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신 목적이 여러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는 말이겠다. 그 중의 하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 마태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하여(마8:17)"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왔다 가신지도 어언 이천 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과연 인간들의 연약한 것과 병은 온전히 예수께 짊어지워져서 인간들은 무병장수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자들 대부분의 전매특허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이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1:16)" 같은 말씀도(분명히 명령법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성화(聖化)라는 묘한 교리에 꿰어서 "어떻게 인간이 온전할 수 있나요? 온전하도록 노력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 아니겠습니까"하는 변명으로 두루뭉실 넘어간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온전하라」나「거룩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그렇게 못 살줄 뻔히 아는 하나님께서 괜히 우리의 마음에 짐이나 지우려고 그러셨는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線)은 온전하도록, 거룩하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당신처럼 온전하고 거룩해져야하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려고 노력한다고 부모를 공경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로 공경해야 공경하는 것이다. 기도생활을 중요시하시는 분에게 묻겠다. "당신은 사도 바울이 말한바「쉬지 않고 기도하라(살전5:17)」말씀대로 정말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가?" 성경의 일점일획도 떨어지면 안 될 테니까 생활의 대부분을 기도하는 시간에 할애를 했다 해도 말씀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명령과 우리의 반응사이에 어떤 구렁이 있는가? 성경은 "이러이러하게 하라" 인데 우리의 반응은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럴 수야 있나요 다만 그렇도록 노력하는 거지요"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한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그러니까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얘기인지 아둔한 필자생각으로는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들뿐이다.
아니다. 분명히 성경의 명령대로 살았으면 산 것이고 못살았으면 못산 것이지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다. 즉 자신이 연약해서 성경말씀대로 못살았다는 말은 그의「언약」을 담당(마8:17)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반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를 만났다면 그분이 그의 언약을 짊어지셨을 터이요 그랬더라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아멘」으로 살아졌을 것이다. 문제는「언약」을 짊어지러 오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자기는「연약하기 때문에」를 변명으로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딤후3:7).
인간이 연약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연약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셨는데, 문제는 오신 예수께서 너의 연약을 고쳐 강건하게 해주시겠다는 데도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불신이란 말이다. 그래서 미리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5)"고 했다.
무슨 말씀인가?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랴. 즉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귀는 듣기에 둔해지고 눈을 감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혹시」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래서 말씀을 보게 되어「예수 식으로」하나님을 믿게 되면 어떻게 할까「염려하고」있다는 말이다. 지금의「연약 상태」가 좋다는 말이다. 괜히 지금도 잘 믿고 있는데 예수에 의하여 내 믿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를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성경학자나 목사님들의 말대로「죄」가운데 태어나서「죄」가운데 살아왔다. 즉 죄가 우리의 체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죄인의 상태가 좋은 것이다. 죄를 낙(樂)삼아 즐기고 있다. 솔직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가 성경 적 죄는 아니란 말이기도 하다. 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죄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환영받았을 것인가? 죄에서의 해방은 미지의 세계요 미지라는 것은 불안을 수반하게 마련이므로 미지의 예수에게 삶을 맡기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 이스라엘백성들이다. 어찌 이천 년 전 유대인에게 국한된 말이랴 마는 혹자는「죄를 즐긴다」는 말에 펄쩍 뛰실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잠깐, 그러면 죄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도 아니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죄를 즐긴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바로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그것이 죄를 즐기는 것 이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저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사하여 주옵소서” 운운하는 자체가 죄를 즐긴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히4:13). 우리가 죄지었다고 고백하기 전에 알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자(요일5:18)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짓고 회개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죄의 개념도 다르고…
오늘 본문 히4:1은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자」(청유형)로 시작된다. 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것이 그 다음 말씀인데 즉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 같은데, 무슨 말인가? 이 부분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즉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분사의 양보) "너희 중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원문을 옮겨보자. μ?ποτε~δοχ? τι? ?ξ ?μων ?στερηχεναι. 이 문장의 주어는 τι?(티스, 어떤 자)이고 동사는 δοχ?(도케)이며 μ?ποτε(메포테, ~하지 아니하도록, 영어의 lest)는 접속사로서 4장1절 전체문장의 주동사인「두려워하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δοχ?(도케)라는 동사와 마지막에 나오는 ?στερηχεναι(휘스테레케나이) 부정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δοχ?(도케)는 동사 δοχεω(도케오,생각하다,여겨지다 기뻐하다)의 가정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이고 ?στερηχεναι(휘스테레케나이)는 동사 ?στερω(휘스테레오, 부족하다, 궁핍하다 모자라다)의 완료능동태부정사이다. 결국 문장의 주어인 τι? ?ξ ?μων(너희 중의 어떤 자)이 무엇을 어떻게 할지도 모르니까 두려워하자는 얘기인데
개역의 번역처럼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두려워하자는 얘기인가?
δοχεω를 개역에서는 "있을까"로 번역을 했는데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되려면 부정사 ?στερηχεναι(휘스테레케나이)가 분사 ?στερων(휘스테론)으로 바뀌어져야한다. 즉 "미치지 못하는 자"의 "미치지 못하는"은 분명히 분사로서 τι?를 수식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στερηχεναι(휘스테레케나이)는 분명히 부정사로서 τι?를「수식」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부정사가 문장 안에서 명사적 기능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단어는 타동사 δοχεω(도케오)의 목적어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뜻이 어떻게 되는가? 「너희 중의 어떤 자가(τι? ?ξ ?μων) 부족한 것(?στερηχεναι)을 좋아하지(δοχ?) 아니하도록(μ?ποτε)」이다.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부족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노예근성이요 거지근성이다. 자유는 자유를 알고 누리는 사람에게나 소중한 것이지 노예에게는 서푼어치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부족한 것(?στερηχεναι,휘스테레케나이)이란 무엇인가? 눅15:11이하에 등장하는 집나간 탕자가 가지고 간 재산을 다 없이한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느낀 그「궁핍함」이다.
그런데 그「궁핍함」을 좋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결코 그러면 안 되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걸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죄인이다"라는 자책이 그로 하여금「궁핍함」을 참고 지내게 만드는 것이다. 즉 아버지 재산을 몽땅 허비했다는 죄책감이 감히 아버지 집의「풍요함」을 꿈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작 죄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궁핍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궁핍을 무슨 팔자로 알고 살아가는데 있다. 즉 체면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분이 간혹 한둘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을 한 유대인들 모두가(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의 풍요보다 애굽의 궁핍(실제로는 풍요)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이다.
예수 안 믿고 사는 삶에 넌더리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예수 믿을 필요 없다. 즉「궁핍함」이 지나쳐서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구할 수 없어「궁핍」이 무엇이고「풍요」가 무엇인지 안다는 말이다. 그 전에는「궁핍」하게 사는 것이 무슨「훈장」인 줄 안다. 그래서 하는 말-나는 부족하오나-이다. 부족한 줄 하나님이 아신다. 그래서 안식을 약속하시고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도 있으니(히4:10) 우리도 들어가기를 힘쓰자(히4:11)고 권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안식을 살아서 누리느냐고 어거지 부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히4:7)"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가나안을 모르고 우리는 죄인이고 연약하고 부족해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이다. 죄인이고 연약하므로 부족한 채로, 궁핍한 가운데, 죽어 천국의 소망이나 가지고 사는 것을 믿음의 생활인 줄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히4:2은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탄식한다. 즉 들은바 말씀(곧 안식)이 우리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도록 해주겠다는데 "우리는 죄인이므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 말란 말이다. 하나님 앞에 오기 부릴 일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것이 팔자타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정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말로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하셨다. 어디로 오라고 청하시는가?「여호와께로」아닌가? 여호와가 어디 계신가? 자기가 죄인인줄 알았으면 입술로「나는 죄인입니다」하지 말고 그 죄를 사하시는 여호와를 찾을 일이다.「교회」에 그 여호와가 계시는가? 맞다. 여호와하나님은 교회에 계셔야 된다. 그러나 인간들이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놓은 그곳이 교회인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고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잠잠 하자. 그래도「예배당」도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지 말자. 예배당이 있기 전에 여호와를 만날 일이다. 그래서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죄를 눈같이 양털같이 씻김 받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리고 나서야「예배」를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다만 성경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죄를 즐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또 살다보면 연약하므로 또 죄짓고 그래서 한달 지은 죄 금식기도로 회개하고 그래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히는 죄-사랑하지 못한 죄, 충성 봉사하지 못한 죄, 부모님 공경하지 못한 죄, 전도하지 못한 죄-끝도 없다. 히6:1은 그런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일을 버리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죄란 사랑하지 못한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아니한 것이 죄라는 그 생각이"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연약」이란 것이 얼마나 막강한 죄의 무기인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를 입에 올리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연약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연약이란 하나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할 수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연약하다는 변명은 자기는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자. 비록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누가 부족한 것(곧 궁핍, 연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도록(히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