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聖靈)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聖靈)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肉體)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삶의 목적과 사명이 뚜렷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쉽게 피곤을 느끼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 꿈과 비전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자기연민과 자괴감에 빠져 들 수밖에 없는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 빠진 고무풍선과 같은 삶일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의 심각한 고민은 바로 자신들의 " 삶의 목적" 과 "내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사명을 깨닫지 못한채 살아가는 "허무한 삶"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득 채우고 또 채워도 무언인가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즐기고 싶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그런 인간적인 본능을 모두 다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는 건 공허하고 텅 빈 가슴뿐인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가난과 배고픔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보다 살만한 여건 속에 있던 고위층과 펜들에게 많은사랑과 관심을 받고 살아오던 유명 연애인들의 자살률이 더욱 심각하다. 문화수준이 높고 경제력이 탄탄할수록 왜 자살률이 높은가?
많은 사람들이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직장. 좋은 학교 등등 많은 것을 많이 소유하고 높아지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한평생 따라 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허전하고 인생이 허무해지고 우울해지는것이다. 아!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아! 이게 아니었구나! 후회도 한다. 결국, 내가 누군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지? 라는 스스로의 질문앞에 부딪쳐 혼란스러워 하기도한다.
"삶의 목적" 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좌절하고, 때로는 자살을 선택하거나 탈선을 하게 됩니다. 중년층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잡았으나, 사업에는 성공했으나, 자녀들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삶을 생각해 보면,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평안이 없고 찾아오는 공허감에 힘들어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갈증을 느낀 저들은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와 말씀 중에, 찬송 중에, 기도 중에,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고 죄에 대한 아픔 때문에 눈물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도 해봅니다. 때로는 어떤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아 이런 삶을 계속 살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집회가 끝나면 거기서 그만입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작심삼일 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는 것이다. 성령님을 모신 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믿는 것 같은데 믿음의 열매는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치 못하다. 이러한 영혼들은 반드시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닥치거나 세상의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그냥 주저 앉는 사람들이다. 마치 12제자들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 옛날 일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치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눕는 것과 같다.
그렇다. 세상의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일 수 없다.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심리적 상태를 ''존재적 진공상태''라 표현했으며 그 의미는 마음에 주인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과거 유대교에 열심을 내며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사울의 인생이 그랬다. 성경책을 들고 달달 외우면서도 성경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따르고 믿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는데 사울이 앞장선 것이다. 그런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 비로서 참 인생의 행복과 사명을 깨 닳게 되었던 것이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우리 안에 내영혼을 축복하시는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한다. 성령은 인간을 중생시키고 새로운 본질, 새 마음 새 사고방식, 새로운 모든 것을 주시며 진정한 소망이 되신다. 사람들이 일단 성령이 충만해져서 그의 지배를 받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악을 알고 자신들을 쳐서 복종 시키며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과 감격과 찬송이 있다. 늘 원망이 있고 회의가 있던 우리 인생이 찬송과 감사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축복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 없이는 이 악한 세대를 승리 할 수 없다.
구약시대의 타락했던 삼손도 어리석은 삶을 보내고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던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을 떠나 기도생활을 하지 않았던 삼손은 다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의 비참한 실패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을 깊이 느끼면서 '오 주여, 지나온 날을 후회합니다. 회개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삼손은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합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 하고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것에 노예가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유 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삼손의 위대한 모습이다.
실패한 인생이 내가 죽어서라도 주님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는 필사각오로 이방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처럼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인생을 더럽고 추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하는 이방신전을 찾아 무너뜨리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서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꾸고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만 살게 하시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님만 위해 사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수여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창조물과 재창조물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불어넣는 하나님의 숨결인 것이다". F.W.Dillistone은 성령님을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 이라고 했다".그렇다. 성령님은 회복의 영 이다. 성령님은 치유의 영이다. 성령님은 살리는 영이다. 성령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죽었던 것들이 살아날 것이다. 성령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새 생명이 일어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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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영 살리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혜메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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