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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멈추지 않는 사랑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죠지 스위팅의 ‘사랑에의 초대’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지?” “그건 바다야!”
나무들에게 물었다 “바람이야”
산들에게 물어보았다 “그야 별이지”
곡식이 익은 들판에게 물어보았다 “비야,비!”
해변에게 물어보았다 “그건 조수야”
마지막으로 영혼에게 물어보았다 “사랑은 불멸의 황금신전을 여는 빛나는 열쇠야!”
늙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을 전전하느라 가족이나 친척은 물론 결혼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늙는다는 것은 더욱 적막할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하옇게 바랬고 뼈속까지 고독이 스며들었고 그의 불행한 인생은 그렇게 스러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늙은 죄수는 감옥 들창 밖에서 날아온 참새 한 마리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른 빵 조각을 조금 떼어 두었다가 참새가 날아오면 주곤 했고 그렇게 참새도그가 주는 빵 부스러기를 쪼아먹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칠십 평생 처음 생기 찬 나날이 찾아왔고 그래서 그는 눈만 뜨면 휘파람으로 참새에게 신호를 보냈고 참새는 이내 날아왔습니다. 노인은 거치른 손이지만 사랑스럽게 참새를 어루만져 주며 정을 쏟았습니다. 비로소 늙은 그의 마음의 창문이 열렸고 자애로운 감정이 속에서 샘솟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행복이 다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런 날들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불행의 여신이 질투의 비수를 휘두른 것입니다. 늙은 죄수는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섬으로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참새를 이렇게 두고 떠난단 말인가!”
며칠을 두고 생각한 노인은 결국 참새를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작업하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뭇개비와 철사 부스러기를 주워 와서 조그만 조롱을 만들었습니다. 외딴섬으로 출발하던 날 그는 ‘참새와 함께라면 지구의 끝 어디든 결코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고 노인은 배를 타면서 허술한 조롱을 가슴에 품고 소중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죄수들이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서 조롱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놀란 참새가 푸르르 날아올랐지만 이내 수면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참새가 조롱에서 빠져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염려한 노인이 참새의 꼬리를 잘라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저 참새를 건져줘요!”...소용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도록 절실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죄수에게서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고 자기연민의 범주를 벗어나질 못합니다.
참새 또한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주는 빵 부스러기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집집마다 키우는 애완동물과의 관계도 그와 비슷할 겁니다.
그래서 참새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어봤으면 ‘그건 빵 조각이야’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어떤 왕자가 자기를 칠면조라고 생각하여 옷도 입지 않고 식탁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빵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걱정이 된 임금님은 여러 사람의 의사를 불러 차례로 진찰하게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를 치료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벗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서 왕자의 옆에 앉으며 “나는 칠면조야”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나도 칠면존데” 하면서 반가워했습니다. 둘은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얼마 동안 함께 지낸 후 그 사람이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칠면조는 옷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왕자는 “칠면조도 옷을 입을 수는 있겠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옷을 한번 입어보고 싶어.” 그러자 왕자는 “나도 한 번 입어 볼까?” 했습니다. 그렇게 옷을 입는 습관을 붙여준 뒤에 그 사람은 식탁 밑에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이걸 먹어도 칠면조는 칠면조겠지?” 라고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자가 “그렇겠지”라며 그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칠면조는 식탁 밑에서 음식을 먹는다고 누가 정했지? 칠면조가 식탁에 앉아서 먹는다고 누가 뭐라하겠어” 라며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왕자로 하여금 옷을 입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유대인 우화 <칠면조가 된 사람>)
이 이야기는 일견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 한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치유의 기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습으로 오신 것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예도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분반 공부를 하고 있었고 선생님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아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잊어버리고 계신가 봐요.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옷도 누더기를 입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살게 되지요.”
그러자 다른 한 아이가 일어섰고 그 역시 가난하여 헌 누더기를 입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두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감사로 받는다는 의미입니다만 이는 흔히 말하듯이 제사랑 저한테 달린 거라는 관점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제한적일까요?
수많은 병자들과 죄인들과 심지어 관원들까지도 예수께로 나아와 믿음을 고백하고 치료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고향 갈리리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종교 세력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반대하고 배척했습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3:37-39)
우리 또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나무에 못 박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를 비웃을 수도 있고 부인 할 수도 있고 그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옷을 벋긴 후 그 옷을 가지고 그분 면전에서 갈라먹기 놀음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양 팔목과 발에 못으로 고정되고 매달려 있어 체중에 몸이 자꾸만 아래로 쳐져 그 고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했건, 무엇을 말했건, 무슨 생각을 했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런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끊을 수 없는 또는 멈추지 않는 이유 말입니다.
도시에 사는 오누이 둘이 시골 할아버지 집엘 놀러 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에게 고무 새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겨냥을 해서 나무며, 가지며, 바위 등등을 향해 돌맹이를 쏘아댔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애완용 오리를 쏴서 죽게 했습니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는데 아무도 없었으므로 가슴을 쓸어내리곤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도 거르고 침대에 일찍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을 때 여동생과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미 식탁에 와 있었고 할아버지께서는 오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예, 너 오늘 나와 함께 낚시가련?” 그러자 여동생이 끼어들었습니다. “할아버지 나 낚시 좋아하는데..” 그러자 할아버지 말씀.“ 넌 오늘 집에서 할머니 콩 까는 일을 도와라” “아냐 할아버지, 그건 오빠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러면서 오빠 귀에다 속삭였습니다.’나 오빠가 할머니 오리 죽이는 것 봤다!‘ 그렇게 오빠가 할머니의 콩을 까게 되었고 할머니와 함께 콩을 까던 손자, 참다 못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내가 할머니 오리를 죽였단 말이야.... 힝...” 할머니는 손자를 껴안으며 말했습니다.“얘, 어제 부엌 창문을 통해 나도 봤다. 네가 말해주길 기다렸다. 이제 됐다. 괜찮아.”
우리는 어느 것도 하나님께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문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오리를 죽이는 것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은 하나님께선 손자를 용서한 할머니처럼 우릴 용서하려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이고 그렇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할머니는 왜 그렇게 하실까요?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할머니의 그 사랑은 본능적인 그리고 숨길수도 멈출 수도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우릴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으로 그분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되고 그분의 생기의 바람으로 생명을 얻은 혈연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흐르는 강물을 아무리 막아도 아래로 흐르듯이 우릴 향한 하나님의 내리 사랑은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의 본능이십니다.
그것은 태초 곧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부터 만들어진 중력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애초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우리지만 툭하면 그 사랑을 거부하고 반역하고 죄를 짓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징계하시며 에덴에서 내쫓으셨지만 그럴 때 조차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짐승을 대신 죽여 가죽 옷을 해 입히시는 속죄를 통한 재회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지독한 하나님의 내리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속죄제사가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고 그것은 아담 때부터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랑 회복에 남는 문제는 참새도 칠면조도 아닌 회개 곧 죄 고백의 문제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술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의 짐을 벗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할머니와 손자처럼 회복하게 되기를 바라시며 그걸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용서가 동시에 만족되고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repentance 의 라틴어 어원은 행동을고치다(to change one`s behavior) 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으로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말합니다. 새로운 출발이라고 해서 과거로부터 가져온 모든 것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고 한번 용서받은 것을 되풀이하지 말되, 회개한 과거를 계속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중 어떤 이는 새 출발을 하고서 과거의 후회스런 일들을 뒤돌아보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소모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손자의 실수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할머니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 할 뿐입니다. 시편103편8-14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한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릴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소성케 되길 원하시는 까닭은 할머니에게 있어서의 손자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임을 알게 하시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에게 사랑은 바다이고, 나무들에게 사랑은 바람이고, 산들에게 사랑은 별이며, 곡식이 익은 들판에게 사랑은 비이고, 해변에게 사랑은 조수인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은 불멸의 황금신전인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빛나는 열쇠인 하나님의 용서의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그 예수가 우릴 향하신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고 그렇게 우리 모습으로 오셔서 회개한 자에게 대속 제물로 드려진 바 되신 예수가 우리의 구원이신 것입니다.
(동영상)
날 구원하신 예수님 영원히 찬송하겠네
저 죄인 어서 주께와 죄사유하심 받으라
주 우리죄로 인하여 피 흘려 죽으셨으니
주밖에 없는 사랑을 만백성 알게 전하세
주예수 사랑 못잊어 나 항상 눈물흘리네
내주를 사랑한대도 늘 맘에 부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