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전국고교생백일장대회 운문부문 수상작
주최 : 민족문학작가회의
일시 : 2003년 7월 26일
<운문부 장원>
과천 중앙고등학교 3학년 5반 이민정
제목 : 뒷골목 공중전화
늦은 밤, 다닥다닥 이마를 맞댄 좁다란 골목마다 술집들이 늘어서 있다 삼겹살 굽는 냄새, 술꾼들이 토해낸 울분들이 길바닥에 술병처럼 나뒹굴고 이따금 술집에서 비틀비틀 나온 사람들이 후미진 곳, 침묵으로 자리를 지키는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 실례를 한다
눈 높이만큼 영․수 철저 지도 서울대생 합격보장, 신장개업 봄빛다방, 돌아와라 경호야, 월세 500만원 선불 줌, 파파라치, 바람에 너덜거리는 벽보들이 오줌자락에 젖어 지도에도 없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누군가 몰래 토해놓고 간 오물들, 눈치 빠른 생쥐떼만 담벼락 구멍 속으로 넘나들기에 바쁘다
문을 연 지 6개월도 안돼 전기누전으로 생업을 잃은 <골목 라면집> 김씨 아저씨, 마지막 남은 희망을 잃어버린 듯 비틀비틀 다가와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통사정을 한다 그저 묵묵히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아저씨가 토해낸 울분들을 담아내고 있다
좁디좁은 골목, 도둑고양이와 생쥐들만 눈 반짝이며 붐비고 술집에서 흘러나온 찌개국물과 술병들만 산처럼 쌓여가는, 흐린 외등만이 불빛을 빌려 가까스로 밝히는 좁다란 골목
오늘도 그 골목에 가면 상처의 흔적들로 울리는 공중전화가 기다리고 있다
<운문부 차상>
충북 옥천고등학교 3학년 7반 강세희
제목 : 공중전화 - 삼촌에게
잡음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담뱃집 처마 아래,
그늘 안으로 공중전화가 몸을 밀어 넣었다
물 먹은 듯한 전화번호 책이
겨우 매달려 있어
햇살의 뒤틀림에 부풀어 진다
안으로 움켜쥐고 있던 먼지에
삼촌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공중전화 버튼 위로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누른다
농사꾼이 되기 싫다던 삼촌은
어둠이 번진 논두렁을
종종 비칠걸음으로 걸었다
삼촌이 담뱃집 주위를
자주 맴둘았기 때문일까
그해 삼촌이 객지로 나가자
할아버지는 공중전화 때문이라며…….
삼촌의 그림자가 담뱃집 처마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아
바람도 그 주위를 맴돌고
숫자 버튼 위로 앉은 먼지가
자꾸만 뒤척인다
어디선가 잡음 같은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운문부 차상>
대원 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5반 목정원
제목 : 두고 온 아이
그 깊은 아래에는 잠자는 바다가 있었다
오래 전 떠나보낸 흙덩이가 묻히고 오는
먼 햇살의 흥얼거림을 듣고 있었다
부딪는 거품과 입 벌린 해안선의 허기가 만나는 곳,
우연인 듯 만나서 몸 섞는 곳에
한 아이를 나는 묻어두었다
손톱 발톱마다 새까맣게 온통
햇살의 냄새가 뱄다
고걸 파먹으면서 나는 자라나
마른 하늘 아래를 맨발로 걸으며
문득 목이 마르다
두고 온 아이가 지금,
숨겨진 수평을 마시고 있다
<운문부 차하>
경기고등학교 3학년 7반 오형도
제목 : 갯벌 - 짱뚱어 구이
갯벌 위에서 낚아 올린
짱뚱어 한 마리
석쇠에 올려놓자마자 팔딱팔딱
활시위 마냥 몸 튕기고 있다
살아 생전 한번도, 치열하게 꼬리 흔들며
헤엄친 적 없는 까닭이다
갯벌 속에서도 저렇게만 헤엄쳤으면
뭐가 되어도 됐을 거라고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하지만,
밑이 훤히 보이는 석쇠 위에서 위태 위태
헛다리짚어 본 사람은 알게 될 테지
죽을 때조차 곧게 짜여진 일자의 관에서
조용히 숨 거둘 사람들에게
초승달처럼 휘어진 채로 구워진
짱뚱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갯벌 빛 밤 하늘
초승달이 튕기고 튕겨서
보름달이 되는 비밀까지
<운문부 차하>
서울 진명여자고등학교 3학년 12반 김지예
제목 : 그 여름, 공중전화에서
1.
수화기를 든다
손끝으로 모여드는 시신경
여름 한낮의 열기가 한껏 부풀어
김씨 아저씨 등줄기 사이로 흰 포도알이 영글고
손 마디마다 툭 불거진 정맥 후끈 달아오른다
겹겹이 쌓인 지문이 도장처럼 찍혀 그 내력을 알리는
공중전화 버튼들
침묵을 삼킨 채 부재중이다, 그도
얼마나 오랫동안 부재중인가
아저씨의 웅크린 어깨 너머
민수 엄마, 민수, 민정이, 민혜…….
오래 전 흑백사진 속에 매몰된 가족들이
파장을 이며 출렁이고
꾹꾹 버튼을 매만지는 손가락 위로
몇 차례의 소나기가 지나갔던가
아저씨는 힘주어 붙든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지난 기억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간다
2.
그는 공중 뿌리발 식물이 되었다
오년 전 밀어닥친 경제불황, 주식폭락, 연쇄부도
검은 파도는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은행지점장이었던 아저씨를 저 끝까지 밀어냈다
하늘을 향해 돋아난 실뿌리는
그 어느 젖은 눈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언제쯤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움만 무성한 억새풀로 흩날리고 있었다
3.
뚜뚜뚜뚜우
고개 깊숙이 떨군 수화기가
온몸을 흔들어 참았던 붉은 울음을 토해낸다
저만치 멀어지는 도둑고양이 울음소리
아저씨의 귓전을 울리고
민수 아빠, 돌아와요!
누런 갱지 벽보에 깨알 같이 적힌 전화번호와 활자들이
한 줄기 바람에 땀을 식히며
부풀어 오른다
전화박스 아래 그늘진 곳
맨드라미가
주머니 속에 쟁이고 있던
그리운 얼굴을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운문부 차하>
상명고등학교 1학년 1반 민경의
제목 : 공중전화 -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의 공간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의 힘으로
난 깨어난다
내 안에서 멋대로 하는 그들
소리치는 남자
눈물을 흘리는 여자
딸을 찾는 할머니
비를 피하는 소녀
그저 보고만 있을 뿐,
뭐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하세요
너무 슬퍼말아요
댁이 어디세요
조금 있으면 비가 그칠 거야
난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잊지 못하는 걸까
그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오늘도 역시 난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하늘이와 아이
“엄마 오십원만 주세요.”
“또 가려는 구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오십원을 손에 꼭 쥔 채
그 곳으로 달려간다
침착하게 숫자들을 꾹꾹 누른다
“여보세요. 엄마.”
“그래, 오늘 하늘이는 어떠니?”
“아주 좋아요. 들어갈게요.”
사진첩에서 본 사진
‘하늘이와 함께’
하늘색 크레파스로 쓰여진
비뚤비뚤한 글씨. ‘하늘이’
라고 써있는 종이가 붙은
그 곳에서
뒤꿈치를 들고 동전 입구를
찾는 아이
그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하늘이와 아이는
찾지 못했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
내 손의 작은 전화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