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상업적인 만화가 성립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일본 만화는 유럽
만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사회에서 만화는 출범초기부터 억압적인 체제와 잦은 갈등관계를 빚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일본 만화의
틀이 잡히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세기말이 되면서 유럽 만화로부터 관심이 미국 만화로 돌려지면서 미국의 신문 연재만화가 초기 일본
만화가들의 주목을 받아 도입되었으며, 1902년에는 기타자와라쿠텐(北澤樂天)에 의 해 일본 최초의 연재만화가 나타났고, 나아가 1920년대
중반에는 최초로 어린이를 위한 연재만화가 탄생하였지만, 초기 일본 만화가 견지했던 비판적 시각들은 1930년대 일본이 제국주의에 들어서면서,
'치안유지법'에 의해 정부의 사상검열이 강화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만화의 근간을 이루었던 성인대상의 사회 비판적
만화는 점차 퇴조의 길을 걷게 되고, 그 대신 보다 위험성이 적은 어린이용 만화와 유머 만화가 각광을 받게 된다. 일본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처음 출범 때와 달리 어린이를 위한 매체로 고정되는 것은 바로 이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만화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검열은 사라졌고, 전후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는 만화발전에 풍부한 토대가 되었다. 1946년에 출현한
<사자에상(サザエサン)>이 특히 그렇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는 전후 가난에 시달리던 어린이들에게 값싼 오락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만화의 주된 특징으로 남아 있는 흑백만화가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전전 일본만화는 컬러만화가 주조를 이루었으나 전후
일본인들의 빈곤함과 결합되어 컬러만화가 퇴조하고, 흑백만화가 정착하였던 것이다.
전후 일본만화를 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본만화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데쓰카 오사무(手塚治蟲)의 활동이다. 1947년 20살의 나이로 <신보물섬(新寶物島)>을 출간하여
공저의 인기를 누렸던 그는 독창적인 화면구성과 음향효과의 사용, 자유로운 칸의 크기 변화 등을 도입함으로써 일본 만화의 독특성을 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한 그는 1953년부터 1956년 사이 전후 르네상스를 구가하던 일본만화가 만화는 공부의 적이라고 생각한 학부모들과
교사, 아동문학가들이 일제히 만화추방운동을 전개하는 '만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일어나서 화가 마녀사냥식 비판을 받고 퇴조하고 있을 때,
이러한 편협된 학부모들과 교사들에게 만화적인 특성으로 승리를 이끌어 성인층까지 독자층을 확대시키는 계기까지 만들었다. 데쓰카 오사무의 승리는
이제 만화는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창조적 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오랫동안 일본 만화를 짓누르고 있던 어린이용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사라져 가게 만들었다.
또 1959년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高談社)가 만화 주간이 <소년 매거진>, 그리고
소가쿠간(小學館)이 <소년 선데이>를 동시에 창간했다. 60년대 후반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이른바 만화 주간지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것은 만화가 음지에서 양지로 자리를 잡는 의미가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만화는 더불어 이 시기의 경제부흥으로 어린이들의 구매력이 상승함에 따라
대본소 체제가 서서히 몰락하면서 일본 만화의 급속한 성장을 이끌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만화대국으로 자리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