하늘이고 온통이다. 사람이 저마다 제게 얼마나 소중하고 안타까운 존재인지 알면 어떻게 ‘너’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고 절절하고 사무친 바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놓아둘 여유를 가져야 한다. 나는 그이가 아니고 그이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는 씨알은 저마다 주체이며 한없는 깊이를 지녔다. 씨알과 씨알의 만남은 서로 주체의 만남이다. 씨알의 알맹이는 한없이 깊어서 하늘에 닿아 있다. 씨알에게서 그리고 씨알과 씨알의 만남에서 하늘의 뜻과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과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속 알맹이가 싹이 트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속 알맹이가 싹이 트게 할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생명과 정신의 속 알맹이가 싹이 트고 자라게 하는 것보다 값지고 존귀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씨알은 저마다 주체이므로 서로 생명의 씨알이 싹트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참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씨알의 기다림과 섬김
생명과 정신뿐 아니라 일과 물건, 시간과 공간도 존재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신령하다. 무한한 뜻과 깊이가 들어 있다. 엄청난 가능성과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 우주물질세계의 허공 1cm3 안에는 원자탄 10억 개와 맞먹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고 한다. 차력사들이 단단한 돌을 두부 자르듯이 자르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맘 속에 엄청난 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과 맘 속에는 영원한 신적 생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물질과 생명, 시간과 장소, 기계와 물건, 돈과 일은 모두 하늘과 닿아 있고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씨알이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신령하고 존귀하다. 거기서 어떤 큰 일이 일어나고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모든 존재의 뿌리는 한없이 깊고 주체의 자유는 한없이 높아서 밖에서 함부로 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존귀하고 존엄하다. 그러므로 존재의 깊이와 자유가 드러나고 실현되도록 돕고 섬기고 기다려야 한다. 감각과 지성으로는 존재의 깊이와 주체의 자유를 알 수 없다.
안다고 생각하면 주체의 자유와 존재의 깊이를 모르게 된다. 안다고 하면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존재의 깊이와 주체의 자유를 왜곡하고 은폐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지식과 관념, 이론과 논리를 주장할수록 사물과 생명의 표면은 밝히 드러나는데 사물과 생명의 깊이와 전체는 더욱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과 관념은 만물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만물의 깊이와 생명의 주체를 드러내고 실현하려면 앎에서 모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겸허하게 모름을 인정하고 모름을 지키면 주체의 깊이가 드러날 수 있다. 참되게 알려면 모름의 어둠 속에서 겸허히 조용히 기다려라!
모든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자라고 새롭게 되고 높이 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저를 깨닫고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자라도록 받들고 섬기며 기다려야 한다. 생명을 억지로 자라게 할 수 없고 사람을 강제로 깨닫게 할 수 없다. 자라는 새싹을 빨리 자라게 하려고 억지로 끌어올리면 새싹은 말라 죽고 만다. 씨알의 교육은 농사와 같다. 씨알이 싹트고 자라는 것은 하늘과 땅과 계절의 힘을 입어 씨알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농부의 할 일은 씨알이 잘 자라도록 돕고 섬기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농사는 씨알이 스스로 하는 것이고 하늘과 땅과 계절이 협력하는 것이며 농부는 옆에서 돕고 섬기며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 교육도 농사와 같다. 배우는 학생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하늘의 신령한 기운과 사회현실의 환경과 시대정신에 힘입어 학생이 스스로 깨닫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교사의 할 일은 다만 옆에서 돕고 섬기며 기다리는 것이다. 생명의 교육은 섬김과 기다림의 교육이다. 생명의 관계는 서로 주체의 관계이므로 섬김의 관계이고 섬김의 교육은 기다림의 교육이어야 한다.
씨알교육: 줄곧 뚫림
씨알교육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되는 교육이다. 사람이 되어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하늘과 통하고 이웃, 만물과 통해야 한다. 생명은 통하는 것이다. 몸이 살려면 숨이 통하고 기가 통하고 피가 통해야 한다.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고 피가 막히면 죽는다. 목구멍에서 똥구멍까지 뚫려 있어야지 막히면 죽는다. 맘이 살려면 생각과 감정이 통해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막혀도 죽는다. 생각과 감정이 잘 뚫려서 통해야 맘이 신나고 힘차게 살 수 있다. 정신과 얼은 위로 하늘과 통하고 옆으로 이웃, 만물과 통해야 살 수 있다. 하늘과 막히고 이웃 만물과 막히면 정신과 얼은 죽는다.
하늘과 통하고 이웃과 통하려면 먼저 숨과 기가 통하고 감정과 생각과 뜻이 뚫려야 한다. 남이 나의 숨과 기를 뚫어줄 수 없고, 감정과 생각과 뜻을 뚫어줄 수 없다. 나의 숨과 기, 감정과 생각과 뜻은 스스로 뚫려야 한다. 내가 스스로 뚫어야 한다. 몸과 맘과 얼이 감정과 생각과 뜻이, 숨과 기가 하늘과 이웃을 향해서 줄곧 뚫려 있음이 사람됨의 목적이고 사람을 만드는 교육의 목적이다. 참된 교육은 하늘과 이웃을 향해서 줄곧 뚫리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라도 학생의 몸과 맘과 얼을 줄곧 뚫어줄 수 없다. 학생이 스스로 제 몸과 맘과 얼이 줄곧 뚫리게 해야 한다. 부모나 교사의 할 일은 배우는 이가 줄곧 뚫리도록 섬기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예수가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을 비난하지 않고 친구로 사귄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믿고 기다린 것이다. 그들에게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하늘나라가 시작될 수 있음을 믿고 기다린 것이다. 하늘나라는 사람이 하늘과 통하고 이웃 만물과 통하는 나라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과 통하고 이웃, 만물과 통하는 존재다.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었을 때 안창호는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키려고 했다. 씨알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이므로 안창호는 씨알이 스스로 깨어나고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많은 조직과 단체를 만들고 학교를 설립했지만 안창호는 씨알들의 앞장을 서거나 꼭대기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씨알들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안창호와 함께 교육입국운동을 벌였던 이승훈은 섬김의 정치, 섬김의 교육을 했다. 험한 일 궂은 일은 이승훈이 스스로 하고 좋은 자리 좋은 일은 남이 맡게 했다.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도 마당 청소와 변소청소를 앞장서 했다. 삼일독립운동을 일으키고 감옥에 가서는 3년 동안 변기통 청소를 맡아서 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씨알들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알고 그들을 주인과 주체로 섬기고 그들이 스스로 주인과 주체로 깨어 일어나 주인과 주체의 구실을 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함석헌은 말년에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말씀을 해달라고 하자 한참 생각하더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서로 기다릴 줄 알아야 씨알이 될 수 있다. 섬김과 기다림으로 깨우고 이끄는 것이 씨알의 가르침이고 이끌음이다.
물음과 새김
1 스스로 하는 주체의 자유와 스스로 있는 존재의 깊이를 생각해 보라.
2 앎과 모름을 지킴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3 ‘줄곧 뚫려’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4 섬기고 기다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2부 씨알의 활동
4 곧게 서서(直立)과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됨(天地人合一): 주체와 전체의 일치
솟아오름
씨알은 하늘의 햇빛과 바람, 땅의 물과 흙을 아울러서 생명활동을 펼친다. 하늘과 땅을 빚어서 푸른 잎과 줄기, 꽃과 열매를 짓는다. 씨알의 생명활동은 하늘과 땅과 씨알의 창조적 합일(융합)이다. 하늘과 땅이 씨알의 생명활동에 참여한다. 씨알은 흙 속에서 깨지고 죽음으로써 생명의 싹을 틔우고 가녀린 새싹이 굳은 땅을 뚫고 솟아오른다. 푸른 하늘과 해를 향해 솟아오르는 것이 씨알 생명의 본성이다. 자기를 깨트리고 넘어서고 솟아오름으로써 씨알 생명은 땅 위에 우뚝 서고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든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서서 하늘을 탐구함
생명과 정신의 씨알인 사람은 오랜 생명진화 끝에 하늘을 향해 직립(直立)했다. 하늘 天은 곧게 선 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글자다. 사람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곧게 선 존재다.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섬으로써 사람은 땅의 평면에서 기어 다니는 짐승의 물질생활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입체적인 정신생활로 나아간 것이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곧게 선 사람은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품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존재다. 하늘을 닮고 하늘로 들어가 하늘과 하나로 되자는 것이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목적이다.
사람 속에 몸과 맘과 얼이 있다. 오랜 생명진화 과정을 거쳐서 땅의 흙(물질)에서 몸 생명이 생겨나오고 몸 생명에서 맘이 피어나오고 맘의 감성과 지성에서 얼 생명이 솟아나왔다. 땅의 물질에서 하늘의 얼에 이른 것이다. 사람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존재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름이 사람의 깊은 본성이다. 하늘로 솟아오르기 위해서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섰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사람은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탐구하는 본성을 가졌다. 사람은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품고 하늘과 사귀고 하늘과 더불어 살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하늘의 님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고 하나로 되게 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솟아올라 나아갈 때 사람은 곧게 되고 하나로 된다.
사람이 하늘을 향해 직립한 것은 땅의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사람은 하늘로 솟아오를수록 곧고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 전체 하나 됨에 이른다. 사람에 이르는 생명진화과정은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과정이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과 정신의 주체로 곧게 서는 과정이고 전체 하나에 이르는 과정이다. 주체로 곧게 섬으로써 전체가 하나로 되는 하늘에 이를 수 있다.
하늘은 내가 곧게 서는 자리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하늘은 참된 나(주체)가 되고 전체 하나가 되는 자리다. 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하늘을 향해 곧게 선 것은 맘 속에 하늘이 열린 것이고 맘에 하늘을 품고 모신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향해 곧게 서서 하늘을 속에 품은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하늘이여 열리소서
하늘을 보고 비로소 ‘나’를 보았습니다.
하늘을 알기 전에는 ‘나’를 몰랐습니다.
하늘에 비추인 ‘나’를 보고 ‘나’라고 했습니다.
하늘 없으면 나도 없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하늘을 열어주소서.
내 가슴에 하늘이 열려야
‘내’가 서고 ‘너’와 사귈 수 있습니다.
하늘이 있어서 비로소 내가 너와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이시여 내 속에 열리소서.(박재순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김영봉 엮음 295쪽)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되다
사람의 맘에서 몸과 얼이 만난다. 몸은 땅이고 얼은 하늘이다.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되는 것이니 천지인 합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명진화과정은 땅의 물질서 하늘의 얼에 이르는 과정이다. 사람에게서 비로소 땅의 몸과 하늘의 얼이 하나로 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몸과 맘을 곧게 할 때 몸, 맘, 얼이 하나로 통하고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된다.
맘에 하늘을 품고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내적으로 통일된 초점을 가진 인격이 된 것이다. 하늘은 땅의 물질을 초월한 것이며 참된 빔과 없음이며 통일된 초점이다. 하늘은 통일된 초점이고 통일된 초점은 생각과 활동의 중심이다. 통일된 초점은 중(中)과 일(一)이 결합된 것이다. 하늘을 마음에 품고 모신 사람은 저마다 제게 중심이 되고 저마다 중심을 가진 존재가 된다.
삼일신고 천부경에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난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는 존재요 천지인 합일을 이루는 존재다. 천지인 합일을 이루는 자리가 중(中)이다. 천지인 합일이 이루어지는 사람의 몸과 맘이 우주의 중이다. 중(中)은 하나로 되는 자리다.
서로 다른 것을 보다 높은 자리에서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중이다. 존재의 깊이에서 주체와 주체의 서로 다름과 경계를 넘어서 보다 큰 하나 됨에 이르는 것이 가운데이고 통일이다. 하늘과 땅이 사람 안에서 하나로 되는 천지인 합일이 일어난다. 이미 천지인 합일이 일어났다. 그것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고 본분이다. 천지인 합일은 자기중심 속에서 중심을 넘어서 새로운 중심, 전체 하나의 중심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전체의 중심, 가운데로 나아간다는 것은 가운데를 붙잡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대립과 갈등과 모순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주체의 경계와 다름을 넘어서 보다 큰 하나에 이르는 것이다. 저마다 주체로서 내적 통일과 초점을 가졌으니 저마다 주체의 중심을 가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넘어서 세상의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가는 것이 천지인 합일이다.
서로 다름과 하나로 돌아감(歸一):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생명체는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품고 하늘을 지향하며 산다. 땅에서 하늘의 자유를 누리려는
생명은 저마다 저답게 자유로운 것이므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아름다움이며 풍성함이다. 그러나 생명은 저마다 저답게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통하고 서로 느끼고 서로 울리는 것이다. 서로 다르면서 하나인 것이 생명이다. 씨알은 저마다 저답게 자유로운 주체이면서 전체 하나의 생명을 담고 실현하고 드러낸다. 씨알은 전체 하나의 생명을 드러내고 실현하면서 스스로 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다. 생명은 주체성과 전체성의 일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직립한 인간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주체이면서 전체 하나 됨을 실현하는 존재다.
저마다 스스로 하는 중심과 주체를 가졌으므로 밖에서 강제로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강요된 통일은 폭력이고 거짓된 통일이다. 그것은 지배와 정복의 통일이다. 땅의 평면에서는 주체와 주체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주체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길은 하늘을 향해 일어서고 솟아오르는 길밖에 없다. 하늘과 땅 사이의 입체 공간에서는 서로 다른 존재와 주체가 공존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체가 욕심과 집착, 편견과 감정을 넘어서 솟아오름으로써 서로 다름과 경계를 넘어서야 더불어 살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체와 존재가 상생하려면 낡은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제도와 이념, 낡은 종교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자치와 협동,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솟아오름은 나와 우리를 넘어섬이고 앞으로 나아감은 낡은 전통과 제도, 이념과 체제를 넘어섬이다.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주체와 전체가 일치하는 참 나가 되고 서로 다른 주체가 상생하는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는 통일(統一)은 하나님의 일이고 귀일(歸一)은 사람의 일이라고 했다. 제 속의 중심을 뚫어서 하나에 이르고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서로 다름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전체 하나 됨에 이를 수 있다. 인간과 생명의 하나 됨은 다른 사람을 나와 같게 만드는 게 아니다. 생명과 인간의 하나 됨은 내 속에서 나를 깨트리고 넘어서 하나를 붙잡고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저마다 저답게 되어 하나 됨의 세계로 돌아간다.
물음과 새김
1 씨알 생명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솟아오르나?
2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곧게 선 사람은 하늘을 그리워한다. 어떻게 하늘과 사귈 수 있나?
3 사람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존재다. 어떻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을까?
4 사람은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5 희생과 상생: 죽어야 산다
씨알은 흙바닥에 떨어지고 흙속에 묻히고 흙 속에서 깨지고 죽어야 생명을 짓는 활동을 한다. 씨알은 바닥으로 떨어져야 생명활동을 할 수 있다. 자기를 버리고 낮추고 깨지고 죽어야 살 수 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이면 새 생명이 싹 튼다. 씨알은 죽어야 사는 생명의 진리를 보여준다. 죽어야 산다는 생명의 진리가 생명을 진화와 신생의 길로 이끈다.
1) 죽어야 산다
생명의 역사는 개체의 죽음을 통해 전체 생명의 진화와 향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죽음이 곧 생명의 진화와 향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생의 육체적 한계와 허무, 고통과 슬픔을 드러낸다. 죽음에 굴복하면 육체의 덧없음과 허무에 빠지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면 육체의 덧없음과 허무를 이기고 생의 진화와 향상과 갱신에 이를 수 있다. 죽음은 생명에게 두 가지 길을 열어준다. 허무와 타락에 이르는 길과 진화와 향상에 이르는 길이다.
육체를 지닌 생명은 다치고 병 걸리고 죽을 수 있다. 다치지 않고 병 걸리지 않고 죽지 않는 생명은 없다. 인생살이에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패배하는 일도 늘 있는 일이다. 넘어짐, 실패, 패배의 경험이 없는 인생도 없다. 넘어져 다쳤을 때 실패와 패배의 쓴 경험을 맛보았을 때 허무와 타락의 길로 가는가, 진화와 향상의 길로 가는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넘어지거나 실패와 패배를 경험하면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아가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럴 때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고 주저앉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자아가 깨졌을 때 깨어진 자아에 집착하고 머물러 있으면 열등한 패배자로 인생이 끝나고 만다. 미움과 분노, 원한과 패배의식에 빠져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자아가 깨어졌을 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는 창조적 계기로 삼으면 보다 높은 단계로 인생을 도약시킬 수 있다. 인생길에서 넘어지거나 결정적인 실패와 패배를 맛보았을 때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빠지거나 새 인생을 창조할 큰 계기를 잡은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는 위대한 창조적 힘과 지혜가 숨어 있다. 참 나를 만나고 내 인생을 새롭게 창조하고 변화시킬 힘과 지혜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패배와 실패는 자기 초월과 향상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큰 병을 앓고 재난을 당할 때는 참 나를 찾고 사랑을 배울 때다. 실패하고 패배했을 때는 더욱 크고 진실한 삶을 찾을 때다.
성공과 승리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무는 사람은 변화와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고 자랄 수 없고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미래가 없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있을 뿐이다. 못났고 모자라고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고 자랄 수 있고 새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넘어서 올라갈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늘 이길 수 있고 늘 올라갈 수 있고 늘 나아갈 수 있다.
2) 희생이 없다면
씨알은 꽃과 열매와 씨알을 맺어서 아낌없이 준다. 뭇 생명의 먹이가 됨으로써 생명세계를 풍성하게 하고 자신의 생명도 풍성하고 널리 퍼지게 한다. 씨알은 생명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기꺼이 도구, 수단, 그릇, 수레가 되어 자기를 바친다. 씨알은 희생함으로써 서로 살리는 길을 가면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이 없으면 자녀들이 자라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어머니는 살과 피와 뼈를 녹여서 자녀들을 먹이고 살렸으며 아버지는 피와 땀과 맘을 녹여서 자녀들을 사람으로 키웠다.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들과 생존경쟁과 권리다툼을 벌였다면 누가 살아남아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희생의 길 위에서 생명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인류역사가 진전되었다. 모성의 희생적 사랑이 있어서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나올 수 있었다. 포유류에서 영장류와 사람이 나온 것도 모성의 희생적 사랑에서 아름다운 감성과 맑은 지성이 닦여져 나왔기 때문이다. 사회는 희생의 길 위에 있다. 노동자, 농민, 청소부는 사회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존재다. 희생하고 무거운 짐을 짐으로써 세상을 먹이고 살리고 평안케 한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주고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주고받는 원리는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야 받을 수 있다. 먼저 주려면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소유를 내어놓아야 한다. 버림과 희생의 각오 없이는 먼저 줄 수 없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생명과 정신이 희생의 원리에 서 있음을 말해 준다. 권리보다 의무가 먼저다. 경쟁보다 희생이 먼저다. 의무를 소홀히 하고 권리만을 내세우는 단체와 조직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희생없이 경쟁만 일삼는 사회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3) 너를 살림으로 내가 산다
씨알에게는 꽃 피고 열매와 씨를 맺는 게 제 일이면서 남을 먹이고 살리는 일이다. 씨알에게는 자아실현이 남을 살리는 일이다. 나를 실현하는 것이 남을 먹이고 살리는 것이다. 남을 먹임으로 내가 산다. 너를 높이고 키우고 살리는 것이 나를 높이고 크게 하고 살리는 것이다. 서로 살림이 생명의 길이다.
생명의 진화도 서로 살림의 길을 보여준다. 파충류를 대표하는 공룡은 처음에는 몸길이 50cm밖에 안 되는 작은 동물이었다. 당시에는 꽃 없는 침엽수가 많았는데 공룡은 엄청난 식욕을 가지고 침엽수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공룡은 몸길이 50m에 이르도록 커졌으나 침엽수 숲은 파괴되었다. 공룡과 침엽수 사이에는 먹고 먹히는 관계만 있을 뿐 서로 살림의 관계가 없었다.
공룡이 멸종하고 침엽수가 쇠퇴한 다음에 번창한 것이 포유류와 꽃 피는 식물이었다. 꽃 피는 식물은 달콤한 꿀과 맛난 열매를 주고 포유류는 꿀과 열매를 먹고 그 씨를 널리 퍼트렸다. 달콤한 꿀과 맛난 열매를 먹은 포유류는 크게 진화 발전하고 꽃 피는 식물은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꽃 피는 식물과 포유류는 서로 살리는 생명의 길을 보여주었다.
4)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바다로
이제까지 생명진화의 역사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쳤지만 죽음을 통해서 진화와 향상의 길을 걸어왔다. 죽음에는 목숨이 끊어지는 육체적 죽음이 있고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심리적 죽음,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버리는 사회적 죽음이 있다. 이 모든 죽음을 무릅쓸 수 있을 때만 생명은 진화와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죽음은 생명이 자기를 버리고 초월하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저만 살겠다는 본능적 생명의지가 더불어 살려는 공동체적 의지로 고양되고, 육체적 생명과 물질적 조건에 집착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의지가 육체와 물질을 초월하는 영적 생명으로 고양된다.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함으로써 생명이 생겨났고 생명 안에서 생명을 초월함으로써 감성과 지성이 닦여 나왔고 감성과 지성을 초월함으로써 영성과 신성이 솟아나왔다. 덧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물질의 존재에서 자유롭고 변함없는 영성과 신성의 생명세계가 열린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전체의 자리서 남을 이끌 수 있다. 자기를 초월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정의를 이룰 수 없다. 사랑과 정의는 희생과 자기부정을 통해 실행된다. 개체와 집단의 자기부정과 희생을 통해서 서로 살림과 평화의 나라, 사랑과 정의의 나라로 간다. 아무리 산업과 경제가 발달하고 과학과 기계와 기술 문명이 발달해도 그것만으로는 사랑과 정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는 이룰 수 없다. 생명의 세계는 희생과 상생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바다로,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희생과 상생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석 유영모는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는 가운데 사이로 솟아오를 길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주체의 사이, 사회적 관계와 대립의 사이, 시간과 공간의 사이로, 인간과 인간의 사이로 집단과 집단의 사이로 그 가운데 길로 솟아올라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사이 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을 찾아야 한다.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로 가려면 어느 편에도 붙잡히지 않고 어떤 물건이나 관념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하나의 점이 되고 그 점의 가운데를 찍어버림으로써 없음과 빔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없음과 빔의 세계로 들어가면 희생과 상생, 사랑과 정의의 나라, 영원한 생명과 평화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물음과 새김
1 씨알은 죽어야 산다. 왜 그럴까?
2 먹이가 되는 희생자가 있어서 생명세계는 지탱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생이 없다면 가족 은 어떻게 될까?
3 너를 살림으로 내가 산다. 정말 그럴까?
4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바다로 간다. 그 길은 어떤 길일까?
6 몸 맘 얼의 울림
사람의 생명은 몸, 맘, 얼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몸의 본능과 맘의 지성과 얼의 영성 이 셋을 통합하는 것이 생명의 목적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며 생명과 정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1 생명의 세 겹, 몸 맘 얼
본능은 몸의 생명이고 지성은 맘의 생명이며 영성은 얼의 생명이다. 본능과 지성 사이에 감정이 있다. 감정은 본능에 매인 것이므로 지성보다 낮은 것이다. 감정만으로는 얼 생명에 이를 수 없다. 맑고 높은 지성의 높은 봉우리에서 얼의 생명에 이를 수 있다. 얼 생명인 영성은 우주 대생명의 주체와 전체인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사귈 수 있다.
본능은 생명의 밑바닥이고 맨 처음이다. 생명의 원초적인 힘과 욕망과 의지가 본능 속에 담겨 있다. 생명을 솟아오르게 하는 충동과 에너지를 품고 있다. 감정은 본능에서 나온 것이면서 본능을 넘어선 것이다. 한없이 낮은 본능적 감정서부터 한없이 높은 신령하고 거룩한 감정까지 다양한 감정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귀한 감정도 덧없고 일시적이다. 영원불변한 감정은 없다. 지성과 영성 위에서 피어난 감정, 지성과 영성을 머금은 감정만이 변함없고 영원하다.
지성은 무한한 하늘의 평면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수학과 과학은 수의 계산과 식, 도형의 비교와 법칙에 근거한 것이다. 점과 선과 평면을 연장하고 확장해서 입체공간을 탐구하지만 수학과 과학은 인과관계와 법칙에 근거한 것이고 인과관계와 법칙은 평면적인 것이다. 평면적인 개념과 논리를 밀고 나가는 것이 과학이다. 지성의 사유세계는 생명의 주체적 깊이와 전체적 통일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무한히 보편적이고 변함없이 늘 그렇게 있는 존재의 세계를 드러낸다. 언어와 개념, 논리와 이론, 형식과 법칙, 이념과 이데아는 생명의 주체적 깊이와 자유, 전체적 통일과 크기를 드러내지 못하지만 보편타당하고 영원불변한 사유세계를 드러낸다.
지능은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꾀에 지나지 않지만 보편타당한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은 본능과 감정을 초월하여 하늘의 맑고 투명한 평면에 이른 것이다. 지성은 본능과 감정의 물질적 욕망과 집착을 씻어버리고 하늘의 맑고 투명한 평면에서 사유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지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서 신령한 말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본능과 감정은 강한 생명력과 거센 힘을 가지고 있으나 지성은 아무런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본능과 감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지성은 평면적이고 이론적이다. 지성은 다만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영성은 무한한 하늘의 깊이와 높이를 드러낸다. 영성에서 비로소 생명 주체의 깊이와 자유가 생명 전체의 높이와 하나 됨에 이른다. 서로 다른 주체들의 일치, 주체와 전체의 일치는 영성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본능에서는 주체와 주체가 충돌하고 주체의 자유와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를 수 없다. 지성은 물질과 본능의 제약에서 자유롭지만 생명의 주체와 전체를 자신의 개념과 논리로 이해하고 설명할 뿐 주체와 전체를 그 자체로서 인식할 수 없다. 영성은 본능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지성을 넘어서 생명의 주체와 전체를 그 자체로서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다. 영성은 본능과 지성을 통합한 것이다.
2 생명진화의 사다리
생명진화 과정은 물질서 생명과 맘과 얼을 넘어 신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땅에서 하늘로, 물질서 얼과 신에게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 생명 속에, 사람의 몸과 맘 속에 물질서 육체로 육체서 맘과 정신에로 맘과 정신에서 얼과 신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져 있다. 생명진화 과정은 이 생명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과정이고 사람과 역사, 사회와 문명도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길 위에 있다.
사람은 어떻게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물질과 몸속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 있다. 원초적 본능과 감정 속에도 엄청난 생명의 힘과 에너지가 들어 있다. 이 힘과 에너지가 생명과 감정과 정신을 위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물질적 힘과 생명 에너지가 생명과 정신을 고양시키고 고동(鼓動)시키면서 위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원초적인 생명 에너지가 위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자기 부정과 초월을 통해서 정화되고 승화(昇華)되어야 한다. 본능의 원초적 생명 에너지가 그대로 있으면 평면적인 생활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헤매다가 소진되고 만다.
물질이 물질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생명이 생겼고 생명이 생명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맘과 정신이 생겼고 맘과 정신이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얼과 신에 이르렀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새로운 나, 보다 큰 나에 이른다. 다석은 “내 몸을 내가 밟으면 얼 생명의 불이 켜진다.”고 했다. 몸의 본능을 밟고 넘어서야 지성과 영성에 이른다.
생명진화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물질과 몸의 본능을 단순히 부정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몸이 정신화, 영화하는 것이고 본능이 극복되고 승화되는 것이다. 본능은 극복되고 승화됨으로써 보다 높은 새 생명으로 피어난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생명의지는 단순히 부정되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정화되고 승화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 사이에 몸과 얼 사이에 불연속의 연속, 단절과 고양과 초월이 있다. 단절과 고양과 초월을 통해 보다 높은 새 차원의 생명이 열린다.
3 몸과 맘의 공동진화(共同進化)
사람은 시신경(視神經)이 발달한 만큼 사물을 볼 수 있다. 벌레, 곤충, 새, 포유류, 사람이 보는 꽃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벌레와 곤충과 짐승은 사람처럼 꽃의 아름답고 고운 모습을 볼 수 없다. 사람 몸의 보는 신경세포와 기관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고 고운 꽃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몸의 신경세포와 기관이 섬세하게 진화하고 발달한 만큼 사람의 마음도 섬세하게 진화하고 발달했다. 몸이 진화한 만큼 맘이 발달하고 맘이 발달한 만큼 몸이 진화했다. 몸과 맘은 함께 진화한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장엄하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맘과 정신이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우주의 장엄함과 아름다움, 자연생명세계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에는 우리의 몸과 맘과 정신 속에 들어 있는 장엄함과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반영된 것이다. 37억년 생명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사람의 몸과 마음에는 위대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고 장엄함과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들어 있다.
맘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만큼 몸은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차력사가 단단한 돌멩이를 두부 자르듯 자르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맘속에 엄청난 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트를 타면서 그렇게 아름답고 다양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을 하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맘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과 다양함과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아무리 훈련을 해도 김연아처럼 피겨스케이트를 탈 수 없고 체조선수들처럼 아름답고 다양하고 부드러운 몸짓을 할 수 없다.
4 몸과 맘과 얼의 함께 울림
사람의 몸과 맘과 얼, 본능과 지성과 영성은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몸속에 맘과 얼이 깃들어 있고 맘속에서 몸과 얼이 만나고 있으며 얼속에서 몸과 맘이 함께 울리고 있다. 그리하여 본능은 지성으로 정화되고 영성으로 승화된다. 지성은 원초적 생명의지로 구체화하고 영적 자유로움으로 고양된다. 영성은 몸의 생기로 현실화하고 지성으로 객관화된다.
몸은 성해야 하고 맘은 편해야 하며 얼은 힘차야 한다. 몸이 성하면 맘이 편하고 맘이 편하면 얼과 뜻에 힘이 있다. 맘이 편하면 몸의 성한 기운에서 맑은 생각이 피어오르고 얼과 뜻에서 신령한 생각이 떠오른다. 참된 생각은 몸의 생명기운이 맺힌 것이고 몸에 뿌리를 둔 것이며 몸에서 캐낸 것이다. 사람의 몸속에는 무진장한 생각과 감정이 쌓여 있다. 그래서 니체는 ‘육체의 대이성’을 말했고 머리의 생각보다 몸의 생각이 훨씬 깊고 크다고 했다. 동서양의 언어들은 몸의 기관들이 생각과 감정의 자리임을 나타낸다. 우리말에도 ‘애를 끊는다’는 말은 애, 창자가 슬픔의 자리임을 드러낸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도 창자, 자궁은 연민과 자비를 나타내는 자리다.
참된 생각은 하늘의 신령한 기운을 받은 것이다. 하늘의 얼과 신에 닿을 때 뜻이 사무칠 때 참된 생각이 떠오른다. 참된 생각은 하늘의 신령한 세계에서 떠오르는 영감(靈感)이다. 맘의 생각은 몸과 얼이 만나고 소통하고 연락하는 것이다. 몸이 실린 생각이 참 생각이고 얼이 담긴 생각이 참 생각이다. 생각이 잘 나고 잘 통할 때 몸도 성하고 맘이 편하고 얼과 뜻에 힘이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고 했다. 생각해야 생명과 역사의 씨와 ᄋᆞᆯ이 여물고 참된 생명을 이어가고 살려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낡은 나, 거짓 나를 깨트리고 참 나를 낳는 것이고 참 나를 빚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생각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뿌리인 몸의 본능적 생명을 뚫어서 하늘의 얼 생명까지 이르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파고 뚫는 것이다. 껍데기 나, 거짓 나를 깨고 파고 뚫어서 참 나, 얼 나, 전체의 나에 이르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 것이고 내가 나를 살리고 키우고 높이는 것이다. 생각으로 내가 온전히 뚫리면 몸과 맘과 얼이 하나로 뚫려서 서로 울린다.
다석은 “척주는 율려(律呂), 맘 거문고”라고 했다. 율려는 기본음과 조율을 뜻한다. 몸의 중심인 척주를 율려라고 한 것은 몸이 삶의 기본이고 중심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맘을 거문고라고 한 것은 몸의 생명이 맘이라는 악기를 통해 아름다운 음악으로 연주되고 표현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몸의 곧은 기운이 바탕이 되고 얼의 곡조가 실리면 맘은 거문고처럼 음악을 연주한다. 생각하는 것은 몸의 성한 기운으로 얼의 곡조를 연주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음악 속에서 몸과 맘과 얼이 함께 울린다.
물음과 새김
1 사람의 생명은 몸, 맘, 얼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몸과 맘과 얼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2 사람의 몸과 맘속에는 생명진화의 사다리가 있다. 어떻게 생명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는가?
3 몸과 맘은 함께 진화했다. 몸과 맘 가운데 어떤 것이 진화를 이끌어 가는가?
4 몸과 맘과 얼은 함께 울려야 한다. 어떻게 울리는가?
3부 씨알의 길
7 내가 생명의 길이다
내가 길이다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어떻게 내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될 수 있는가? 만일 욕심 많고 사나운 감정과 편견에 매인 사사로운 개인이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습고 건방진 소리인가? 이것은 스스로 하는 생명과 정신의 근본원리에 어긋나고 민주정신을 짓밟는 소리다. 생명과 정신에게는 저마다 제가 가야할 길이 있고 또 모두 함께 가야할 길이 있다. 저마다 제가 가야 할 길과 모두 함께 갈 길이 일치할 때만 ‘내’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과 정신의 진리는 생명과 정신의 주체와 전체가 일치하는데 있다. 주체와 전체의 ‘나’가 일치할 때 ‘내’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참된 주체인 나만이 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나, 낡은 껍데기 나에서 벗어나 전체의 자리에 선 나,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충실한 나가 될 때 비로소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속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무궁한 지혜가 들어 있다. 누구나 천재, 달인, 도인이 될 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천재와 달인과 도인을 만날 수 있다. 바보 멍청이도 사랑할 수 있고 감동과 감화를 줄 수 있다. 한 가지 기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기준으로 보면 누구나 다 그 나름으로 아름다울 수 있고 뛰어날 수 있으며 감동을 줄 수 있다. 소박하고 진솔한 웃음을 잘 웃는 것만으로,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 하는 것만으로,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아름다울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 저마다 저답게 되어 제소리를 하고 제 일을 해야 한다.
씨알사상은 사람이 씨알임을 알고 내가 씨알임을 깨달아 나를 찾고 만나고 내가 되자는 것이다. 내가 생명과 정신의 씨알이고 역사와 사회의 씨알맹이다. 씨알은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꽃 피고 스스로 열매와 씨를 맺는다. 씨알에서 길이 나오고 참이 나오고 생명이 나온다. 생명과 역사의 씨알인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지금 여기 나의 삶에서 새 역사가 창조되고 새 세상을 지어야 한다. 내가 평화를 짓고 정의를 이루고 사랑을 해야 한다. 나의 나, 너의 나, 그의 나, 우리의 나 말고 평화를 짓고 정의를 이루고 사랑을 할 이가 없다. 내가 평화고 정의고 사랑이다. 세상에 평화를 요구하기 전에 내가 평화가 되고 내가 평화를 지어야 한다.
가운데 중(中), 가운데 길(中道)
나의 나, 너의 나, 그의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나가 함께 갈 수 있는 참된 길은 가운데 큰 길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나게 하는 가운데는 무엇이고 우리가 모두 함께 갈 가운데 큰 길은 어떤 것인가? 자연물리세계의 가운데 중과 생명정신세계의 가운데 중은 다르다. 먼저 자연물리세계의 가운데를 생각해보자. 선분과 평면에서 중(中)은 중간, 가운데를 뜻하고 입체 공간에서 중은 중앙을 뜻하고 시공간 연속체의 과정에서는 과녁의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는 화살과 총알처럼 적중(的中, 適中)하는 것이다. 때에 맞게 가운데를 맞추는 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중은 가운데이며 알맞음이다. 이것은 모두 자연 물리적 시공간에서 본 가운데다.
생명정신세계에서는 저마다 주체와 인격을 가지고 있다. 주체와 인격은 속에 통일된 초점을 중심(中心)으로 가진다. 생명과 정신의 ‘가운데’는 내적 통일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통일된 초점을 맞추어가는 것을 뜻한다. 가운데 중(中)은 하나, 통일, 초점, 중심이다. 개인과 집단의 서로 다른 주체들이 더불어 사는 생명사회에서는 ‘가운데’가 주체와 주체 사이, 주체와 주체의 관계 사이를 뜻한다. 사람과 사람, 주체와 주체 사이서도 선분과 평면의 가운데 중간을 말할 수 있고 공간의 중앙을 말할 수 있고 시공간의 적중을 말할 수 있다.
생명과 정신과 사회에서 ‘가운데’는 과녁을 맞추는 게 아니라 주체와 주체 사이서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석은 “높낮 잘못 살죽 가운데 사이로 솟아오를 길 있음”을 말했다.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는 그 사이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주체들 사이에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착하고 나쁘고 살고 죽는 그 사이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것이 가운데 길 중도를 가는 것이다.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가운데’는 생명과 역사의 자람과 갱신, 진보와 목적, 초월과 향상의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가운데는 주체의 사이에서 관계의 사이에서 서로 다름 속에서 그 한 가운데서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이러한 ‘가운데’ ‘중’은 서로 다름을 넘는 존재의 깊이와 경계를 넘는 주체의 자유를 나타낸다. 서로 다른 주체가 다름과 경계를 넘어 만날 수 있으려면 서로 다름과 경계를 넘어서 보다 큰 하나에 이르는 새로운 가운데가 열려야 한다. 중은 더 큰 새로운 하나다.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초월과 갱신을 통해 보다 큰 하나에 이르러야 한다. 중은 하나이며 하나 됨, 통일(統一)이다.
가운데 길로 가는 사람은 물질에서 정신으로 땅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보다 크고 높은 자리서 서로 다른 주체를 아우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욕심과 집착, 편견과 감정을 버리고 솟아오르고 과거의 낡은 전통과 가치와 제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더 큰 미래로 나아간다. 이것이 생명과 역사 속에서 가운데 길을 가는 것이고 새 역사 새 사회를 짓는 것이다.
길을 가다
하늘을 품고 가운데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운명이 없다. 정해진 길도 없다. 지나온 길, 남이 걸어온 길이 내 길이 아니다. 하늘을 품고 하늘과 더불어 이제 여기서 내가 내딛는 발걸음에서 길이 생겨난다. 오직 하늘이 길이고 하늘과 함께 사는 삶이 길이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사는 이에게는 관상도 심상도 없고, 운명도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 다시 말해 하늘을 품은 사람은 인생길, 역사와 생명진화의 길을 스스로 지어간다.
길은 깨끗이 비워야 길이다. 길이 쓰레기나 장애물로 막혀 있으면 길이 아니다. 길은 시원하게 뚫려야 하고 말끔히 비워야 하고 반듯이 닦아야 한다. 패이고 갈라지고 질퍽거리고 울퉁불퉁한 길은 좋은 길이 아니다. 인생길을 잘 가는 사람은 가는 길을 시원하게 뚫어야 하고 말끔히 비워야 하고 단단하고 반듯하게 닦아야 한다. 그것이 길 닦는 사람이다. ‘내가 길’이므로 길을 닦는 사람은 나를 닦아야 한다. 나를 파고 뚫고 비우고 닦아서 내 속에 길이 환하게 열려야 한다.
길을 가려면 길을 밟아 버리고 가야 한다. 길은 길일뿐이다. 제 가는 길을 밟을 수 있고 버릴 수 있어야 길을 갈 수 있다. 길에 매달리고 붙잡힌 사람은 길을 갈 수 없다. 제가 저를 버리고 넘어서야 참 사람, 새 사람이 되듯이 길도 밟아서 버려야 길을 갈 수 있다. 나를 버림으로 내가 되고 길을 버림으로 길을 간다. 나를 밟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가운데 큰 길을 갈 수 있다.
길을 가는 것은 내 속에 길을 내는 것이다. 막힌 감정과 생각을 뚫어서 하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결국 길은 하늘에 이르는 길 하나뿐이다. 하늘에 이르는 길이 참으로 나에게 이르는 길이요 참으로 너에게 이르는 길이고 참으로 그에게 이르는 길이다. 하늘에 이르는 길이 바로 우리 모두 하나로 되는 길이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길을 가다 보면 길이 내가 되고 내가 길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내 인생이고 내 삶의 세계를 지어낸다. 길과 내가 하나로 되면 나는 길사람(道人)이다. 길사람은 제가 길일뿐 목적도 중심도 아님을 안다. 길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밟아버릴 수 있는 이다. 자기를 밟고 버리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길사람은 모든 사람의 길에 동행할 수 있다. 저마다 제 길을 가지만 길사람은 길가는 사람에게 등불이 되고 길잡이가 된다.
물질과 기계의 주인이다
내가 길이라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과 주체라는 말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주체이고 사람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다. 생명과 사람은 주체 ‘나’를 가진 존재다. 물질과 기계는 ‘나’가 없는 것이다. 물질과 기계, 본능과 약물은 기계적이고 법칙적이다. 기계적이고 법칙적이라는 말은 생명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말이며 타율적이고 결정론적이라는 말이다.
기계는 아무리 발달해도 자발성과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과 정해진 규칙에 따라 밖에서 주입된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일 뿐이다. 기계와 물질만을 가지고 아무리 지능이 높은 인조인간을 만들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철인이 되거나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영성가가 되지는 못한다. 기계의 지식과 정보는 복사될 수 있고 기계는 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심장과 영혼은 복사되거나 복제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계는 씨알이 될 수 없고 저 자신을 낳을 수 없고 스스로 갱신할 수 없다. 영혼이 없는 물질과 기계는 부림을 당하고 쓰일 뿐이다.
‘나’는 물질과 기계의 주인이다. 내가 길이라는 말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이며 물질적 환경과 조건, 제도와 체제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내가 길이라는 말은 물질과 기계, 돈과 권력의 종이 되지 않고, 술과 마약, 게임과 도박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물질과 기계의 주인과 주체로서 사는 것을 뜻한다. 돈과 기계는 혼 없는 냉정한 물질이고 도구일 뿐이다. 돈에 집착하고 기계에 매이면 ‘나’도 없고 ‘너’도 잃게 된다. 사람이 돈과 기계의 주인이 되어서 돈과 기계를 잘 쓰면 나도 넉넉해지고 너도 또렷해진다.
물음과 새김
1 내가 길이다. 어떻게 내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나?
2 가운데는 하나 됨이고 가운데 길로 간다는 것은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솟아올 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3 길을 가려면 길을 밟아버려야 한다. 길을 밟아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4 하늘을 품은 길사람(道人)은 물질과 기계의 주인이다. 사람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8 씨알의 믿음과 삶
모름을 지킴
생명은 주체(자유)이며 전체(하나 됨)인데 인간의 감각과 지성은 주체와 전체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감각은 생명의 부분과 표면을 인식할 뿐이고 지성은 생명을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뿐이다. 사람의 감각과 지성은 정신과 생명뿐 아니라 물건의 깊이와 전체도 알 수 없다. 사람은 하늘의 깊이와 높이와 크기를 알 수 없고, 주체와 전체를 하나로 만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람은 없음과 빔을 알 수 없다. 사람은 주체와 전체가 일치하는 생명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사람은 물방울 하나, 모래알 하나, 먼지 하나, 꽃잎 하나를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과 껍데기 표면을 겨우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너를 알겠는가?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 물건과 일도 모르고 살아 있는 것은 더욱 모른다. 모름을 인정하고 생각과 삶을 시작해야 한다. 아는 것은 작고 모르는 것은 크다. 모름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정신의 근본이다. 모름의 세계는 생명과 정신의 주체와 전체가 일치하는 절대 하나(하나님)의 세계, 얼 생명의 세계다.
씨알의 삶과 생각은 모름에서 시작하고 모름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아라.”고 가르쳤다. 유영모는 하나님과 사귀고 서로 주체로서 올곧게 살려면 모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서로 주체로서 사랑하고 살려면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주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은 모름을 지키는 것이다. 남을 안다고 하면 남을 모르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고 남을 단정하고 정죄하면 남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고 남의 운명을 제멋대로 결정짓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몰라주는 사랑’을 말했다. 몰라주는 사랑은 모름 속에서 남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며 남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
인류는 앎의 세계를 넘어서 모름의 세계를 믿고 탐구해왔다. 처음에는 자연만물 속에서 신령한 힘과 영원한 생명을 찾았다. 그 다음에는 국가권력과 왕에게서 신령한 힘과 불멸의 가치를 찾았다. 지금부터 2,500년 전쯤 국가문명이 융성해졌을 때,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예수와 같은 성현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인간의 내면에서 신령한 힘과 불멸의 가치를 발견했다. 이 시기를 기축시대라고 한다.
저마다 속에 신적 생명과 영원한 진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신령하고 존엄한 주체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우주에서 사람보다 존귀하고 중요한 존재는 없다. 사람의 본성인 이성과 영성 속에 영원한 생명과 보편적 진리가 깃들어 있고, 영원한 생명과 보편적 진리를 통해서 모든 인간과 뭇 생명과 만물은 하나로 통한다. 영원한 생명과 보편적 진리를 지닌 인간의 본성은 가장 주체적이면서 가장 전체적이다. 기축시대의 성현들은 인간 내면의 본성에서 생명적 주체와 전체의 일치를 발견했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과 소통하는 길을 사람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인간 내면의 본성 속에서 하늘(하나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서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발견한 기축시대의 윤리는 한 마디로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황금률로 귀결된다.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줄이면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는 것이다. 윤리 도덕의 시작과 꼭대기는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윤리 도덕도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을 수 없다. 또 아무리 낮은 윤리 도덕도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서로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서로 주체로서 존중하려면 상대의 심정과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감각과 지성은 상대를 주체로 보기 어렵고 대상으로 보기 쉽다. 그래서 남을 타자화, 대상화, 도구화하는 습관과 버릇이 사람에게 있다. 상대를 대상화, 도구화하면 서로 주체적인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생명과 정신의 공동체적 전체성은 상실된다. 입장을 서로 바꿔 생각함으로써 삶의 주체가 뚜렷이 서고 전체가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낡은 종교를 넘어서 둘째 기축시대를 열어야
기축시대 성현들이 가르쳐준 진리의 핵심은 사람마다 본성 속에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스스로 깨달아 제 속에 있는 참된 생명을 살고 그 진리를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축시대는 비민주적인 신분제 시대였고 미신이 지배하는 시대였으며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국가권력에 예속되어 사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사람마다 스스로 깨달아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교주를 믿고 따르는 종교, 신화적 교리에 매인 종교, 성직자 중심의 제도와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 기복신앙과 물신숭배에 빠진 종교에 머물렀다. 기성 종교들은 기축시대 성현들의 가르침을 알맹이로 간직하고 있지만 신화적 교리, 성직자 중심의 종교제도, 기복신앙에 매인 껍데기 종교들이 되고 말았다.
종교의 목적은 사람 속에 깃든 영원한 생명(하늘, 하나님)의 씨알을 싹트고 꽃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며 생명과 정신의 진리, 역사와 사회의 진리를 실행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껍데기 종교는 이러한 종교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대다. 민주화와 과학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껍데기 종교에서 벗어나 알맹이 종교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동서고금의 종교전통과 문화들이 하나로 합류하고 있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이며 영성적인 세계평화와 통일의 문명을 실현할 때가 왔다.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 속에서 동서고금의 종교문화와 전통이 합류하는 오늘의 시대는 저마다 저답게 자신을 실현하고 세계평화와 통일의 영성을 꽃 피우는 둘째 기축시대를 예감하게 한다. 둘째 기축시대를 맞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마다 자신의 감성과 지성과 영성을 살려서 참된 생명과 가치를 실현하고 옹글게 함으로써 서로 살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열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마다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꽃 피워서 인류세계를 풍부하고 아름답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화적이고 미신적인 사고를 버리고 맑은 지성을 가지고 또렷또렷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직자 중심의 낡은 제도와 체제를 버리고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를 이뤄야 하고 서로 믿고 돌보고 살리는 벗들의 모임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나의 때를 살아야
생명은 저마다 제 때를 살고 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고 진리다. 그런데 기성 종교인들은 자신의 때를 살지 않고 석가의 때를 살려 하며,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예수의 삶을 살려고 한다. 이것은 결코 예수나 석가가 원했던 삶의 방식이 아니다. 사람은 마땅히 제 삶을 살고 제 때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다. 부처가 나를 지배해서도 안 되고 스승이 나를 억압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내 삶을 내 때에 맞게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영모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에 머물지 말고 예수를 이어 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2 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의 삶을 살 수 없다. 2 천 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예수의 삶을 흉내 내거나 되풀이할 수가 없다. 예수의 껍데기 생명은 이미 죽었고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 얼 생명과 뜻은 죽음을 넘어 살아 있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얼 생명과 뜻을 이어서 살 수 있을 뿐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그의 얼 생명과 뜻은 우리 몸과 맘에 씨알로 심겨졌다. 기독교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는 말은 예수도 나도 껍데기 생명으로는 죽고 알 생명, 얼 생명과 뜻으로는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모두 함께 사는 길이다.
물음과 새김
1 왜 모름을 지켜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모름을 지키는가?
2 왜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 하는가?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3 기성종교는 왜 낡았는가? 둘째 기축시대를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4 사람은 누구나 제 때를 살고 제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내 때를 살고 내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9 국가주의를 넘어서 세계평화로
지난 20세기는 국가들의 전쟁과 모순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였다. 강대국들이 식민지정복과 약탈을 위해 두 차례나 세계 전쟁을 벌였고 수 천 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수 십 억 인구가 식민지의 백성으로 고통을 겪었다. 한국인은 35년 동안 혹독한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겪으며 나라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일본군사제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자 민족이 두 개의 적대국가로 쪼개져서 혹독한 전쟁과 분단의 쓰라린 고통을 겪었다. 30년 군사독재의 억압 속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한국현대사는 국가주의의 모순과 억압에서 벗어나 세계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21세기는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가 실현되는 시대다. 이제 국가주의의 전쟁과 폭력을 넘어서 평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평화를 위해 준비된 동물
37억년 생명진화 끝에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동물이 되었다. 사람의 손톱과 발톱을 호랑이나 사자의 발톱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의 손은 사랑으로 보살피고 돌보기에 적합하고 섬세한 기계를 만들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조하기에 적합하게 진화하고 발달했다. 다른 짐승들의 눈에는 색깔이 있어서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없는데 사람의 눈은 맑고 투명하여 속 깊은 마음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사람의 이빨은 뭉툭하고 부드러워져서 다른 생명을 물어뜯고 죽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뱀과 악어의 이빨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 사람의 입은 좋은 말을 하고 아름다운 시를 읊도록 진화된 것이다.
오랜 생명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의 몸은 평화를 실행하도록 닦여지고 준비된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발달한 것도 다 평화를 이루고 실현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과 맘속에는 뱀과 악어, 호랑이와 사자 같은 난폭한 본능과 감정이 살아 있다. 사람의 지성과 영성은 평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춘 것이면서 악마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것이다. 개와 돼지보다 훨씬 탐욕스럽고 잔인할 수 있으며, 악어나 호랑이가 저지를 수 있는 살생과 폭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악과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의 역사와 사회와 문명은 평화와 통일을 향한 진보의 길을 걸어왔다. 연대와 협동, 상생과 공존의 방식으로 인류 사회와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서로 힘과 뜻과 지혜를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오늘의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을 향해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파괴와 분열의 가능성과 기회도 더 커지고 많아진다.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평화와 통일을 향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올라가는 일은 힘들고 위험해지지만 파괴와 분열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는 쉽다. 그렇지만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보람이 있고 새 힘이 나며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린다.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각성
국가문명이 발달하면서 정치경제산업이 발달하고 종교문화와 전통이 융성해지면서 동서문명의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미 2천 년 전부터 비단길과 바다 길을 통해서 동서문명의 만남과 교류가 이어졌다.
그러나 근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 과학기술과 산업의 혁명이 일어나고 국가자본주의의 탐욕적 정복적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서세동점의 세계화가 급속히 전개되었다. 민주화, 과학기술화, 세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동서문명의 합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서양문명의 침략과 정복의 형태로 동서문명이 만났기 때문에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서로 주체로서 대등하게 만나기 어려웠다. 따라서 동서문명이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주체적이고 전체적으로 융합되기 어려웠다.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이나 제3세계문명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형태로 만나거나 부분적이고 제한적으로 문명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문명은 주체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인도문명은 자신의 사회신분체제와 종교문화를 고수함으로써 서양문명을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문명은 서구문명의 과학기술과 정치문화를 부분적이고 제한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공산화함으로써 전통종교문화와 서구정신문화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문명은 도꾸가와 막부이래 국가권력과 지배종교이념이 강성했기 때문에 서양의 종교정신문화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민중의 주체적 자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못했다. 일본의 근현대는 천황제와 군국주의가 결합함으로써 민중을 제국주의전쟁에 동원하고 미군정에서 확립된 헌법을 바탕으로 관료와 재벌 중심의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국가권력이 약화되고 붕괴되었으며 지배이념인 유교, 불교, 도교의 영향력도 현저히 쇠퇴했기 때문에 동서문명의 만남이 제약없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이루어졌고 민중의 자각운동이 크게 일어날 수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민중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민중을 깨워 일으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서구의 정신문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륙의 지층이 충돌하면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바다가 넘치듯이 동서양의 정신문화가 합류함으로써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정신문화적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민중의 정신과 기운이 분출하였다.
삼일독립운동과 임시정부, 국가주의 정복전쟁과 평화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려고 할 때 안창호와 이승훈은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워 일으켜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 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9년이 지났을 때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어나서 민족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내세우며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삼일독립운동의 이념과 목적은 민주, 민족자주, 세계평화다.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떨쳐 일어났다는 점에서 민주이고 강대국의 불의한 지배에 맞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민족자주이며 강대국과 약소국이 함께 우애와 협동의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이루자고 하였으므로 세계평화다.
20세기는 강대국들의 정복전쟁과 폭력의 시대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던 한민족이 민주, 민족자주, 세계평화의 이념을 내세우며 거족적으로 떨쳐 일어난 것은 세계평화와 통일의 새 문명시대를 여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곧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전문은 삼일독립운동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합법적 정통임을 밝히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고 남과 북의 두 국가가 전쟁과 대결을 벌였고 남한에 군사독재가 오래 이어졌으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정도로 이룩할 수 있었다.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자각운동, 삼일독립운동에서 분출된 생명력과 정신력이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다.
나라가 망하는 아픔과 나라 없이 살아본 경험은 국가들의 대결과 갈등을 넘어서 세계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여는데 기여할 수 있다. 남북분단과 전쟁을 통해서 국가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깊이 체험하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민족은 민주와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여는데 앞장설 수 있다.
국경을 넘어, 세계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국가
전쟁과 폭력에 매였던 국가주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아직도 전쟁과 폭력이 일어나고 있지만 오늘의 사회문제나 세계문제는 전쟁과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국가의 이해관계와 국경을 넘어서 상생과 평화의 세계를 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없다. 21세기는 국가주의를 넘어서 세계평화 문명을 열어갈 시대다.
21세기는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시대다. 민주국가에서는 국가권력이 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민이 나라를 다스린다. 참으로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서 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가 되면, 국가는 자유 평등 평화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민이 다스리는 나라는 특권과 폭력을 거부한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착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이 다스리는 나라는 다른 나라와 함께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온 세상에 실현하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은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와 정신을 지닌 것이므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이 인생과 역사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시대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 세계와 우주로 나아가는 시대다. 세계인과 우주인이 되어서 새 문명 시대를 열려면 동포애와 애국심을 넘어서고 동포애와 애국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개인의 희생과 자기부정이 있듯이 국가와 민족도 자기부정과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입장을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의 나라의 심정과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자유와 민주, 정의와 평등, 사랑과 평화만을 위해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에서 산다. 세계인류가 한 형제자매이며 뭇 생명이 동포다.
물음과 새김
1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동물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2 한국현대사에서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자각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 가?
3 삼일독립운동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합법적 정통이다. 삼일독립운동과 임시정부는 어떤 이념과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4 민주국가는 국경을 넘어서 세계평화와 통일을 이루어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0강 자치와 협동
민주국가는 민이 다스리는 나라다. 민이 민을 다스리므로 자치이고 서로 다스리므로 협동이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민의 대표를 뽑아 다스리게 하는 대의정치를 넘어서 자치와 협동을 지향한다. 자치와 협동에 근거해서만 진정한 민주국가가 성립한다. 복지제도와 체제도 민의 자치와 협동으로 지탱하고 감당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1 자본주의와 낡은 정치를 넘어서
민을 다스린다는 생각은 비민주적인 낡은 생각이다. 민주 정치는 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민이 다스리는 것이고 민이 다스리도록 돕는 일이다. 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살도록 힘과 뜻을 모으는 것이 민주 정치다. 민주시대를 맞기 위해서 인류는 얼마나 오랜 세월 억압과 수탈, 지배와 침략을 당하며 고통스러운 역사를 거쳐 왔던가! 드디어 많은 나라들이 민주국가를 선언하고 민주의 원칙과 이념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민주화되면서 국가권력, 공권력은 약화되고 적용범위가 좁아지고 사적 영역과 민간영역의 공간이 크게 확장되었다. 시민사회운동세력의 공간도 확대되었으나 자본과 산업과 기술, 언론과 홍보, 정보와 조직을 장악하고 생산과 소비와 유통을 지배하는 기업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다. 민주주의가 형식화하고 개인화하면서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 개개인은 무력해지고 공권력은 빈껍데기가 되고 있다.
21세기 민주화 시대에 민주주의는 다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의 원칙과 이념은 확립되었으나 돈과 기계(기술), 정보와 기업조직이 지배하는 산업사회에서 민중은 가난과 소외, 억압과 수탈의 나락으로 떠밀리고 있다. 자본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민중은 다스리는 주체가 아니라 자본의 종이며 기계의 부속품으로 물화(物化)되고 예속되고 있다. 민중은 이제 자본과 기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무력한 신민(臣民)으로서 살아갈 뿐이다.
자본과 기술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치와 협동의 민주사회를 이루려면 민주의 원칙과 정신이 다시 확립되어야 한다. 씨알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이며 헌법의 주인이고 주체다. 씨알이 나라다. 씨알의 존재와 삶을 떠나서 나라는 없다. 씨알은 자본과 기술의 종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을 쓰고 부리는 주인이다. 씨알의 존재와 삶을 중심으로 나라와 사회를 생각하고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씨알이 곧 나라인 사회를 만들려면 낡은 국가주의와 물신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자치와 협동의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자본과 기술의 주인으로서 자치와 협동의 마을 공동체를 만들려면 주체와 전체를 통전하는 씨알의 민주적 철학과 이념과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2 새 문명의 철학
1) 서로 주체의 실현,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
거대 자본과 거대 기업을 비롯한 사회 기득권 세력을 상대로 민주의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기에 오늘의 공권력은 너무 허약하다. 공권력이 제 구실을 하려면 민의 자치와 협동이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적 공권력의 토대와 목적은 민의 자치와 협동이다. 다시 말해 민주 국가의 토대와 목적은 민의 자치와 협동이다.
민의 자치와 협동이 실현되려면 자치와 협동의 이념과 목적이 뚜렷이 제시되어야 한다. 다행히 한국민족의 건국신화에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함’(弘益人間)과 ‘세상을 이치로 변화시킴’(在世理化)이라는 아름답고 보편적인 이념과 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민의 자치와 협동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고 인간 세상을 이치에 따라 교육하고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치와 협동을 통해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치에 따라 가르치고 변화시키려면 깊은 정신과 철학이 요구된다.
씨알사상에는 자치와 협동의 철학이 담겨 있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치로 변화시키는 생명원리와 정신과 영성이 들어 있다. 씨알은 저마다 주체이면서 전체를 구현한다. 씨알은 개체의 개성을 표현하고 실현하면서 전체를 드러낸다. 씨알의 생명활동은 주체와 전체의 일치와 통전(通全)이다. 하나의 씨알 속에는 한없는 생명의 깊이와 주체가 들어 있고 자연생명과 우주 전체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씨알은 서로 주체이며 전체를 드러내고 실현한다. 저마다 주체가 되어 주체로 살게 하는 것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주체와 전체를 함께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이 이치와 물성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 서로 주체의 만남과 협동
한 씨알이 다른 한 씨알을 만나는 것은 두 씨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씨알 속에 생명진화의 역사가 들어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 씨알과 씨알의 만남은 온 생명과 온 생명이 통하는 것이고 우주와 우주가 만나는 것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무한이다. 한 씨알이 다른 씨알을 만나면 두 씨알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수 있고 새로운 차원의 관계와 사귐과 공동체가 열린다. 보다 높고 크고 깊은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씨알과 씨알이 만나는 일은 어렵다. 생각과 뜻과 감정이 하나로 만나기가 어렵다. 만나서 하나로 통하기만 한다면 우주가 진동하고 생명세계가 꿈틀거리고 인류사회가 바뀐다.
개체와 부분이 모여서 전체 하나를 이루지만 전체는 개체와 부분에 없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세계를 가진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된 것인데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 세 개가 결합된 것이다. 쿼크 세 개가 만나면 쿼크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인 양성자가 생겨난다. 자연물리의 세계에서도 환원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양성자를 깨트리면 쿼크가 나오지만 쿼크들은 더 이상 양성자가 아니다. 쿼크들이 모여서 시너지 효과를 내서 존재의 비약과 탈바꿈이 일어나서 양성자가 되는 것이다. 자연물리세계도 생명의 세계도 환원될 수 없다.
씨알의 생명활동은 자신의 중심과 존재를 뛰어넘고 탈바꿈시켜서 질적으로 양적으로 더 크고 높은 세상을 여는 것이다. 씨알의 만남에서는 생명과 존재와 정신의 초월과 비약, 상승과 탈바꿈이 일어난다. 씨알이 흙을 만나 새싹이 되고 하늘의 바람과 햇빛을 받아서 꽃과 열매를 맺듯이, 씨알의 몸, 맘, 얼이 하나로 만나 함께 울리고 통하면 상생과 평화의 영원한 세상이 열린다. 나를 살리는 것이 너를 살리는 것이 되고 너를 높이고 세우는 것이 나를 높이고 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참된 만남은 쉽지 않고 참된 뜻과 열렬한 심정으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만남을 지속시키는 더 어렵다. 연애감정이 오래 못 가는 것은 육체와 감정의 공명에 머물기 때문이다. 육체와 감정은 인간의 생명에서 겉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와 감정은 변하기 쉽고 영속적인 것이 못 된다. 연애감정만으로는 생각과 지성의 공명에 이르지 못한다. 비록 생각과 지성의 공명에 이르더라도 그 공명이 영속하지는 못한다. 생각은 감정과 욕망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지성은 생명과 영의 깊이와 높이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초월한 환희와 지복의 공명, 슬픔과 고통의 자비로운 공명도 영원하지는 않다. 환희와 지복도, 슬픔과 고통도 영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환희와 슬픔, 없음과 있음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에 이른 하나님 앞에서만 참 나가 될 수 있고 참 나만이 영원할 수 있다.
참 나만이 너와 나를 함께 살리고 세우고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참 나에 이를 때 비로소 참된 만남을 할 수 있고 참된 만남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참 나가 되어서 서로 만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참 나가 되기도 어렵고 서로 만나기도 어렵다. 서로의 만남이 참 나가 되는 계기와 과정이 되고 참 나가 되는 것이 서로의 참된 만남을 위한 준비와 훈련이 되어야 한다.
씨알의 길은 서로 주체의 만남의 길이며 서로 주체의 만남의 길은 자치와 협동의 길이다. 그 길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지만 멀고 험하다. 육체와 감정, 생각과 지성, 환희와 자비의 공명을 넘어 참 나, 큰 나에 이르러야 자치와 협동의 길이 완성될 수 있다. 내가 참 나가 될 때 비로소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고 서로 살림과 세움의 협동에 이를 수 있다. 자치와 협동의 길은 참 나가 되는 길이고, 내가 늘 새롭게 길을 내면서 가는 길이며, 내가 스스로 길이 되는 길이다. 그것은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이며 모두 함께 가는 큰 길이며 모두를 살리는 영원한 길이다.
3 자원과 돈의 재분배와 새로운 일자리 만들기
생산과 유통과 소비 과정에서 생겨난 모든 이윤과 가치는 나라의 씨알인 국민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에서 생겨난 모든 이윤과 가치는 국민의 노동과 생각을 통해서 나온 것이고 국민의 땀과 눈물과 정성이 담긴 것이다. 나라의 재화와 가치는 국민 개개인의 기여와 헌신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공동체적 기여와 헌신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일자리는 줄고 있다. 지극히 적은 사람들과 대기업에게 돈이 몰리고 대다수 민중과 작은 기업들은 가난에 내몰리고 있다. 더욱이 산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에 실업과 가난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민의 자치와 협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자치와 협동의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산업사회에서 돈과 자원은 피와 같다. 피처럼 소중한 돈과 자원이 한 곳에 몰리는 사회는 오래 존속하기 어렵다. 피가 온 몸에 고르게 돌아가야 하듯이 돈과 자원도 사회 전체에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임금과 소득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임금과 소득의 지나친 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공공성과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과 이웃의 복지와 자치를 위해 충분한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야 한다. 기업체와 기관들도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충분한 세금을 기꺼이 내야 한다. 정치인과 정부, 공권력의 의무와 책임은 자치와 협동의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정과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다.
자치와 협동의 사회를 만들려면 국가의 부와 권력을 국민들 사이에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 부와 권력을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거나 과점(寡占)하면 자치와 협동의 민주사회는 이룰 수 없다. 국가권력이 분배를 강요하면 자발성과 헌신성이 사라져서 민주의 토대가 무너진다. 민주적으로 부와 권력을 분배하는 길은 자발적 합의를 통해서 분배하는 것이다. 정치인, 정부, 기업, 시민사회운동단체, 종교문화계가 자발적 합의와 타협을 통해서 부와 권력의 재분배에 이르러야 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정치와 시민사회운동과 민중운동의 과제다.
부와 권력의 재분배는 일의 재분배로 귀결되어야 한다. 일과 일자리의 공정한 분배는 국가와 기업 중심의 낡은 철학과 정신에서 벗어나 생명과 영성과 공동체, 자치와 협동을 위한 새로운 철학과 정신을 가질 때 가능하다. 기업체에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노동, 국가의 공직활동, 기계와 기술, 지식과 정보를 만드는 일만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공동체적 관계, 생명과 생태학적 관계, 문화와 영성을 고양시키고 증진시키는 일이 더욱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사회는 생태학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영성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높이고 실현하는 일과 일자리가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
씨알이 나라인 사회를 만들려면 씨알의 존재와 삶을 중심으로 나라와 사회를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그런 나라와 사회를 형성하려면 먼저 생각과 논리를 바꿔야 한다. 기업논리와 국가논리에서 사람논리, 공동체논리, 생명논리, 영성논리로 생각과 논리와 가치를 확장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일의 값을 새로 매겨야 한다. 생태학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 정신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높이는 일이 물질적 재화를 직접 생산하는 일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높게 매겨져야 한다. 인류사회는 농업혁명, 공업혁명, 정보혁명을 거쳐서 생태(영성)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생태혁명은 생명, 인간, 관계, 공동체, 영성을 중심에 놓는 생활혁명이다. 생태혁명을 위해서는 국가와 기업 중심의 가치관과 철학이 생태-영성 중심의 가치관과 철학으로 바뀌고 새로운 가치관과 철학에 따라 사회의 질서와 체제가 바뀌고 생태-영성적 가치에 맞는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4 자치와 협동의 마을공동체와 유무상통의 시장(有無相通)
대영제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간디는 인도가 영국과 같은 대제국이 된다면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고 보았다.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강대국들은 진정한 나라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도 전국에 있는 50만개의 마을공동체들이 자치와 협동에 근거한 공화국이 될 때 비로소 인도는 참된 독립국가가 된다고 하였다. 전쟁과 폭력, 억압과 수탈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자치와 협동의 민주국가가 되려면 자치와 협동의 마을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자치와 협동에 기초한 마을은 저마다 공동체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마을 공동체들의 자치와 협동에 기초해서 민주국가가 세워질 수 있다.
마을은 자치와 협동의 작은 공동체 공화국이다. 나라 안의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들에 바탕을 두고 큰 나라가 세워지고 큰 나라들을 바탕으로 세계평화와 통일의 연방이 세워질 것이다. 마을 공동체가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서 자치와 협동을 실현하고 완성해 가야 한다. 생산은 나와 너를 함께 살리는 거룩한 일이 되어야 하고 유통은 서로 소통하고 사귀는 친교가 되어야 하고 소비는 뭇 생명과 나의 생명을 불태우고 고양시키는 감사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자치와 협동에 바탕을 둔 시장은 없는 것과 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유무상통의 시장이 되어야 한다. 유무상통의 원리는 내게 있는 것을 먼저 내어 주고 내게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주는 것이 먼저다. 내 것을 먼저 주는 넉넉한 인정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을 받으니 고마움과 기쁨이 솟아난다. 그러므로 유무상통의 시장에서는 인정과 고마움, 신명과 흥이 넘쳐야 한다.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유익하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과 없음의 자유와 은총을 누리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과 있음의 고마움과 기쁨을 누린다. 없음과 있음을 나누는 유무상통의 시장은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생명잔치마당이다.
물음과 새김
1 자본주의와 낡은 정치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새 시대, 새 사회의 철학은 서로 주체의 씨알철학이다. 서로 주체의 만남과 협동에 대해서 말해 보자.
3 돈과 자원을 어떻게 골고루 돌아가게 할까? 어떻게 뜻 있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낼까?
4 자치와 협동의 마을공동체와 유무상통의 시장을 어떻게 만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